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안 부리고, 남에게 해 안 끼치고, 순리를 쫓아 살아온 삶, 이만하면 마치맞다(맞춤이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1년 0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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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에서 오래오래 서로를 지켜준 사람, 더 없이 소중한 내 당신, 고맙소 늘 사랑하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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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날 ‘10대’ 조용한 소년 춘길이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 전도부락, 3남 2녀의 둘째인 춘길이는 순하고 조용한 소년이었다. 형제와 누이들 틈에 껴, 있는 듯 없는 듯 낮은 목소리로 발자국소리도 크지 않은 아이였다. “충기라~ 소 미로 가자!” “우리 아~~는 안즉 눈꼽도 안뗐다. 내 퍼뜩 깨우꺼마.” 부엌에서 청솔가지로 불을 피워 아침을 짓던 옴마는 눈이 매워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이던 춘길은 눈을 뜨는둥마는둥 아랫땀 상구와 옴마가 나눗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새벽 바람은 선들했고 이불속은 따뜻했으므로 나오기 싫어 기재개를 켰다. 동해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배웠다. 사실 배우고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보고 자랐으니 자연스레 몸에 익은게 낫질이고 괭이질이었다. 땀 흘려 풀을 베고 나면 동네 앞으로 나갔다. 바다가 거기 푸른 물결을 출렁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농사 지어 묵고는 살긋냐?” “하모, 우리는 고마 바다로 가자. 내는 기계 돌리는기 훨 재밌다.” “오데서 배울끼고? 우리 동네는 전~다(전부) 노젓는 목선 뿐인데.” “토영(통영의 옛말) 가모 발동선이 많다쿠데. 혼자가모 무서분께네 우리 둘이 가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둘은 의기투합하여 부모님께 고하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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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각 박춘길과 처녀 황정지, 혼인을 앞두고 약혼사진을 찍었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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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그 시절 ‘20대~30대’ 인기 기관장이 되다 “어이~~ 충기리, 우리 어장에서 배 쫌 몰믄 안 되긋나?” “저~~건너 어장서도 일 쫌 해 달라 쿠네예. 먼저 대답한데로 가야 안 되긋심미꺼.” 선하고 어질고 양심적인 청년은 인기가 많았다. 여기저기서 같이 일하자고 불렀다. 꼭 필요한 인재를 불러오려면 웃돈을 얹어주겠다는 협상은 당연지사, 그러함에도 청년은 의리를 지켰다. 약속을 중요하게 여겼다. 내 것을 하나 잃더라도 남의 것을 손해보이는 짓은 할 수가 없었다. 키는 점점 커지고 몸은 알맞게 불었고 인물은 훠~언해졌다. 골목을 걸어가면 낮은 토담 너머, 집집의 안마당이 다 보였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웃음으로 화답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봄볕처럼 따스하고, 여름 저녁의 바람처럼 선들하고, 가을날 우물가의 대봉감처럼 매끈하게 야문 청년을 탐내는 사람이 많았다. 배를 가진 선주들은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한 기관사로 탐을 냈고, 마을 처자들은 물론 이웃동네 처녀들도 그가 지나가면 까치발로 동동거렸다. 마을에 찾아오던 방물장수 아지매의 보따리 속에는 동동구리무와 입술연지와 분(粉)곽과 댕기가 늘었다. 처자들은 그의 등장만으로 온 몸과 마음이 분홍빛으로 설레었다. 마을에는, 조용하고 다소곳하고 말이 없는 황정지란 처녀가 있었다. 우물가나 골목에서 스쳐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덤덤하게 지나치는 그녀가 눈길을 끌었다. 상대가 무관심하니 오히려 청년의 가슴에 불길이 활활 일었다. “정지야, 오데 가노?” “물 길러예~” 물동이를 이고 가는 것을 봤지만 슬쩍 다가가 말을 붙였다. “정지가 정지(부엌)에 쓸 물을 길러 새미(샘)에 가네.” 정지의 볼은 막 터지는 진달래 망울처럼 봉긋했고, 살구꽃처럼 화사하게 붉어졌다. 어른들끼리 혼담이 오고갔고 날을 잡았다. 