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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길을 걷고 싶다

이진만 논설위원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1년 08월 16일
ⓒ 고성신문

아마 이런 걸 두고 ‘버스 지나고 손들기’라고 할 것이다. 이미 고시(告示)되어 곧 시행을 앞둔 정책에 이러니저러니 시비를 거는 것 자체가 속 좁은 일이다. 그

도 집에 들 때마다 대문 옆에 붙어 있는 청색 표지판을 보면 그 옹졸함을 알면서도 부아가 난다.



청색 바탕에 흰 글씨로 도로 이름과 숫자가 결합된 이름표. 15년을 살아온 낡은 집이 새로 부여받은 주소로 2012년부터 법적 주소로 전면 사용한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 사용하지도 않아서 그런지 낯설고 어색하다. 그런데 주소뿐만 아니라 길 이름조차도 그렇다.



주민들이 즐겨 찾는 산책로 중에 남산 뒤편의 신월리 해안길이 있다. 수남리에서 월평리에 이르는 해안가는 고성군에서 오토캠핑장을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곳이다. 그런데 그 길의 이름은 ‘신월로’이다. 동네 이름에서 따온 거리 이름으로, 뛰어난 바다 풍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름이다. 신월로뿐만 아니라 고성의 길 이름이 모두 그런 식이다. 성내로, 중앙로, 남포로 등이다. 그런데 성내로가 어디인지, 중앙로가 어디인지 선뜻 머리 속에 떠오르지도 않는다. 이름 붙이는 방식도 그렇다지만 이름조차도 참 멋이 없다.



땅 이름은 우리 조상이 준 무형의 자산이다. 당연히 땅이름에는 우리 조상들의 삶의 흔적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강점기 때 일제가 토지 조사 사업을 하면서 억지로 일본식 이름을 붙여 그 혼을 죽였고, 광복이 되고도 원래의 이름을 살려 놓지 못했다. 이후 땅 이름뿐만 아니라 새로 생기는 길 이름까지 일본식 이름을 흉내 내어 지었다. 1호광장이니 2호광장이니 하며 열린 공간에 번호를 붙이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이름은 사람과 사람, 또는 물체와 물체를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이름에 숫자를 붙이는 방법은 편리성이나 개체(個體)의 연계를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 작명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작명법에 숫자를 붙이는 경우는 없다. 개체의 의미를 중요시해 온 조상님들은 혹시 비슷한 내용이나 형식을 가졌을 경우에도 별도의 이름을 지었다. 지명 앞에 ‘신(新)’이나 ‘새(새로운)’를 붙이는 경우도 일본식 작명법에서 들어온 경우다. 이름에 숫자를 붙이는 경우는 서양의 귀족 집안의 작명법에서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 사서(史書) 어디를 뒤져도 숫자가 붙은 이름은 없다.



하기는, 한때는 ‘만주족’과 ‘이스라엘 민족’의 예를 들며 민족 문화의 중요성을 주창하다가, 이제는 ‘세계화(世界化)’라는 한자어도 구식이 되고, ‘글로벌(global)'을 외쳐야 앞서가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세상이 되다 보니, 편리성을 도모하는 세태를 가지고 시시비비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밟고 살아가며 숨쉬는 땅이름만은 우리의 생명이 있는 이름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번에 새 주소를 만들 때 조상의 혼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지역은 편리성만 도모하여 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새 주소를 만들었다. 고성도 그런 지역의 하나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인근의 통영을 보면 작명법이 우리와 접근 방식이 다르다. 통영의 길 이름에는 통영의 역사가 그대로 묻어 있다. 관청이 밀집해 있었다고 해서 ‘간창골’, 엽전을 만들던 주전소가 있었다고 해서 ‘주전길’ 등이다. 그리고 통영은 길에 사람의 향기를 묻혀 놓았다. 통영 출신의 유명한 예술인의 이름을 딴 길 이름이 많다. 유치환을 기리는 거리, 이상옥을 기리는 거리, 이중섭이 술을 마시러 즐겨 다녔던 거리 등등. 그래서 통영은 거리 곳곳에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또 옛 지명을 되살리고 역사성을 부여하여 향토사를 아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 제주도의 경우는 제주 출신 연예인 ‘혜은이’를 기념해 ‘감수광로’가 있고, ‘배비장로’, ‘오돌또기로’, ‘자청비로’ 등 신화나 문학 속의 인물을 주로 사용했다. 전북 김제의 경우는 ‘황토길’, ‘제방길’ 등 마을 사람들이 평상시 사용했던 낱말로 길 이름을 지었다.
그러면 고성의 경우는 어떤가? 간단히 말하자면 길 이름을 만듦에 고민한 흔적이 없다. 기존의 마을 이름을 본떠서 만든 게 대부분이다.
고성이라고 통영만큼의 역사가 없을 것이며, 통영만큼의 특출한 예술가가 없을 것인가?



우선 역사적으로 볼 때도 진주의 논개와 어깨를 견줄만한 기생 월이(月伊)가 있다. 무기정이 있던 지금의 1호광장에서 송학동 고분군의 길은 월이와 관련된 이름을 붙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또 학문은 어떤가? 예부터 수없이 많은 학자를 배출한 인물의 고장이 아니던가? 우선 항일 정신과 향학의 열정이 남아 있는 덕선리 앞길은 ‘철성의숙’의 정신과 세계적인 석학 ‘김열규’ 선생의 생가가 인근에 있음을 고려하여 학문의 이야기가 있는 거리로 만들어 후학들에게 길잡이로 남기면 어떨까? 고성을 널리 알린 시인 ‘서벌’은 어떤가? 그의 시혼(詩魂)이 담긴 대독천 일대와 수남리 사거리에서 보건소로 들어가는 길을 ‘서벌의 거리’로 만들면 어떨까?



하긴, 역사가 깊고 인물이 많은 고장이다보니 모두 의미를 붙이고 그 표적을 새긴다면 도리어 인물이나 역사가 가지는 의미를 죽이게 될 수도 있다. 또 이름이란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적으로 사람들이 만들어 붙인 이름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새로 뚫은 길은 밋밋한 거리 이름보다는 주민들의 의견을 들어 우리 고성의 정신이나 인물과 관련된 이름으로 짓기를 권한다. 그리고 이왕에 지은 이름이라도 일본식 잔재가 남아 있다면 옛 이름을 되살려 하나씩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고성에도 고성 사람들의 훈훈한 정이 넘치고 이야기가 있는 거리가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길을 거닐며 고성의 역사와 인물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1년 0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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