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2025-07-03 13:56:08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뉴스 > 연재기획

유학(儒學)이 체질에 맞는, 고성향교 전교 김문수 님을 뵙고

동해면 검포마을 김문수(1942년 2월 壬午生 79세) 고성향교 전교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5월 29일
↑↑ 소년같이 선량한 웃음의 김문수 님과, 평생을 그림자로 내조하신 천상 여자 천행자님의 다정한 모습
ⓒ 고성신문
뵙고 싶다고 전화를 드렸더니 근사한 베이스 음성이 울러 퍼졌다. 여유와 배려가 몸에 밴 듯한 목소리는 오십대 언저리, 이제 막 장년기에 들어선 느낌이 묻어났다.

김문수 전교= “집이 누추해서 앉을 데 설 데가 없는데 인터뷰가 가당키나 할지 모르겠소.”
남외경 작가= “그런 곳이 제 체질입니다. 두어 시간 할애 해 주시면 찾아 뵙겠습니다.”

전화에 대고 머리를 조아리며 약속을 정했다. 이미 전회前回의 신문기사를 읽으셨으니 인터뷰어(interviewer)로서 다른 말을 보탤 필요가 없었지만, 특별히 기사화할 내용이 없을지도 모르니 헛걸음 할까봐 염려된다는 인터뷰이(interviewee)의 겸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윤사월에 조상님 묘소墓所를 손봐야겠기에 산소에 올랐다가 방금 내려오셨다며 환히 웃으시는 치아齒牙가 얼마나 희고 고운지 눈이 부셨다.

남외경 작가= “조상님을 잘 모시면 후손에게 덕과 복이 오는 게지요?”
김문수 전교= “뭔가를 바라는 맘으로 어찌 조상을 모신단 말이요. 후손의 당연한 책무고, 나는 이제 농사 조금 짓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일이 없으니 자주 왔다갔다 하는 게요.”

남외경 작가= “묘소에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니구요?”
김문수 전교= “있소. 내가 숙모님께는 갚음하지 못할 큰 빚을 졌소. 오늘도 숙모님 산소를 둘러보고 왔소. 숙부님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부인과 사별하시고 세 번째 숙모님을 맞으셨는데 후사가 없어 다시 윤씨 부인을 맞으셨소. 그 부인께 아들 둘을 얻으셨고, 숙모님이 온 가족을 건사하시느라 봇짐장사도 하고 농사일도 하며 힘들게 사셨소. 숙부님 돌아가신 뒤 윤씨한테 얻은 자식들이 불효막심한 짓을 했던게요. 얼마나 맘고생이 많으셨는지 어느 날, 면서기 일을 하던 나를 찾아와 의논을 하시었소.”

남외경 작가= “두 아드님은 숙모님의 소생도 아니었다면서요?”
김문수 전교= “숙모님 말씀이 ‘내가 자식 못 낳은 죄가 깊어 삼종지도를 좇아 아들을 따르려고 애를 썼네만, 도저히 견딜 도리가 없으니 친정으로 돌아갈까 싶어 조카님께 의논 드리오.’ 이러시는 거요.”

남외경 작가= “숙모님이 여지껏 식구들 돌보셨고, 본인의 소생도 아닌데 불효했으면 어찌 견디실까요?”
김문수 전교= “친정으로 가시겠다는 발걸음을 붙잡지는 않겠지만, 사립문 나가는 순간 저희 집안과는 남남이 될 것이니 각오가 되시면 결정하시라, 이렇게 답을 드렸더니 숙모님이 그 뒤로는 아무 말씀없이 자식들을 끝까지 거두며 살피시다 우리 가문의 울타리 안에서 돌아가신 거요.”

남외경 작가= “책임감과 부담감이 많으셨겠어요?
김문수 전교= “예전, 충주호에 갔을 때 해설사가 그럽디다. 두향(이황 선생의 애첩)의 묘에 풀이 안 돋던 때가 있었는데 그 이유가 묘 주인의 한이 많아서 그랬다는 거요. 들은 얘기도 있어 내 숙모님의 묘소를 살폈더니 봉분이 없고 평장이 되어 있는 거였소. 내 숙모님도 한이 많아서인가 싶어서 봉분도 새로 단장하고 잔디도 다시 심고, 가뭄이 계속되면 물을 싣고 가서 뿌리며 관리를 했소. 직접 ‘진양정씨 아무개 묘’라고 묘표도 새기고 비석 뒤에 남편과 자식들 이름까지 다 올려서 지금까지 잘 돌봐드리고 있소.”

남외경 작가= “감사와 존경과 죄송함을 모두 담아서요?”
김문수 전교= “그렇소. 숙모님이 살아오신 세월을 짚어보면 맘이 아프오. 그 때 친정으로 가셔도 된다는 한 마디만 했으면 그 분의 삶이 어찌 변했을지, 더 행복하셨을지, 더 좋으셨을지 모르잖소.”

