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품은 독립운동가의 집, 전시관이 되다
독립운동가 이기윤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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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항일운동
진주고보 독서회 주도
모진 고문 당하며
손발톱 빠지는 고통
광복 후 교사 천직으로
여기며 후학 양성
아들 이갑영 전 군수와
가족이 보관한 유품 모아
생전 살던 서외리 집에
작은전시관 마련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3년 03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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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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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과 글을 우리가 지키겠다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식민지의 백성으로 침략자의 말과 글로써 우리의 소중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고성군 고성면 덕선리 616번지 출신 이증삼은 고성 출신 마지막 독립운동가다. 또다른 이름은 이기윤. 그는 이 땅이 빛을 되찾은 지 60여 년이 지난 1993년 4월,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떠난 지 20년, 독립유공자의 집은 작은 전시관이 됐다.
# 광주학생항일운동, 진주고보 독서회 이끈 ‘이증삼’ 1929년 10월,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는 통학열차 안에서 한 일본인 광주중학생이 광주여고보 학생을 희롱했다. 여학생의 사촌동생과 일본인 중학생의 싸움이 시작됐고 광주고보와 광주중학생들의 패싸움으로 번졌다. 일본경찰은 일본인 학생 편에 서서 조선인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광주고보 학생들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이 시작됐다. 광주학생항일운동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의 학생들 사이에서 항일운동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노예직교육 폐지, 경찰진입 금지, 광주학생운동 구금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1930년 1월, 진주고보 2학년 이증삼은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려 동맹 휴학을 주도했다. 이 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정학을 당했다. 3년 후인 1933년 11월. 진주고보 5학년 이증삼은 한계수와 김사옥, 장준, 황진생 등과 함께 황진생의 하숙집에서 독서회를 조직했다. ‘적색독서회’는 비밀결사 학생협의회였다. 회원들은 사회과학서적을 돌려가며 읽는 것은 물론 동지들을 규합하고 조직을 확대해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했다. 1934년 5월, 독서회원들은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이증삼은 미결수로 9~10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1934년 8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일제는 어린 학생들에게도 어김없이 혹독한 고문을 퍼부었다. 모진 고문에 손톱과 발톱이 빠졌다. 하지만 우리 말로 된 우리 책을 읽은 것이 조선인 학생들에게 죄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몸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워도 그 정신만은 꺾이지 않았다.
# 진실한 교육자로 무던히 살아낸 세월 “시집와보니 신랑 월급은 빤한데 딸린 식구가 13명이라. 게으른 사람 하나 없이 다 열심히 살아도 살림이 고만고만하데. 독립운동가라서 자랑스럽기는 한도 없는데 우찌 그리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다 살기가 어려웠으꼬. 자식들은 자꾸 커올라오제, 돈은 없제, 마음이 상하는 기라.” 이증삼은 졸업할 때쯤 이기윤으로 개명했다. 이기윤 선생과 배두선 여사는 분가해 덕선리 집을 떠나 고성읍에 새둥지를 틀었다. 장독대와 작은 마당과 텃밭이 딸린 작은 집은 이기윤 선생이 생전 직접 기술자를 알아봐가며 정성들여 지었다. 집앞 텃밭에는 철마다 푸성귀가 그득해 밥상차림에 한몫했다. “우리 남편은 평생을 교육자로 진실하게 살았지. 남한테 못된 소리 한 번 안 했고 돈에도 욕심이 없는 기라. 손톱 발톱 없는 자리를 보면 참 말도 몬한다. 그 고생을 하고도 가족들한테는 큰 기둥 아이가. 아파도 힘들어도 티 한 번 안 내고 묵묵하이 참고 살다가 가셨네.” 옥살이하던 시절 고문 후유증에 빠진 손발톱 자리가 이따금씩 쑤시고 아팠다. 하지만 가르치는 즐거움, 공부하는 행복은 아픔을 잊게 했다. 이기윤 선생은 교사를 천직으로 삼고 교단에 섰다. 우리 말로 숱한 것들을 가르치는 일이 그에게는 참으로 신명나는 일이었다. 이 당연한 일이 그의 젊은 시절에는 죄가 됐으니, 교직에 있으면서도 감개무량한 마음이 불쑥불쑥 솟았다. 어린 아이들의 검은 눈속에 수많은 이야기들을 담아주고 싶었다. 그러면 교단 위는 더없이 즐거운 공간이 됐다. 그렇게 무던하고 조용하게 세월이 흘렀다. 선생은 생전 아내 배두선 여사에게 독립운동하던 시절, 옥고를 치르던 시절 이야기를 가끔 하곤 했다. 하지만 워낙 강직하고 반듯한 성격이라 유난떨지도 않았다. 일제 치하에는 누구나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했다. 주변에서는 이기윤 선생을 두고 죽을뻔 했는데 살아난 것이라고들 했다. 아내는 주변 이야기를 듣고서 남편이 얼마나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웠을지 그리고 얼마나 강인한 마음으로 그 모든 것을 이겨냈을지 그저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이기윤 선생이 단 한 번 욕심낸 것이 집이었다. 고래등같은 집은 아니어도 내 집에서 나의 유품을 보관하고 가족들이 한 번씩 들여다 보며 당신을 떠올리고 이땅의 자유에 감사하길 바랐다. 아주 작은 물건일지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 그것이 역사가 되리라 했다. 후손들에게 당신이 겪어낸 아프고 처연하지만 자랑스러운 역사를 알리고자 했다.
