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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을 이어온 정신, 고성의 호국불교 6.] 고성의 5대 천년고찰이 품은 호국불교의 가치

옥천사 승려 신화수와 한봉진 독립지사들에게 숙식제공
신화수 혁신단, 육혈포암살단에서 김상옥과 함께 활약
경성부 당주동에서 체포, 40년대 이후 행적 불분명
불교, 종교 떠나 호국의 의미 다시 생각해볼 때

황수경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6월 12일
▣ 글 싣는 순서
① 옥처럼 귀한 샘물과 정신이 솟는 절집, 옥천사
② 호국정신이 구름처럼 일어나는 절집, 운흥사
③ 바다를 품고 화랑의 기상을 담은 절집, 문수암
④ 호국의 의로움이 곳곳에 숨어있는 절집, 장의사
⑤ 조선 건국의 꿈이 영글던 절집, 계승사
⑥ 천년고찰이 품은 호국불교의 가치

↑↑ 신화수가 체포될 당시 주소인 경성부 당주동 16의 현재모습(사진 가운데 검은색 문이 있는 건물, 왼쪽은 세종문화회관)
ⓒ 고성신문
↑↑ 신화수의 1921년 판결문
ⓒ 고성신문
↑↑ 옥천사 승려 출신으로, 김상옥과 함께 혁신단, 육혈포암살단 등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했던 신화수
ⓒ 고성신문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등 나라에 고난이 생길 때면 가장 먼저, 가장 강하게 일어선 것은 불교다.
1923년 10월, 경성에서 신화수가 체포됐다.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 혐의였다. 그의 죄목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의열단의 폭탄 은닉을 응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고, 독립선전문 배포 등 치안을 방해하는 데 방조했다’는 내용이었다.
신화수와 한봉진은 지금껏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승려라는 신분 탓에 속세와 교류가 많지 않았던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신화수는 그나마 활약상이 조금은 전한다. 그러나 한봉진은 1921년 “마능숙에게 종전과 같이 윤영백과 함께 조선독립의 군자금 모집에 진력하자고 권유하며 모집에 종사하지 않으면 너를 죽일 것이라고 협박하였다”는 판결문 외에는 공식적인 기록이 거의 없안타깝다.