↑↑ 고성 향교의 유림들과 함께 ‘전교’ 김문수 님. 오른쪽 두 번째
ⓒ 고성신문
↑↑ 성현의 제향을 받드는 예례 중의 모습
ⓒ 고성신문
어렸을 때 백부님께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배우셨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이웃한 돈막부락의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셨단다. 주경야독의 세월을 보내며 몇 군데 정치망과 기선권현망의 어선에도 올랐고 앞날에 대한 고민도 깊으셨단다. 낚시질을 좋아하는 취향을 간파하신 부친께서는 ‘생선은 돈 주고 사 먹어야지 낚시로 먹으면 안 된다. 낚시하는데 심취하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는 말씀으로 공부하라고 다잡으셨단다.

김문수 전교= “내 나이 17세 되던 해 어느 날, 새벽에 깨웁디다. 전날 귀띔은 있었지만 어리둥절한 상태로 씻고 부친과 중부님과 같이 장좌리까지 걸어갔지요. 신부집 마당에는 혼례상이 차려져 있었고 나는 사모관대 쓰고, 처음 보는 신부는 족두리 쓰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었습디다.”

남외경 작가= “얼굴도 한번 안 보고, 무조건 부모님 말씀 쫓아 혼인을 하게 되었다구요? 그게 가능한 일인지 요즈음의 시각으로 말씀 좀 해 주세요.”
김문수 전교= “서로 첫 만남으로 혼인했어도 아들 셋에 딸 하나 낳고 잘 살고 있잖소. 서로 존중하며 사이좋게 지낸다오. 사실은 내 형들 여럿을 잃은 부친이 마흔다섯에 나를 얻은 거요. 네 살 때 콜레라에 걸려 다 죽어 가는데, 어머니가 나를 업고 대성통곡을 하셨다잖소. 어머니 울음 덕분에 다시 살아난 거요. 부친의 연세도 있으셨으니 손주 보고 싶은 맘에 서두르신듯 하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주체적인 삶의 모습에 대하여 여쭸다. 혼인하고 출산한 뒤에는 어찌 사셨을까?

김문수 전교= “부친은 내게 부지런히 책을 읽어 아는 것이 많은 사람 되라고 하셨소. 농사일 하면서도 한학을 계속 익히고 공부했소. 대학입시준비서와 강의록 같은 책도 독학으로 읽었소. 27살 때 면사무소에 다니던 제종형이 원서를 주며 경남지방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라 합디다. 내 인생에 시험지를 처음 보았고, 시험도 처음 쳤소. 당연히 낙방하였고 다음해 고성군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1970년 공무원으로 임용되었지요.”

남외경 작가= “그 시절, 농촌 사람들의 로망인 면서기가 되신거군요?”
김문수 전교= “1994년에 행정주사(계장)으로 23년의 공무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명예퇴직을 했소. 그 다음해 95년도 지방의회 출마를 준비하여 2대, 3대 고성군 의원으로 활동하였고, 2002년 도의원 임기까지 4년을 더하면 선출직 11년까지 도합 35년을 공직에 몸담았소.”

남외경 작가= “공무원과 선출직 공직자로 사는 동안 회한悔恨은 없으신지요?”
김문수 전교= “현직에 있는 동안 나름대로 한다고는 했으나 두드러진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안타깝소. 고향을 위한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부담을 지고 사는 삶이 공직자요. 요즘 세상에 공무원이나 선출직이 크게 변화시킬 일이 뭐가 있겠소만,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임무를 짐지고 묵묵히 소걸음으로 걷다보면 업적도 생기고 결과도 열리는게 세상 이치가 아니겠소.”

거실에서 마주 뵈는 작은 방 여기저기에 한자로 적힌 종이가 즐비했다. 흘림체도 있고 해서, 행서, 예서체 등 여러 서체의 글들이 눈에 띈다. 수북하게 쌓여있는 모습이 학생의 공부방처럼 각종 문구류와 책들로 가득하다.

김문수 전교=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배웠으니 한시 공부를 하고 있소. 한시는 어렵다 하나, 읽으면 읽을수록 묘미가 있소.”
남외경 작가= “아직도 공부를 계속 하시는군요.”
김문수 전교= “68세에 노학을 다시 시작했소. 구만에 있는 이회서당(고성유학의 대학자이신 신암 허격 선생이 설립)에서 독축讀祝(의례에서 축관이 읽는 축문)을 하게 되면서 한학에 더 깊이 빠진거요.
글을 읽고 글을 쓰다보면 유수같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인생은 한낱 꿈인 것을 알게 되오.”

2018년 3월, 고성향교의 전교에 지명되셨단다. 전교는, 성현의 제향을 받들고 국민교화와 유림의 대표가 되어 예를 행하는 책무를 맡게 된다.

