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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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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한양 살던 정윤명이라는 양반이 벼슬에 회의를 느끼고 낙향했다. 은거하며 책을 볼 요량이었다. 이곳저곳 다녀보니 딱 한 군데가 마음이 쏙 들어왔. 소나무가 그득 우거진 작은 마을이었다. 소나무 군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집을 짓고 정각을 세웠다. 명송정, 현재 마암면 도전리 명송(明松)마을은 이렇게 들어섰다.명송이라는 이름처럼 명송마을은 등성이마다 사철 푸른 소나무들이 솔향을 머금고 있다. 소박하지만 우직한 것이 동네 사람들의 성정과 닮았다 싶다.언뜻 보기에 명송마을은 여느 시골마을과 별다를 것 없는 ‘촌’이다. 동네사람들이라 해봐야 40명 남짓한 작은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는 주거지보다 너른 들이 펼쳐져 있다. 땅을 일구며 정직한 땀방울로 살아가는 곳이다.명송마을은 예인의 마을이다. 몇 가구 되지도 않는 이 촌동네에서 네 명의 춤꾼과 악사가 났다.
두 명의 예능보유자와 두 명의 전수교육 보조자가 명송마을 출신이다. 하늘에서 어울렁더울렁 춤을 추고 있을 고 허판세·정대식·허종원 선생과 지금 고성오광대보존회를 이끌며 덧배기춤 제일 명무로 꼽히는 이윤석 회장이 바로 그 예인들이다. 그들은 고성이라 하면 제일 먼저 꼽히는 자랑거리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를 지금껏 이어온 장본인들이다.일제는 조선의 문화를 말살해 정신마저 일제에 가두려했다. 암울한 시기를 지나 해방을 맞았지만 전통연희의 원래 모습을 되살려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사라진 전통연희는 수도 없이 많았다.그러나 고성이 어떤 고장인가. 인물의 고장이요, 춤의 고을이다. 고성은 달랐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입에서 입으로, 춤에서 춤으로, 원형이 온전히 전해진 몇 안 되는 고장이다. 해방 직후부터 고성오광대 모임을 규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발빠르게 일었다.
한 세대가 지났다. 농사일에 지칠 때쯤 춤에 가락을 얹고 흥을 실어 놀았던 명송마을에서는 허판세·정대식·허종원 세 명의 연희꾼이 탈놀이를 이어왔다. 그들이 한바탕 논다는 소리가 들려오면 꼭 그 자리에 끼던 꼬마가 있다. 훌쩍 자라 군대에 다녀온 후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어느새 천하제일 명무로 꼽히게 된 이윤석 회장이다.춤꾼으로 악사로 먹고 사는 것은 어려웠던 시절이다. 그래서 명송마을 네 명의 예인은 평생을 농사꾼이기도 했다. 땅을 일구며 허리 펼 틈조차 없다가도 탈을 쓰고 악기를 들면 신명이 넘쳐났다. 암울한 시대를 지나 먹고 살기 힘든 시기에도 전통을 이으며 고성오광대 계승의 기틀을 마련한 분들이 고 허판세·정대식·허종원 선생이라면, 이윤석 회장은 고성오광대를 대한민국 대표문화재로 키워낸 이다.여담이지만, 이윤석 회장은 명송마을 이장이기도 하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이장으로 마을일에도 앞장서고, 농사도 짓고, 군내 이런저런 단체에서 큰어른 노릇을 하고, 농촌의 유무형 자산들을 지키면서 오광대 일까지 해야 하니 고성에서 제일 바쁘다.명송마을 이야기를 풀다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마을 산등성이마다 아릿한 선을 그리고 있는 소나무들의 우직함이 마을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싶다. 제멋대로 휘어진 듯 하지만 큰 바람에도 휘둘리지 않고, 기개 그득한 사철 푸른 소나무가 지키는 마을. 명송마을은 소나무와 같은 사람들의 마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