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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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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한 지 16년이 지나버렸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햇수다. 10년에 6년을 더 보탠 숫자니,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정말 16년이 지났단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이없다. 퇴직하면 쌓아둔 책, 읽고 싶은 책 실컷 읽고, 1년에 한 권씩 책을 낼만큼 글을 쓰고 싶었는데 참, 어이없다. 육십이 될 때까지 두어 해는 참하게 놀고, 60대를 참으로 멋있게 보내고 싶었는데, 그 60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안타깝다. 허무하다. 이것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돌이켜보면 직장 일하면서도 술 실컷 마시고, 월간지를 만들면서도 평균해서 1년에 한 권씩은 책을 냈는데, 퇴직 후 16년 동안 단편집 1권과 짧은 장편 2권, 그림책 두세 권이 전부다. 간간이 청탁 원고를 쓰기는 했지만 약속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10년도 아니고 10년이 훨씬 넘는 20년에 가까운 16년 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새삼 억울하고 안타깝다. 물론 《열린아동문학》을 만들고 ‘동시동화나무의 숲’을 가꾸는 일을 했지만 그 일로 글을 못썼다는 것은 부끄러운 변명이다.
무엇 때문일까, 곰곰이 생각하니 원인이 있긴 있었다. 첫째는 숲을 가꾸는 일 때문이 아니라 숲을 가꾸면서 딴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화 쓰기가 버거웠던 것이다. 한 마디로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핑계로 동화 한 편 쓰는 것보다 나무 한 그루 심는 게 더 낫다는 궤변을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공공연하게 여기저기 그런 마음을 늘어놨다. 그렇게 생각한 배경은 생명력이었다. 새로운 작가들이 새롭고 훌륭한 작품을 쏟아내는 데 비해 내 작품이 너무 초라했기에 지금도 읽히지 않는 동화를 100년 후에는 누가 읽어줄 것인가에 방점을 찍었다.
100년 후가 아니라 당장 외면 당하고 있는 내 동화에 비해 지금 심는 한 그루 나무는 머리 쓰지 않고, 정성만 주면 100년은 너끈히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신이 났다. 손가락 하나 길이만 한 동백나무 한 그루 심어놓고 100년 후 우람한 고목에 꽃이 피면 그 꽃 아름답기 그지없을 것이다. 목숨을 다하고 떨어진 빨간 꽃송이로, 붉은 그 나무 아랫길을 걷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즐겁고, 온종일 일해도 피곤하지 않았다. 100년 후 그날을 위해 내 한 몸 희생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 일이 장하고 장했다. 동화를 써서 반백 년도 안되어 잊혀질 내 이름보다 이름은 없어도 이 나무를 심은 사람, 이 숲을 가꾸는 사람으로 희미하게 그려지는 것이 백배, 천배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글 쓸 시간이 있었겠나.
그리고 두 번째는 동화에 대한 회의다. 나는 이제까지 동화란 옛날 옛적 원시인 아버지와 원시인 어머니가 원시인 아이에게 둘러댄 이야기가 원초라고 생각했다. 집도 아닌 동굴 앞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잠이 안오는 밤의 산천을 보고 원시인 아이가 이것저것 자꾸 물었겠지. 낮에는 멀쩡하던 앞산의 소나무와 바위가 호랑이도 되고 곰도 되었겠지. 원시인 아버지와 원시인 어머니가 자꾸자꾸 만들어 낸 이야기가 동화의 뿌리라면 시는 무엇이고 소설은 무엇일까? 다, 동화의 아랫것들이 아닌가?
가장 최근에, 최근이라고 하지만 9년 전에 낸 내 책의 ‘작가의 말’에서 -‘소년소설’이라는 말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동화’라는 말, 듣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그 말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동화를 쓰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사이 ‘동화’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이 읽는 모든 이야기책을 동화’라 쓰고 발간했기 때문이다. ‘동화’가 무엇이라는 정답은 없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던 ‘동화’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은 슬펐다. ‘그러면 무엇이 동화일까’라는 생각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