# 독립운동가 이기윤 선생 가족박물관 2003년 이기윤 선생이 별세한 후 아내 배두선 여사는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 선생이 아끼고 사랑하며 가꾼 집은 세월의 더께가 그득 내려앉아 홀로 남은 아내와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 이제 90세가 되고 보니 집을 정리하는 일조차 버거워졌다. 2023년 2월 23일. 고성읍 서외오거리가 떠들썩했다. ‘독립유공자의 집’이 있는 좁은 골목길은 사람들의 웃음과 박수, 노랫소리로 가득찼다. 이기윤 선생이 세상을 뜬 지 20년이 되는 해에 선생이 생전에 살던 집이 새단장하는 날이었다. 선생의 아들은 민선1기 이갑영 전 군수다. 이갑영 전 군수는 현직에서 물러난 후 제주도에 살고 있다. 멀리 사는 아들을 부를 수도 없고, 딸이 어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배두선 여사 혼자 어찌 손쓸 수가 없어 방치하다시피 했던 텃밭은 방송국에서 나온 이와 자원봉사자들이 마른 풀과 나뭇가지들을 치웠다. 자원봉사자들의 손끝에서 들뜨고 변색된 벽지도 뽀얀 새옷을 갈아입었고, 물건들이 쌓여있던 주방도 말끔히 정리됐다. 그리고 방안에는 선생이 생전 그토록 원했던 전시관이 생겼다. ‘독립운동가 이기윤 선생 가족박물관’이라 새긴 나무현판도 달았다. 저녁마다 챙겨보는 KBS 1TV 6시내고향의 선물이었다. 배두선 여사는 이 모습을 하늘에서 남편이 지켜보며 얼마나 좋아할까 싶으니 음악 없이도 춤이 덩실덩실 나왔다. 어머니와 함께 늙어가는 아들은 방송 덕분에 효도한다며 오랜만에 큰 소리내 허허 웃었다. # 역사를 잊은 민족은 발전하지 못한다 가족박물관에는 세 개의 궤 위에 이기윤 선생의 손때가 묻은 몇 가지들이 자리잡고 있다. 제일 오래된 궤는 원래 있는 집에서는 엽전 같은 걸 담아뒀다지만 선생과 가족들은 옷이나 살림살이를 담아두곤 했다. 궤 위에는 태극기와 회중시계, 지갑, 안경과 부채,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과 기사 액자와 함께 선생이 가장 자랑스러워한 순간에 가슴에서 빛나던 훈장이 전시돼있다. 수십 년이 지나도 새하얀 셔츠는 선생의 성정 같다. ‘모둠명 7조’가 전달했다는 액자도 눈에 띈다. 경기도 오산시 매흘중학교 학생들이 지난해 6월 ‘소개하고 싶은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이기윤 선생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모둠활동을 한 결과물이다. 아이들은 제 나이또래였던 이기윤 선생이 학생 신분으로 항일운동을 주도한 것이 놀라우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워 꼭 소개하고 싶었다고 했다. 다음 세대가 기억한다면, 선생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쉬는 것이다. 이기윤 선생은 생전 “역사를 잊은 민족은 발전하지 못한다”는 말을 늘 곱씹었다. 옳은 일은 누구보다 앞장섰고 이득을 위해 불의를 눈감지도 않았다. 이기윤 선생과 같은 숱한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자유로우며 평화롭다. 그리고 이제 그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작은 전시관이 생겼다. “내 남편이기 이전에 이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친 독립운동가로서 존경합니다. 이기윤이라는 인물의 반려자로 살 수 있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이기윤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입니다. 우리집은 독립유공자의 집이고, 역사를 품은 집입니다.” 수많은 사랑과 정성의 손길이 닿은 독립운동가의 집은 봄이 먼저 온듯 꽃이 없어도 향기롭다. 이기윤 선생이 정성을 쏟아 짓고 애정을 담아 가꿨으며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고운 그의 아내가 지키고 있는 집은 문이 활짝 열려있다. |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3년 03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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