드디어 청년은 한 여자의 지아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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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에서 오래오래 서로를 지켜준 사람, 더 없이 소중한 내 당신, 고맙소 늘 사랑하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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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랑주의보 ‘40대’ 주는 것과 받는 것 세월이 흘렀다. 2남 1녀를 낳아 기르며 자식들 때문에 울고 자식들 덕분에 웃었다. 남의 배를 몰던 일을 그만두고 직접 배를 건조(建造)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가니, 바다 속 물고기를 모두 잡기라도 할 듯 뿌듯하고 행복했다. 기선권현망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박춘길어부’ 이름을 건 정치망 어장을 샀다. 너른 바다, 둑도 울타리도 없는 바다지만 자신의 영역이 생긴 것이다. 파도가 너울대고 태풍이 몰아치면 수십미터 아래로 가라앉거나 휩쓸려 가는 그물을 놓치지 않으려 용을 쓴 시절이었다. 자신의 어장 위를 유유히 지나 이웃 어장의 그물에 죄다 갇히던 전어의 비정함을 어찌 잊으랴. 그런 세월을 지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바다는 맘껏 가지라고 퍼주면서도 몫이나 소유에 인색하단 사실과, 바다에서 본인 것만을 주장하는 인간의 욕심이 어리석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정치망에는 멸치가 많이 잡혔다. 자건품(煮乾品)일 때 제일 값나가는 멸치는 잡히는 대로 삶아서 말려야 했지만, 자숙(煮熟)이 여의치 않은 멸치들은 생으로 내다 팔았다. 동네 아우가 모는 트럭에 싣고 직접 팔러 나서기도 했다. 30~40㎏ 광주리 가득 멸치를 채워 바다와 떨어진 대가, 상리, 영오, 영현면으로 달려갔다. 소금과 버물려 젓갈을 담아주기도 하고, 남은 광주리는 읍내 시장터에 쏟았다. 한 광주리에 5천원을 받았지만 생물 판매라는 건 앞으로는 벌고 뒤로 밑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도 배운 어장 일이었고, 바다로 나가 바람을 맞으면 맘이 편했다. 얼굴은 구릿빛으로 탔고 햇볕에 그을린 팔뚝은 거칠었지만 삶의 터전은 바다였다. 89년, 마을 이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마침 정치망 어장을 사겠다는 젊은 어부가 나타났다. 미련은 남았지만 이젠 뭍에 내려야할 때인가 싶어 어장터를 넘겼다. 이장(里長) 일을 하면서 소어업(小漁業)을 시작했다. 성긴 그물코를 깁고 납을 달아 자망그물을 뜨고, 뒷산에서 벤 대나무를 쪼개 둥글게 휘어 동테를 만들었다. 아내의 손을 맞잡고 저녁에 장어통발을 넣고, 자망그물을 뿌리고, 새벽에 걷어 올렸다. 소박하고 자잘한 일상 속에서 세 아이들은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었다. 새 집 바람이 불었다. 큰막개 살던 이성희씨가 집을 짓는다고 이참에 같이 짓자는 청이 들어왔다. 1층엔 작업장으로 기둥만 세우고 바닥 작업을 하는데 평당 50만원, 2층 살림집은 평당 200만원의 견적서를 받았다. 수십 년을 기와집 짓는 꿈을 꿨는데 드디어 새 집을 지을 기회가 온 모양이다. 통장을 살피니 단 돈 50만원이 들어있었다. 일부는 빚을 내고, 나머지는 천천히 갚는 조건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중년이 된 아내는 말없이 남편을 쳐다볼 뿐이었다. 선량하고 법 없이 살 사람이었지만 배포(排布)는 누구보다 큰 남편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말려도 들을 사람이 아니었고, 일을 저지르고 나면 스스로 해결 방법도 찾아내는 남편의 능력과 의지를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도로변에 근사한 2층집이 완성되었고 동네 사람들을 청해 이사 떡과 술을 거하게 차렸다. 집은 번듯했지만 통장에 빚은 수북했다. 인생에 공짜는 없는 법, 얻는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으니 남들 눈에 부러운 좋은 집을 얻었으면 남들 눈에 드러나지 않는 빚은 쌓이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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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나들이길, 훤칠하고 잘생긴 남정네와 수줍고 다소곳한 여인네는 환상의 짝꿍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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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다시 쓰니 옛 일이 새록새록, 흘러간 그 청춘을 어이 되찾으리만 사랑은 변함없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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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천명 ‘50대’ 하늘의 뜻, 바다의 뜻을 따라 어촌계장과 새마을지도자를 각각 8년간 맡았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갖가지 정보를 접했다. 