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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사람 사는 이야기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모여 숲을 이루나니 그 숲에 사람과 짐승이 깃들어 살아가고!

김창갑 1959년생, 회화면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02월 26일
↑↑ 저 능선으로 임도를 이어야지, 뭐니뭐니해도 능선길은 걷는 맛이 최고야.
ⓒ 고성신문
# 소나무처럼 살아오신 曾祖母, 祖母, 어무이
회화면 봉동리, 김씨 집안에 시집오신 증조모님은 스물여덟에 혼자 되셨다.
두 아들을 키우시며 밤낮없이 길쌈으로 살아오신 삶은, 외로움의 씨실과 눈물의 날실로 엮은 피륙의 삶이 아니었을까?
삼베를 짜기 위해서는 일이 참 많다. 삼을 재배하여 베어내고 장작불을 지펴서 물을 붓고 그 증기로 삼을 쪄 냈다. 다음에는 삼의 껍질을 벗겨서 묶음 단위로 햇볕에 말리는 과정이 필요했고, 삼껍질을 삼톱으로 째고 짼 삼을 한 올씩 연결해 나가는 삼삼기, 실타래를 빨아 헹궈 말린 실떡을 직물의 길이와 같은 낱실로 준비하는 베날기가 이어졌다. 좁쌀풀을 잘 쑤어 실에 풀칠을 하여 베매기를 거친 뒤 베틀에 실을 올려 본격적인 길쌈을 하고, 그 베를 시장에 내다파는 일까지 모든 과정을 증조모님은 혼자의 몸으로 해 내셨다. 증조모님은 밤낮없이 길쌈하여 산을 사셨고 상당한 전답을 일구셨다.
두 분 조부님도 오십 세 즈음에 돌아가셨고, 내 부친도 쉰셋에 돌아가셨으니, 남은 가족들의 노동이 얼마나 깊고 고달팠는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증조모님은 아들만 둘, 조모님은 팔 남매, 내 모친은 칠 남매를 낳으셨다.
농사와 자식까지 많은 집안에서 사십대에 홀로 되신 조모님과 모친은 질곡의 삶을 사셨다. 농사가 많으면 뒤주에 곡식 떨어지는 일은 없겠지만, 남정네 몫까지 맡으셔야 했던 노동의 강도는 얼마나 팍팍했으랴.
내 살아오면서 짚어보니, 이 땅에서 농사를 짓고 농작물로 돈을 만드는 일은 참으로 고달프다.
내 증조모님, 조모님, 모친은 소나무를 닮으셨다. 긴 세월의 노동으로 손등은 소나무 수피처럼 거칠고 손바닥은 옹이처럼 굳은 살이 박히셨다. 그러나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처럼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 집안을 끌어오셨고 자식들을 키우셨다.
아침 햇살이 소나무의 빗살같은 이파리에 스며들기 훨씬 전에 잠깨어 방아를 찧고 밥을 지어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자투리의 땅 한 뼘도 그냥 놀리는 일 없이 논두렁콩을 심으셨고 밭둑엔 두불콩을 올리셨다. 탱자나무 울타리 밑에도 호박 구덩이를 파셨고, 밭둑엔 정구지 뿌리를 심으셨다. 자식들 기죽이지 않으시려 삼베옷 바느질에 더욱 정성을 들이셨고 무명저고리도 인두로 다려 입히셨다. 된장국도 자박자박 끓였고, 풋이파리 하나로도 생으로 무치고 나물로 삶고 국으로 끓여 서너가지 반찬을 만들어 먹이셨다.
우리 산 어디에나 사철 푸르게 서 있는 소나무.
소나무를 보면 반갑고 정겹고 친숙하다. 소나무처럼 자식들을 키우시던 내 증조모님, 조모님, 모친의 삶을 기억하며 나는 경건해진다. 소나무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 되려한다.

↑↑ 숲 속에 지은 황토 집, 누군가의 쉼이 되고 휴식이 될 수 있으면 좋으리.
ⓒ 고성신문
# 아카시(아카시아)나무 닮은 증조부님, 조부님, 내 아부지
아카시아는 어디에나 뿌리를 잘 내리는 나무다. 또한 잘라버려도 금세 싹이 나올만큼 강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또한 화력이 좋으며 목재로서의 재질도 일품이다. 노르스름한 색깔에다 단단하며 무늬도 아름다워 고급가구를 만드는 재료로 쓰인 나무다.
흔히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산을 망치려고 일부러 심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광복 이후에 조림의 목적으로 더 많이 심었고, 한때는 우리나라 전체 나무의 10%에 육박할 정도였다. 또한 우리나라 꿀 생산량의 70%까지 차지하므로 무시할 수 없는 나무중의 한 종류다. 그러나 20~30년의 청년기를 지나면 급격히 자람이 나빠지면서 서서히 주위의 토종 나무에게 자리를 내주는 나무다.
長壽 하셨다고 말할 수 없는 세 어른은 그 삶이 아카시나무와 닮았다. 그렇지만 목재로 꽃으로 생명력으로 화력으로 살아오셨던 귀한 존재셨다. 세 어른의 자손들은 이 땅의 또 다른 나무로 왕성히 활동하며 생명음을 증거하고 있으니.