김문수 전교= “나는 유학이 체질에 맞소. 여타의 종교처럼 허황되거나 죽음 이후의 생을 논하지 않소. 살아있는 사람이 행해야 할 도리와 삶의 이치를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학문이요. 유학에는 확인 안 되는 교리가 없고 다만 사람답게 사는 법을 익히오. 서양의 계몽주의 학자들과 사상가들도 ‘유학은 깔끔, 상쾌, 미혹되지 않는 깨끗한 학문’이라고도 했소. 사람을 도덕으로써 간절히 타일러 사람답게 살고자 함이지만 지극한 현실주의적인 학문이요.”

남외경 작가= “요즘은 빛의 속도로 세상이 변한다고 합니다. 앞으로 코로나19 이후 인간의 삶은 어찌 변할지, 우리는 또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지에 대하여 말씀 좀 해 주세요.”
김문수 전교= “나는 현대인의 이기주의에 대하여 생각이 많소. 자라나는 어린이들, 청소년들에게 인성 교육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오. 인성교육은 예, 효, 책임, 정직, 존중, 배려, 소통, 협동, 이렇게 8가지를 가르치려는 거요. 청소년들에게 인성교육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법으로 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치 못하다는 사실이요. 수없이 발생하는 반인륜범죄, 성범죄, 개인범죄들이 모두 교육 부재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소.”

남외경 작가= “청소년 인성 교육을 직접 주관하거나 참여하는 방법은 어떠세요?”
김문수 전교= “작년에 우리 향교의 유생들이 여러 차례 교육에 참여했소. 앞으로도 기회 있으면 언제라도 나서서 청소년들과 소통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남외경 작가= “그럼요. 앞으로 10년 이상 가능하시겠어요. 지자체에서 그런 기회를 만들어 향교의 유생들을 불러주시고 교육을 요청하시면 참 좋겠습니다. 기대할게요.”

이런저런 사연을 나누다 보니, 정작 자녀들 이야기는 간단히 짚고 넘어 가야겠다.
슬하에 3남 1녀의 자녀들은 부모님 말씀을 좇아 착실하게 살고 있다. 자영업, 부동산중개업, 회사원으로 제 각기 다른 일을 하며, 1달에 한 번씩은 꼭 부모님을 찾아뵌단다. 며느리들도 저마다 전문적인 직종에 종사하며 손주들을 잘 길러주니 고맙다고 하신다. 고명딸은 현재 태국에서 살고 있다. 결혼하자마자 건너가서 이제는 태국사람이 다 되었으니 서운타 하신다. 딸한테 몇 번 다녀왔고 여기저기 여행도 많이 시켜주는데, 모친이 비행기 타는 것에 익숙치 않아 더 자주 떠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신다.
공직에 오래토록 머문 경험으로 자녀들이 부친의 뒤를 이어 공직에 몸 담아주길 바랐지만 넷은 모두 공직에 뜻이 없었다. 원하는 길을 바람대로 걸어주지 않아 잠시 서운하기도 했지만 부친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남에게 폐를 안 끼치는 사람으로 살아주는 것만도 감사하다며 덧붙이신다.

김문수 전교= “자식이 어디 부모 맘대로 되던가? 자식은 그들이 원하는 자신들의 길이 있으니 부모란 그저 묵묵히 박수치고 지켜볼 뿐이오.”

마당에 나와 사진을 찍자 청했다. 텃밭에서 부추를 자르시던 모친은 앞치마에 묻은 흙을 털어내신다. 두 분이 좀 더 다정히 포즈를 취하시라 부탁드렸더니 환히 웃으신다. 그 웃음이 초여름 햇살보다 밝고 환하시다. 소년같이 선량한 웃음의 김문수 어르신 옆에 서신, 장좌리 출신의 참한 처자 천행자 여사님은 이제 여든의 할머니가 되셨어도 소녀처럼 고우시다.
참 다복하고 정겨운 모습을 뵙고 돌아오는 길, 당항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두 분이 살고 계시는 고택의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두 분의 건강을 오래오래 빌고 또 빌게 될 테다.

 
ⓒ 고성신문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5월 29일
- Copyrights ⓒ고성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이름 비밀번호
남외경사기꾼
조상님 잘 모셔도 후세에 복없다.
니하는 짓이 쓰레기인데 업보다
후세는 빛쟁이 작가 너때매 아픔을 느낄꺼다. 두고봐라
08/29 00:54   삭제
제자 부모 돈 해먹은 더러운 인간
과연 이 사람이 이런 내용의글 써도 되는 성품의 사람인가?
자료 다 모아뒀습니다. 뭐부터 시작할지 고민중이니 기대하세요
05/31 23:00   삭제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포토뉴스
가장 많이 본 뉴스
만평
상호: 고성신문 / 주소: [52943]경남 고성군 고성읍 성내로123-12 JB빌딩 3층 / 사업자등록증 : 612-81-34689 / 발행인 : 백찬문 / 편집인 : 황수경
mail: gosnews@hanmail.net / Tel: 055-674-8377 / Fax : 055-674-8376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남, 다01163 / 등록일 : 1997. 11. 10
Copyright ⓒ 고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함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백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