# 고향친구의 밀고로 수포가 된 2차 독립만세운동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화수는 연화산의 절집, 옥천사에서 수행하며 부처님 말씀을 배우는 승려였다. 절집에도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물결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연꽃잎이 연밥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의 산중의 절집은 몸을 숨기기 쉬운 곳이었다.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고 은밀히 움직여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옥천사를 은거지로 삼았다. 고성에서 처음 시도했던 철성면 쌀시장터 대한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이주현이나 비밀결사조직인 대동청년단을 만들어 부산과 경남에서 일제에 항거했던 변상태는 옥천사를 은거지로 삼은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옥천사 승려였던 신화수와 한봉진은 숨어다녀야 한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과 함께 비밀스럽게 거사를 논의할 울타리가 돼줬다. 독립운동가들을 불령선인이라며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던 일본경찰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혹독한 고초를 당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아무리 승려라도 조선의 백성이 아닌가. 신화수·한봉진 두 승려는 독립지사들을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욱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은 이미 많았다.
신화수는 “우리 손으로 독립을 이루겠다”는 각오가 섰다. 그 길로 승복을 벗고 농사꾼인 척 했다. 고향인 영오면의 서정윤과 함께 2차 독립만세운동계획을 세웠다.
고향 친구인 이경렬이 일본 헌병의 앞잡이였다. 이경렬의 밀고로 신화수의 계획을 알게 된 일본헌병은 옥천사에 들이닥쳤다. 이렇게 신화수의 첫 번째 독립운동이자 2차 독립만세운동은 만세를 외쳐보지도 못하고 끝났다. 1921년 신화수는 “변상태, 이주현, 곽인협, 이조협, 선우협 등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소식을 전하는 밀사도 자임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 혁신단과 육혈포 암살단, 신화수의 활약
신화수의 독립운동은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 4월 김상옥은 혁신단(革新團)을 결성했다. 동대문교회의 영국인 전도사 피어슨의 집에서 중앙학교 윤익중, 박노영(박민오), 불교졸업반 신화수, 보성중 3학년 정설교, 휘문중 이춘식 그리고 서대군, 김우진, 김화룡, 심주택 등은 뜻을 같이 하기로 했다. 같은 달 백초월 스님이 경성에 왔다.
백초월 스님은 중앙학림에 한국민단본부(전국불교도독립운동본부)를 설치했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에 보낼 독립군자금을 모집하고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했다. 당시 백초월 스님은 백최승이라는 이름을 썼다.
혁신단은 임시정부후원회 취지서와 함께 항일전단을 만들어 배포했다. 자금난을 겪으면서 혁신공보 발행이 난관에 부딪히자 혁신단은 방향을 틀었다. 1년 후 겨울, 두만강이 얼면 대규모 도강작전이 진행될 터였다. 국경을 점령하고 일본군대를 무찌르는 것은 물론 동해 연안의 선박을 파괴해 조선인은 일본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분명히 알리겠다는 계획이었다. 두만강 도강 작전이 시작되면 조선에서도 일본의 관공서를 파괴하고 관리들을 암살하는 등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혁신단은 총독과 고관, 친일파까지 모조리 처단하기로 뜻을 모았다. ‘육혈포 암살단’이었다.
김상옥이 암살단의 실행 책임자를 맡고, 김동순이 무기 공급, 윤익중이 자금 모금 및 집행, 신화수가 비밀문서 취급을 맡았다. 서울본부는 김상옥의 대장간이었다. 창고의 바닥을 파고 지하실을 만들어 폭탄제조용 화약과 쇠붙이, 비밀문서궤를 넣고 그 위에 농기구를 쌓아 위장했다.1920년 8월, 미국 국회의원들이 제암리 학살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선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거사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육혈포암살단은 암살취지서, 일본고관 경고문, 조선 관리 사퇴 권고문 등을 작성해 인쇄했다. 암살 명부도 만들었다. 미국 의원방문단이 경성에 도착하면 열릴 환영식이 거사 장소였다. 환영식에 참석한 사이토 마고토 조선총독을 포함한 일본 고관들이 암살대상이었다.
김상옥은 이미 요시찰인이었다. 미국의원단이 도착하기로 돼있던 날 김상옥의 집으로 동대문경찰서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김상옥은 도망쳤다. 형사들은 집안 이곳저곳을 뒤지던 중 비밀의 벽을 발견하고 말했다. 암살계획이 모두 들통나버린 것이다. 다음날 경성역에서 열랄 예정이던 환영행사는 모두 취소됐다.
일본경찰은 혐의자 검거에 나섰다. 24명의 암살단원 중 신화수와 김동순과 윤익중 등 18명이 체포됐다. 김상옥은 경성에서 3개월을 숨어지내며 동지들이 수감된 유치장을 부수고 구출하는 방법을 구상했다. 하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10월 상해로 망명했다.
1923년 김상옥은 조용히 경성으로 들어왔다. 김상옥의 최종목표는 일본총독 암살이었다. 이미 흩어졌던 혁신단원들을 다시 모으시 시작했다. 신화수를 포함한 핵심단원들이 모였다. 거사일은 1월 17일이었다.
김상옥은 그 전에 수많은 독립지사들을 체포하고 모진 고문을 했던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기로 마음먹었다.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 10분. 김상옥은 윤익중과 함께 종로경찰서 근처를 걷던 중이었다. 김상옥은 윤익중에게 천천히 먼저 가라 했다. 갑자기 종로경찰서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김상옥은 달포가 넘게 여동생 김아기의 집에 숨어지냈다. 엿새 후, 김아기의 집에 일본형사 15명이 들이닥쳤다. 김상옥은 형사를 총으로 쏴 죽인 후 도주했고 미아리 이모집을 거쳐 효제동에 살던 동지 이혜수의 집에 숨었다. 일본형사들은 이혜수의 집에 숨은 김상옥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김상옥은 총격전을 벌였고, 3시간의 교전 끝에 최후를 맞았다.