# 산수유나무와 내 아내
봄 햇살을 받아 몽글몽글 산수유꽃이 피고 있다. 매화가 목청을 돋구듯이 화들짝 피어나서 일제히 꽃잎 떨구고 그 자리에 매실을 맺는 잰걸음이라면, 산수유는 진득하게 오래 피는 꽃이다. 한 떨기에 자잘한 꽃술이 수줍은 듯이 피어나면서 꽃받침이 튼실하다.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며 열매를 키우다가 가을이면 빨갛게 익혀내는 산수유나무처럼 아내는 내실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산수유는 신선이 먹는 열매라 칭한 것처럼 귀하고 오붓하다. 여린듯하지만 강단 있는 줄기마다 실하게 열매를 품고 있다가, 겨울이 되면 새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산수유나무는 너그럽고 향긋하다.
7남매의 맏이에게 시집 와서 애 많이 쓰면서 살아온 사람이다. 도시 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나무 농사를 시작한 농부의 아내로 살아감이 쉽지 않았으리라. 의욕 넘치는 남편은 이것저것 일을 저지르는 탓에 수습하고 정리하느라 고생하며 살았다. 가지에 앉아 부지런히 열매를 따 먹고 훌쩍 다른 일 하러 날아가는 새처럼 오지랖 넓게 산 나는 아내가 고맙다. 10년 뒤에는 아내 손 잡고 팔도를 유람하며 만고강산(萬古江山)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리.

# 배롱나무와 두 아들
아내와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다. 서른이 훌쩍 넘었는데 프리덤(freedom)을 외치며 산다. 며느리는 언제 맞을 수 있을지, 손주는 안겨주기라도 할지, 결혼할 생각은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서른이 될 때까지는 은근히 압력도 넣고 기대도 했지만 이제는 서로가 결혼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암묵적으로 합의한 셈이라고나 할까.
이 세상에 자식을 낳아 기르며 후손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청첩장을 받을 때마다, 친구 자녀의 혼사 소식을 들을 때마다 부럽다. 내 아들들의 배필을 기다림이 깊어가지만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자식농사’ 아니던가.
한 여름을 증거하며 100일 이상을 꽃피우는 배롱나무는 화사하다. 매끈하게 뻗은 수피는 다듬어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목백일홍, 간지럼나무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며 정원수로 사랑받는 나무다. 배롱나무는 한 송이의 꽃이 계속하여 피는게 아니라 한 송이가 지면서 다시 새 꽃봉오리를 피워 올린다.
내 자식들이 젊음의 한 가운데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자신의 꿈을 한 송이씩 피워 올리고 다시 또 새로운 계획을 세워가길 소망한다. 배롱나무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길 희망한다.

