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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해상왕국 내산리를 찾아가다

안내판 하나 없는 내산리고분군 행정의 무심함 아쉬워
가야시대 문물의 집결지이자 배출구였던 내산리
고성박물관 11월까지 내산리유물특별전 열어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17년 09월 11일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내산리고분군은 ‘목적지가 가까이 있다’는 안내와 더불어 도로 중간에서 멈추었다. 차에서 내려 길을 찾아보지만 참 난감하다. 고분을 찾아갈 수 있는 안내판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헤매던 중에 마침 지나가는 경찰차의 도움을 받아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내산리고분군은 적포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앞이 확 트인 야트막한 언덕에 얼핏 보기에도 수십 구가 넘는 크고 작은 무덤이 보였다. 큰 무덤은 일반 무덤보다 대여섯 배, 작은 무덤도 두어 배로 크니 예사로운 곳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고분들은 비교적 봉분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었는데 천오백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무덤의 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봉분들은 벌초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다만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봉분 위에 하나씩 꽂아놓은 쇠꼬챙이였다. 고분임을 표시한 것이었는데, 무덤 위에는 아무 것도 올리지 않는다는 옛말을 생각할 때 상식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차라리 봉분 앞에 작은 돌이라도 놓아 표시를 해주었으면 좋을 뻔했다. 
그리고 가야사 연구에 있어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내산리고분군의 비중을 생각할 때 제대로 된 안내판 하나 세우지 않고 있는 행정의 무심함이 아쉬웠다.
ⓒ (주)고성신문사
ⓒ (주)고성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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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산리고분군의 의의
내산리고분군은 고성읍에서 북동쪽으로 15㎞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동해중학교를 지나자마자 만나는 삼거리 바로 옆에 있는 언덕에 중·소형 봉분이 무리를 지어 있다. 대형 분묘가 없다고 하지만 도로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어 안내판 하나만 있어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내산리의 작은 언덕이 가야의 고분이 모인 곳으로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이다. 학자들에 의해 존재가 확인되었지만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가 1963년에 가서야 비로소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일부 구간만 사적지로 지정되고 나머지를 사유지로 남기는 바람에 도굴과 개인 묘지 조성으로 원형과 유물을 제대로 보존할 기회를 놓쳤다. 
그런 이유로 처음 고분의 존재를 조사할 때 확인되었던 100여기의 고분이 지금은 절반이 조금 넘는 65기만 남아 있다. 뒤늦게 내산리고분군의 중요성을 깨달은 문화재청은 1997년부터 7차에 걸쳐 65기의 고분 중에 12기의 무덤을 발굴 조사하여 다수의 토기와 철기, 그리고 장신구 등 귀중한 유물들을 발굴해 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분묘에 도굴의 흔적이 있어 사라진 유물이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남아 있는 고분에서 유물의 일부라도 수거할 수 있었음은 다행이라고 하겠다.고성에서 확인되는 삼국시대의 고분은 소가야의 대표적 고분으로 널리 알려진 송학동고분군과 함께 기월리고분군과 율대리고분군, 동해면의 내산리고분군, 영오면의 연당리고분군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송학동고분군과 내산리고분군이 가야사의 복원에 있어 가지는 의미가 특히 크다. 두 고분군은 고성을 대표하는 고분이지만 많은 점이 다르다. 송학동고분군이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가야 귀족 세력의 무덤이라면 내산리고분군은 이웃나라와의 교역을 통한 경제력을 가진 지배자들의 무덤이기 때문이다. 
송학동고분이 7기밖에 되지 않는데 비해 내산리고분은 100기가 넘었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한 일이다. 물론 성내의 중앙 세력집단에서는 왕을 비롯한 귀족의 숫자가 많지 않아 대형 분묘가 적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되짚어보면 내산리에는 대형 분묘를 만들 만큼 재력을 가진 권력자가 그만큼 많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또한 내산리고분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부장 양식으로 하나의 석곽에 개배나 고배를 일률적으로 4조씩 묻거나, 모양과 상태를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배의 다리를 절단한 독특한 장례풍습은 가야 중심 세력이었던 귀족 세력과 다른 면모를 보여 연구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 박제된 박물관에서 내산리 사람들을 만나다
내산리고분을 돌아본 후에 고성박물관을 찾았다. 고성박물관에서는 내산리고분에서 나온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고분 발굴 2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로 그동안 출토된 유물을 한 자리에 모아 유적의 성격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갖고자 함이 목적이다. 그러나 주최 측의 의도가 주민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의심스럽다. 
