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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섣달 그믐날 운흥사 스님이 손수 음촌 양촌마을 마을 안녕 기원제 당산나무아래서 지내
▣ 남산(南山)
남산 마을은 마을 뒷편의 조그만한 산이 남북으로 뻗어 있어 이 산을 옛부터 남산이라 하였는데 산 이름을 따서 마을도 ‘남산’이라 이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약 100년 전인 1880년경에 맨 먼저 진양강씨가 입촌하고 밀양박씨, 월성손씨가 입촌해 거주하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돼 지금은 합천이씨), 상주최씨 등 제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
남산 마을은 마을 뒤의 남북으로 뻗은 남산 기슭에 자리잡은 서향을 한 마을로서 마을 앞의 넓은 들판은 와룡저수지의 몽리구역으로 비교적 비옥한 토질이다. 그리고 봉현천을 경계로 사천시(삼천포)에 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 음촌(陰村)
음촌 마을은 1984년 고성군의 이동 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석지리 음촌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음지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음촌으로 부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약 150년 전에 진양강씨가 처음 입촌했으며 그 후에 고성이씨와 밀양박씨가 입촌해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됐다. 지금은 위 성씨 외 전주최씨, 김녕김씨, 동래정씨 등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당산나무와 당산제
음촌 마을 개울 옆에 있는 물체나무를 ‘당산나무’라고 하며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에 운흥사 스님이 와서 음촌, 양촌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데 지금은 양촌마을에서만 단독으로 지내고 있다. (음촌마을은 교인이 많아서 참여하지 않고 있다.)
◎ 지명 일화
◇ 꽃바위 : 마을 뒷산 줄기 끝에 바위가 줄을 지어 있는데 그 바위돌을 갈면 꽃무늬가 나타난다 하여 꽃바위라 부르고 있다.
◇ 절터 : 마을에서 동북쪽 700m 지점에 옛날에 절 이 있었다고 하여 이곳을 절터라 부르고 있다.
8. 봉현리(鳳峴里)
▣ 봉현
◎ 지명의 유래
봉현마을 지형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세를 취하고 있다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지석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청동기 시대부터 마을이 구성되었으며 사람이 살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의 연대는 본 마을(덕고개)에 들어온지 오래된 문중(門中)의 선산을 참고하여 살펴보면 약 350년 전(1640년경)에 진양강씨가 맨 먼저 입촌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은 김해김씨, 고성이씨, 성주배씨 등 여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해 살고 있다.
◎ 봉현리 지석묘
봉현리에 있는 지석묘로 석지리 지석묘군과 같은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대부분 훼손되어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 지명 일화
◇ 덫목(덤미기 고개) : 본 마을의 덕고개에서 와룡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마을 앞산(와룡산)이 범의 형상을 하였다하여 ‘범남산’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곳에 덫을 놓아 범의 침범을 막았다하여 덫목이라 이름하여 부르고 있다.
◇ 덕고개, 불당골 : 봉현 마을에서 와룡리 ‘못골’로 가는 고개인데 옛날에 이곳에 절이 있어 절에 불공 다니는 사람들이 마을이 인심좋고 착한 동네라고 하여 덕(德)자를 붙여 ‘덕고개’라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 벅구밭 모통이 : 지금의 남산 북쪽 봉현의 작은 산모통이로 이곳에서 농악놀이가 성행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8. 영현면(永縣面)
영현면은 본래 영선현(永善縣)의 지역인데 신라 때에는 일시 고성군에 예속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에 진주군에 예속되었다.
서기 1096년 9월 24일자 칙령 제49호로 다시 고성군으로 귀속되면서 영현면으로 개칭해 연동(蓮洞), 화촌(花村), 신촌(晨村), 분촌(盆村), 침촌(砧村), 봉림(鳳臨), 영동(永洞), 부촌(芙村), 대촌(大村),봉대(鳳台), 발촌(鉢村), 추촌(楸村)의 14개 동리를 관할했다.
서기 1914년 3월 1일자 경상남도령 제2호로 고성군의 면을 병합할 때 영현면으로 존치하여 관할에 연화(蓮花), 신분(晨盆), 침점(砧店), 봉림(鳳林), 영부(永芙), 대법(大法), 봉발(鳳鉢), 추계(楸溪)의 8개 동리를 두었다.