# 감나무 같은 내 친구들
인간은 혼자서 살지 못한다. 서로 어깨를 겯고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나 또한 어릴 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고향 동무들과 대학, 직장의 친구들까지 더불어 함께였다. 내 삶의 징검다리 같은 친구들은 감나무와 닮았다.
시골 집 우물가에 가지를 늘어뜨리던 반시, 밭둑에서 묵묵히 익어가며 맛과 향수를 주던 대봉감, 장난치듯 한 입 베어 물었다가 깜짝 놀라던 떫은 맛의 땡감까지 모두 정겹다.
감꽃이 피면 그 아래에 둘러앉아 꽃목걸이를 만들며 놀던 이웃집 가시나들은 모두 건강히 잘 사는지? 내 딱지랑 구슬이랑 나눠달라고 떼를 쓰던 불알친구들은 다들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산림공사를 맡아 힘들 때 묵묵히 지렛대가 되어주던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 내가 이만큼의 일을 일구고 살아가는 과정에 친구들은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배 고플 때 대봉감 하나만 먹어도 한 끼 식사가 되는 것처럼, 껍질을 벗겨 햇볕에 말리면 달콤한 곶감이 되는 반시처럼, 때론 터무니없이 내 뒤통수를 치는 땡감처럼, 친구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내 사업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배씨 고택을 샀다. 남의 조상이지만 우리 고향에 집 지어 살아오셨으니 보존은 우리의 몫일지니.
ⓒ 고성신문
# 편백나무처럼 피톤치드와 쉼과 힐링을 주고 싶은 나
나는 평생을 나무와 함께 살았다. 어린 날 우리 동네에는 대나무숲이 있었다. 바람이 대나무 숲을 지날 때면 휘파람 소리가 났다. 봄이면 죽순을 꺾었고 대나무 회초리를 만들어 팽이를 돌렸다. 굵은 대통 속에 쌀을 넣어 밥을 해 먹었고, 대나무를 베어 울타리를 만들었다.
대봉감 하나로 끼니를 대신 한 적이 있었으며, 아카시아꿀을 빨아먹으며 베릿하고 감미한 단맛을 알았다. 소나무 순을 잘라 씹었고, 솔방울을 주워 난로불을 피웠고, 갈비를 긁어 소죽을 끓였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청솔가지를 잘라 달집을 지어 소원을 빌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도시에서 월급 받는 갤러리맨의 삶도 살았다. 이름 난 화장품회사에서 팀장으로도 일했고 대리점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늘 꿈을 꾸었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 나무를 심고 나무를 키우며 나무 아래 잠드는 날을 기다렸다.
불혹(不惑)이 되던 즈음, 나는 과감히 도시 생활을 접고 귀향했다. 망설임 없이 이삿짐을 쌌다. 고향에 돌아와 나무를 심고, 나무와 함께 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4만여 평의 산에 임도를 내고 편백나무를 심었다. 나무를 심는 일은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을 내다보고 해야 하는 일이다. 한 그루의 묘목이 청년기가 될 때까지 수십 년이 걸린다. 나무의 삶은 인간의 삶보다 길고 멀기 때문이다. 내가 나무를 심는 일은 단기간에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닌, 남기기 위해서이다. 나무를 심어 그 나무가 자라면 가지에 깃들 새들이 올 것이고, 수피를 먹고 자라는 곤충이 알을 낳을 것이다. 곤충을 먹이로 새들이 노래하며 새끼를 칠 것이며, 나무는 제 속에서 자라는 수많은 생명을 행복하게 바라볼 것이다.
햇살은 공평하게 손을 뻗어 나무들을 다독일 것이고, 지나가던 바람도 날개를 접고 이파리에 앉아 쉬어 갈 것이다. 구름은 나뭇가지에 그림자를 걸 것이며 태풍은 맘껏 목청을 높일 것이다.
나는 사업으로 번 돈을 모두 산에 쏟아 부었다. 임도를 확장하고 개울을 넓히고 석축(石築)을 쌓았다. 쌓아올린 돌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무늬를 보여준다. 붉은 빛깔의 사천산 돌, 거창지역의 화강암, 다른 지역의 현무암, 이암, 사암, 퇴적암 등 다양한 돌들이 우리 산으로 이사를 왔다.
그 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저마다의 색깔과 문양을 지녔다. 어느 하나 같은 모양이 없다. 나무 또한 마찬가지로 제 각각의 수피와 가지를 키우는 것이다.
언덕에 황토집도 지었고 정자도 두 개나 세웠다. 산마늘을 재배할 하우스와 표고버섯 재배용 하우스도 몇 채나 지었다. 의욕이 넘쳐나서 자꾸 일을 벌인 셈이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자주 놀린다. 산에 쏟아부은 돈을 부동산에 투자했으면 부자가 됐을 거라고도 한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여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원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내 계획대로 실천한다면 그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 어디 있으랴. 돈은 버는 재미도 있지만 쓰는 재미도 있는 것을.
나는 나무와 관련된 일을 하면 힘이 불끈 솟구친다. 저절로 웃음이 나고 즐겁다.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임도 근처에는 황칠나무를 심었고, 임도 위쪽으로는 구지뽕을 심었다. 편백은 제법 자랐으니 매년 가지치기와 간벌을 한다. 이 나무들이 언제쯤 우거진 숲이 될지는 나도 모른다. 마을 근처의 나무보다 산에 있는 나무들은 자람이 느리다. 척박한 토양과 세찬 비바람을 견뎌내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나무는 자랄 것이다. 하나의 나이테를 만들기 위해 1년이 걸리지만, 오랜 세월을 묵묵히 견뎌 수십 개 수백 개의 나이테를 생성해 나갈 것이다.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고, 그 숲에 깃들 산짐승과 곤충들을 생각하면 행복하다. 내가 닦아 놓은 임도를 걸어갈 사람들의 발자국을 헤아리면 웃음이 난다. 누군가가 길을 걷다 구지뽕을 따 먹어도 좋고, 황칠나무의 이파리를 몇 개 뜯어가 차를 끓여도 좋을 것이다.
편백나무의 피톤치드를 흠뻑 들이마셔서 힐링이 되고 건강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언젠가는 이룰 숲 체험의 그 날을 위해 나는 오늘도 편백나무 간벌을 하러 산으로 간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0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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