동해면에 피조개 종패로 돈을 번 사람들이 여럿 나왔다. 어패류 사업은 계절적 요인과 운이 따르는 사업이다. 모패(母貝)의 난(卵)들이 물살에 떠밀려 다니다가 착지하는 지점이 있다. 그 지점이 어디냐에 따라서 흥망(興亡)이 결정되는, 사람의 힘과 기원이 닿지 않는 영역이 있었다. 누군가의 어장은 텅빈 그물이지만 그 옆의 어장은 풍년 드는 경우가 바다사업이었다. 평돌바위 앞 꼬막 살포장 6헥타가 매물로 나왔단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 6명이 공동 투자하여 어장을 나누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같이 도모했던 2명이 포기를 선언하여 본의 아니게 3인분을 떠맡게 되었다. 총 3천만원 중 부담해야 할 1천500만원은 전답을 담보로 수협에 또 빚을 냈다. 매년 나가는 이자만도 솔찮았으니 가슴이 답답했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 후회와 자책이 가슴을 쳤지만 사나이 체면에 주저앉을 수 없는 일, 속으로는 피울음이 솟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헛웃음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피조개 양식장에서 미더덕 양식장으로 면허가 변경되었다. 줄을 내리면 미더덕 난(卵)들이 해류를 타고 떠밀려와 어장에 꽃송이처럼 붙었다. 진동이나 고현의 큰 어장주들이 통째로 어장을 사 갔고, 큰 힘들이지 않고도 목돈이 생겼다. 그동안 바다를 바다보고 살아온 보람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남에게 해꼬지 안 하고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온 내 삶을, 하늘이 화답해 주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감사함을 가슴 깊이 쌓았다.
# 귀는 순해지고 ‘60대~70대’ 바다도 평온해지고 2007년 동해면이 조선특구로 지정되었다. 고개 너머 막개에 삼강M&T가 들어온다고 동네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어촌계도 조용히 움직였다. 공장이 들어오면 어장은 죽기 마련이니 제대로 된 보상을 받아야 하는데, 보상가 책정 방법을 놓고 갑론을박이 많았다. 다행히 나에게는 미더덕 어장을 통째로 팔 때 받았던 금액이 통장에 찍혀 있었고 그것이 협상에 유리한 증거가 되었다. 보상금을 받아 그동안 쌓인 빚을 홀가분하게 정리했다.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밥벌이 하는 것을 지켜보며 부부는 마주보고 웃었다. 이젠 몸도 편안해지고 시간도 넉넉해졌으니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지내면 될 터였다. 수협의 대의원과 이사8년, 감사 3년을 거치며 수협밥을 30여 년 먹고 산 셈이다. 마을의 또래들도 같이 늙어 노인회 총무를 11년 맡았다. 그동안 마을 살림을 알뜰살뜰 살아 공동 기금도 꽤 모였다. 매년 꽃 피는 봄과 단풍드는 가을이면 버스를 대절하여 나들이를 떠났다. 국내의 좋은 곳은 다 돌아봤고 외국여행도 몇 번이나 다녀왔다.
# 노을을 기다리며 ‘80대’ 하루하루를 사네 설을 앞두고 큰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5인 이상 집합 금지라카네. 늬들은 안 내려와도 된다. 공장은 잘 돌아가나? 종업원들 월급은 잘 주고 있제?” “아부지 고맙심미더. 직원들 잘 먹여 살리는 착한 사장으로 살고 있슴미더.” “공장 부지만 몇 천 평이라 캤는데 세금은 마이 안 나오나?” “세금 마이 내는 기 좋심미더. 돈 벌모 세금 마이 내라꼬 아부지가 말씀 하셨지예.” 고성 사는 작은 아들에게도 전화를 냈다. “작은 아가, 이번 설은 니캉내캉 둘이서 뫼시자. 너거 형은 안 내려와도 되제?” “하모예, 형이 보고집지만 좋은 날 오모 그 때 봐야지예. 명절 장은 제가 봐 가께예” “그래, 살림 따뜻한 니가 골고루 장 좀 봐 온나. 음식은 옴마가 다 만들끼라.” 다정하고 싹싹한 고명딸도 안부를 물어온다. “아부지, 설에 몬 가도 다른 날 뵈러 갈께예. 좋은 봄 옷 한 벌 사 드릴게예.” “고맙다. 빛깔 곱고 멋진 것으로 골라온다. 기대하고 있으마.”
노을을 맞아 더욱 화사한 삶이다. 욕심 안 부리고, 남에게 나쁜 말 안 듣고, 순리를 쫒아 살아온 삶, 이만하면 마치맞다. 후회도 아쉬움도 없다. 더 이상 바랄 거 없이 장엄하고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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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1년 0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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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7 14:09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