얼마 전 언론에서는 유적과 관련된 관계자들과 정치가들이 모여 전시회를 축하하는 행사를 가지며 주민들에게 관심과 함께 관람을 부탁하는 기사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게 한계이다. 사실 그 자리에 참가한 분들이 유물들을 얼마나 관심 있게 보고 갔는지 모르겠다. 그 유물들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그리고 주민들에게 행사를 제대로 홍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실망스러웠다. 유물을 돌아보는 한 시간 가량 동안 전시장을 찾는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알려면 박물관을 찾아보라고 했던가? 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살아갈 사람들인지 알려면 박물관을 찾으라고 했다. 
박물관은 역사의 흔적을 담아 놓은 보물 창고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박물관은 죽어 있다. 역사가 박제되어 유리관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 교육의 부재에서 나온 결과이다. 역사를 모르기에 유물이 가지는 가치를 모른다. 그래서 박물관에 가면 수천 년 역사를 단 5분 만에 보고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내산리 유물 특별전도 그랬다. 우선 말로만 듣던 유물들을 직접 볼 수 있음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보물들을 혼자만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평소에도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에 특별전이라고 문전성시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민들의 무관심이 아쉬웠다.또 하나는 옛사람들과 소통에 사용되는 언어의 어려움이다. 박물관에서 보는 용어들은 대부분이 학술적인 용어여서 전문가가 아니고는 이해가 어렵다. ‘개배’, ‘고배’, ‘광구호’, ‘철도자’, ‘철부’ 등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려운 외계어들이다. 다행스럽게도 내산리고분군 전시회에서는 이런 시도가 보였다. ‘굽다리 접시’, ‘뚜껑 접시’, ‘넓은입 항아리’, ‘쇠손칼’, ‘쇠도끼’ 등 우리말로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해 두었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박물관에서는 관람객들에게 친절하지 못하다.
역사 교육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며 유물들을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그릇 하나 쇳조각 하나가 가지는 의미를 찾아보고, 옥구슬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보며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상상해 보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고성땅을 밟고 사는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행여나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유언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볼 기회가 되었다.

# 미완성이 된 해상왕국의 꿈
소가야는 지리적으로 서쪽은 백제와 중국, 남쪽은 왜, 동북쪽은 신라와 연결되는 위치에 있어 이들 나라와 교역을 중계하고, 남해안과 남강을 연결한 ‘소가야 루트’를 통해 가야 내륙과의 교역을 담당한 세력이다. 그렇게 볼 때 내산리는 가야의 종주국이었던 금관가야와 뱃길로 가까워 해상주도권을 두고 다투며 해상교역의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 증거는 고분에서 나온 부장품들이다. 대가야를 비롯하여 신라, 백제, 중국, 왜 등 다양한 지역의 유물들이 한 자리에서 섞여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국제적인 항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산리는 가야시대 문물의 집결지이자 배출구였다. 그들은 그 곳에서 고성의 미래를 보았다. 바다를 이용하여 가야를 이끄는 패권 국가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들의 원대한 꿈은 불행하게도 소가야의 멸망과 함께 꺾여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잊힌 사람들이고 잊힌 역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최근 정부에서는 잊힌 왕국 가야사를 다시 조명하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소가야의 역사도 다시 쓰게 될 것이다. 가야의 역사에서 내산리고분은 잃어버린 가야사의 연결고리이다. 한때 강력한 국가 건설이라는 큰 꿈을 가지고 바다로 나가던 사람들, 죽어서도 바다와 가장 가까운 언덕에 묻혀 해상왕국의 꿈을 버리지 않던 사람들이 살았던 내산리는 미완의 꿈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는 곳이다. 잊힌 해상왕국 가야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성의 꿈이 서려있는 곳이다.
지금의 고성은 지리적으로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일본과 중국, 그리고 바다와 내륙뿐만 아니라 영남과 호남을 잇는 중계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지점이다. 바다와 육지 교통이 모두 가능하여 물류의 이동에 최적지이다. 적포만을 바라보며 이 땅의 중심이 되겠다는 꿈을 키우던 고성의 조상님들, 그들이 꿈꾼 미완의 왕국을 우리들이 완성시킬 수는 없을까?특별전은 가야의 옛 모습과 해상 왕국을 꿈꾸던 내산리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나 그것은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찾지 않고 보지 않는 사람들의 눈과 귀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가야의 역사를 되돌아봄에 박물관에 준비된 리플렛이나 유물에 적힌 해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리플렛의 설명을 꼼꼼하게 읽어보면서 유물을 보면 가야시대에 이 땅에 살았던 조상님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성 사람이라면 조상님을 찾아뵙고 그분들이 남긴 유언을 되새겨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유물들은 11월까지 전시된다고 하니 많은 주민들이 관람을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가족들과 내산리고분을 직접 찾아가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17년 0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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