# 신화수, 당주동 16번지에서 체포되다
종로경찰서 폭파사건 2개월 후인 1923년 3월, 신화수는 김상옥에게 군자금 1천 원을 제공한 혐의로 체포됐다. 일본경찰은 모질게 고문했다. 신화수의 죄목은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예비,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문서, 자금영수증, 인장에 사용할 비용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5개월 후 신화수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같은 해 10월 10일, 신화수 스님은 경성복심법원에서 강도 혐의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신화수는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의열단의 폭탄 은닉을 응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고, 독립선전문 배포 등 치안을 방해하는 데 방조했다’는 내용의 공소 기각을 받고 풀려난다.
신화수는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공훈도 받지 못했으며 승려였기 때문에 그를 기억할 자식들도 없다. 얼마 남지 않은 기록이지만 그의 흔적을 따라가봐야 했다.
신화수가 체포됐을 당시 주소는 지금 세종문화회관 뒤쪽이다. 광화문역 8번출구로 나오면 바로 보이는 건물. 희한하게도 일본식 샤브샤브 음식점이다. 주변은 당연히 식당가, 카페들로 가득하다. 그때 체포된 독립지사가 신화수 한 명은 아니겠지만, 고성의 승려가 경성의 중심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체포되기까지 남은 기록이나 자료가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해방 전까지 신화수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일부에서는 의열단원으로 독립운동을 계속 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1946년 3월 광복단 중앙 기구가 개편되고 한성지부가 결성됐다. 신화수는 이때 비서과장부에 임명됐다. 두 달 후 신화수는 사회민주당결성준비위원으로 활동한다.
같은 해 8월 3일에는 종로청년회관에서 사회민주당 결당식이 열렸다. 이어 11일 총무와 중앙집행위원이 발표됐다. 총무회는 최진, 허규, 여운홍(대표)이었고, 당무국장은 신화수였다.
신화수의 마지막 행적은 1947년 1월이다. 사회민주당 중앙집행위원회 부서 개선 당시 훈교국장에 임명된 것을 끝으로 공식적인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불교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다. 불교는 사상이고 문화이기도 하며 한반도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승병, 독립운동가들의 기지이기도 했다.
고성은 1천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고찰이 5개나 있는 흔치 않은 지역이다. 고성의 5대 사찰은 호국도량으로 역할을 해왔다. 또한 하나 같이 호국도량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훈련장으로, 작전을 위한 거점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은거지이자 독립자금 마련과 지원을 위한 역할로 이 나라를 지켜왔다. 종교를 떠나 ‘호국’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되짚어봐야 한다. 


“호국불교는 대승불교의 구현, 백성을 구하는 것이 불교”

ⓒ 고성신문




인터뷰
김광식 동국대학교 만해연구소 연구교수





계율적용 대승적 방편적 해석해야
불교에서 마음 부처 중생은 같은 것
호국은 호법 호민, 호국불교는 민족불교

호국불교는 대승불교의 구현이라고 본다. 대승불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그 이념이다. 그런데 비상시국,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에는 중생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것이다. 대의, 정의, 많은 생명을 위해서는 계율 적용을 대승적으로 방편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중생이 사는 국토, 국토에 사는 백성들의 생명이 위험할 시에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다. 터전과 백성이 없는 곳에 불교가 무슨 필요가 있나. 중생이 있으니 불교, 부처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심(心)불(佛)급(及) 중생(衆生)이라고 했다. 마음, 부처, 중생이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호국은 호법(護法)이고, 호민(護民)이다. 그리고 호국불교는 민족불교이어야 하고, 대중불교이어야 한다.