영현면은 1915년 10월 10일에 면이 설치되어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로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그대로 8개 법정리에 16개 행정리 22개 반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현면은 고성읍에서 20.3㎞ 북서쪽에 위치해, 동쪽은 대가면, 서쪽은 진주시·사천시, 남쪽은 상리면, 북쪽은 영오면·개천면과 접해 있다.
면사무소의 소재지는 침점리 354-1번지에 위치해 총면적은 32.18㎢이고 가구는 552가구에 인구 1,066명(남자:505명, 여자:561명)으로 고성군 총가구의 3.8%, 총인구의 3.3%가 거주하며 경지면적은 526㏊에 임야가 2,436㏊이고 특용작물 재배면적은 38㏊에 22.5M/T을 생산하며 농가수는 434호로 인구밀도는 34인/㎢이다.
면내에는 초등학교 1개 교가 있으며 취락은 영천강 주변의 가로를 따라 발달해 있다. 그리고 문화 유적지 현황은 성터로서 연화리 성터와 대법리에 배병복(配兵伏)이 있으며 영현지석묘가 있고 사찰지로 대법리사지 등이 있다.
1. 봉발리(鳳鉢里)
봉발리는 본래 진주군 영선면(永善面) 지역으로서 광무 10년(서기 1906년)에 고성군으로 편입되어 1914년 3월 1일 경상남도령 제2호로 고성군의 면을 병합할 때 봉대(鳳台)와 발촌(鉢村), 금능(金陵)을 병합하여 영현면의 봉발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봉발1구, 봉발2구, 금능의 3개 마을이 있다.
▣ 봉발1구(鳳鉢1區)
봉발리는 임진왜란 전부터 사람이 거주하게 되면서 마을명을 지동(枝洞)이라 불러오다가 그후에 마을 서쪽 산밑에 사찰이 들어서게 되면서 발리(鉢里)또는 발촌(鉢村)으로 부르게 되었다. 191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로 이동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 때 분동해 봉발1구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전부터 거주하게 됐다고 전하고 있으며 현재 거주민의 성씨는 진양강씨, 수원백씨, 청주한씨, 영월엄씨 등 성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봉발2구(鳳鉢2區)
◎ 마을의 유래
봉발리는 옛날 임진왜란 전에 마을에 사람이 살게 되면서 마을을 지동(枝洞)이라 불러 왔으며 그후에 마을에 사찰이 들어서게 되면서 발리(鉢里 : 산승의 식기를 발(鉢)이라함)라 했다고 전하고 있다. 1914년에 고성군의 행정구역 통·폐합시 영현면의 봉발리로 하여 오다가 1984년에 봉발리에서 분동되어 봉발2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임진왜란 전부터 사람이 정착해 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은 남원양씨, 수원백씨, 김녕김씨, 김해허씨, 동래정씨 등 성씨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봉발리 동안좌목(洞案座目)과 교민록(敎民錄)
봉발리는 군내에서도 유일하게 동안좌목과 교민록을 보관해 이를 시행하고 있어 다른 마을의 귀감이 되고 있다.
▣ 금능(金陵)
금능마을은 옛날에 마을명을 ‘쇳등’ 또는 ‘쇠띠’로 불러왔는데 마을 앞산과 성지골 사이에 골이 파져 있어 그곳에서 먼 옛날에 쇠를 팠다 하여 그렇게 불러져 왔다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은 금능으로 부르고 있다.
1914년에 영현면의 봉발리에 편입되었다가 1984년 고성군의 이동명칭 및 행정 구역확정 때 봉발리에서 분동되어 금능마을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임진왜란 전부터 사람이 거주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한 때는 수원백씨, 김녕김씨, 영월엄씨, 진양강씨, 분성배씨, 남평문씨 등 40여 호가 거주했다. 지금은 문씨는 한 가구도 살지 않으며 기타 성씨 20여 호가 마을을 형성해 살고 있다.
◎지명 일화
◇ 범바위 : 성지골 안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로 바위 위에 범이 올라 앉아 있었다 하여 ‘범바위’라 부르고 있으며 산밑 들도 ‘범바위들’이라 하고 있다.
◇ 고양이 바위 : 안골 논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바위로 안골이 쥐설이 되어서 쥐가 벼를 먹으러 갈려고 해도 고양이 바위 때문에 가지 못해서 옛날부터 마을에는 가난이 없고 인심이 좋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