#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등 암울한 시기 불교는 어떤 역할을 했나?
임진왜란 당시 스님들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한 의병에 나섰다. 부처님 말씀이 담긴 경전을 잠시 놓고, 칼을 들고 일본군대와 적극 항쟁했다. 살생을 피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계율이었지만 보다 큰 정의를 위해 중생 구제를 위해 정의 칼을 들었던 것이다. 당시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 대사와 같은 고승들은 승장으로 왜구를 격퇴하는 최일선에서 다수의 승려들과 헌신했다. 그때 이순신의 부대에 승군이 있었다. 이순신이 사찰에 의용승군을 요청하자 400여 명의 스님들이 동참했다. 영호남의 각 지역에 온 스님들이다. 이 승군은 독자적으로 조직되어, 승장이 진두지휘했다. 영화 명량에 거북선에서 노를 젓는 장면이 나오지 않나? 이때 승군의 거점 사찰이 여수 흥국사다. 임란이 끝나자 정부에서 승군의 노고를 인정하고, 승려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그래서 서울의 북한산성 중흥사, 남한산성의 개운사는 전국 승군을 통제하는 곳이 됐다. 그리고 임란 이후 여수 흥국사와 고성 옥천사에 왜군의 침입을 대비하는 승군 300명을 주둔시켰다. 흥국사에 대한 의용승군은 널리 알려졌으나, 옥천사 사례는 관련 자료가 조사 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 일제강점기 불교계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면?
일본에게 국권이 넘어가던 무렵 지식인들은 스님들에게 임란 당시 승병의 정신을 계승, 구현해야 한다고 불교계에 주문했다. 그리고 항일 승군의 정신은 스님들도 인식했다.
만해 한용운은 3.1운동 하루 전날 밤 10시, 동국대 학인스님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3월 1일,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고, 각처의 사찰로 가서 만세운동을 파급시킬 것을 주문했다. 이때 만해스님은 서산대사, 사명대사의 법손(法孫)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일제하 시절, 해인사 및 통도사 강원의 강사 스님들은 학인들에게 사명대사의 정신, 일화, 일본에 가서 동포들을 구해 온 것 등등을 가르쳤다. 그러자 해인사에 있는 사명대사 비석을 친일파 스님과 일본 경찰이 공모해서 그 비석을 1943년에 깨뜨렸다. 4등분해, 해인사 주재소의 발판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그 강의를 한 이고경 스님을 합천경찰서로 끌고 가서 고문을 하여 죽게 했다. 그때 경찰서에 끌려간 스님이 수십 명이었다.
고경 스님은 최근에 독립운동가 포상을 받았다. 1947년 그 옆에 새롭게 사명대사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그때 파괴된 비석은 해방된 이후(1958년), 다시 조립되어 해인사 홍제암에 세웠다. 지금도 있다. 이것이 역사의 현장이다.

# 독립운동에 관여했던 승려들의 이야기를 소개해달라
1919년 11월, 상해에 제작되어 배포된 승려 선언서(대한승려연합회)에도 임진왜란 당시 국난에 처하여 희생을 한 스님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일제하 스님들은 임시정부, 만주 독립군에 많은 군자금을 보냈다. 임정, 독립군과 연결된 스님들이 각 사찰을 돌면서 자금을 모금했고, 그 과정에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 스님도 있다.
옥천사의 본사인 통도사의 구하스님은 그 대표적인 스님이다. 해방 후, 구하스님이 독립운동 단체에 보낸 근거 영수증이 남아 있다. (구하스님은 안창호에게 독립자금을 보냈다.)
통도사, 표충사를 비롯해 옥천사까지 불교가 3.1운동에 나선 것은 우연히 아니다. 표충사도 사명대사 유적이 있었고, 이를 그 당시 스님들이 인식했다. 요컨대 우리 스님들은 임란의 승군 역사를 기억, 전승하고 있다. 이런 바탕, 계승, 인식에서 일제하 불교의 스님들이 독립운동에 나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1960년대 이후, ‘사명대사’라는 소설을 읽고 출가한 스님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 호국불교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짚어본다면?
호국불교는 대승불교의 구현이라고 본다. 대승불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그 이념이다. 그런데 비상시국,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에는 중생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것이다. 대의, 정의, 많은 생명을 위해서는 계율 적용을 대승적으로 방편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중생이 사는 국토, 국토에 사는 백성들의 생명이 위험할 시에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다. 터전과 백성이 없는 곳에 불교가 무슨 필요가 있나. 중생이 있으니 불교, 부처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심(心)불(佛)급(及) 중생(衆生)이라고 했다. 마음, 부처, 중생이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호국은 호법(護法)이고, 호민(護民)입니다. 그리고 호국불교는 민족불교이어야 하고, 대중불교이어야 합니다.
비상시국, 전쟁이 종료된 이후에는 정상적인 수행, 종교, 계율 해석이 있어야 한다. 특정 권력, 독재자를 위한 불교는 결코 안 된다.

“본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황수경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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