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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사람 사는 이야기

萬古江山에 한 송이 꽃처럼 피고 한 마리 나비로 날으리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종잇장처럼 얇디 얇은 것이리니~

고성일(81세, 고성 장례사)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10월 16일
↑↑ 죽은 자의 무덤은 멈춰 있고, 산 자의 발자국은 쉼없이 움직이는 것
ⓒ 고성신문
내 나이 이제 여든 하나요. 작년에 산수연(傘壽宴)을 치렀소. 집사람이 아파서 병원에 있다가 갑작시레 작년 팔월에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소. 평생 남의 주검을 챙겨주던 삶을 살았건만 할멈을 보내고 나니 자주 눈물이 나오. 내는 요새 큰 손주 민수캉 둘이 고성읍내 교사리에 살고 있소.
아래께 동해면 출신 아지매가 날 찾아 왔디요. 신문에 실을 고성 냄새가 폴폴 나는 살아온 이야기를 해 달라카데요. 내가 할 말은 참 많은디, 그 이바구를 다 풀어낼라카모 몇 날 밤을 새워도 모자랄낀데, 고마 숨이 턱 막히더마는. 여든이 넘으면 오늘 밤이 될지, 내일이나 모레가 될지, 언제 떠날지를 모르는 몸 아이요? 그래서 마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내 살아온 거를 쉬엄쉬엄 풀어 보기로 한 기요. 별시런 것도 없는 영감이 흰소리 한다꼬 나무라지 마소.

내는 1940년 6월에 고성 철뚝에서 태어났소. 아부지는 갯가에서 목선으로 전어 잡으며 밭뙤기 조금 부치고 살았소. 요새 같으면 어장해서 생선 잡으면 판로가 좋아서 돈도 좀 하것지만, 그 때는 팔 곳이 없었소. 장날이나 돼야 사람들이 모이지 평일에는 다들 묵고 살기 바쁜 시절이었소. 냉장고도 수족관도 없으니 많이 잡으모 썩카서 내삐리고, 안잡히모 인건비도 못 건지고, 돈벌이가 어려운 시절이었소.
내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마산으로 공부하러 갔는데, 하숙비에 월사금이 제법 되는 기라요. 월사금 밀린께네 부끄럽기도 하고 선생님이 자꾸 회비 갖고 오라고 쫓아내데요. 그때는 다들 입에 풀칠하기도 버겁고 힘들 때였소. 몇 번 그런일 당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견디기 힘이 듭디다. 퇴학하고 보따리를 싸서 울면서 집으로 왔는데 마음이 내끼 아인기요.
허파에 바람 든 거 맨치로 온 천지를 싸돌아 댕긴께 옴마가 ‘저리 놔 두모 큰일 내겠다’ 캄시로 손잡고 안정사에 델다 놓데요. 내 나이 13살에 달티고개가 보이는 의상암 먼디에 올라 하염없이 바다를 보고 또 봤소. 속에 꽉 찬 역마살을 달래고 달래며 의상스님께 불법을 배웠소. 우리 옴마는 내가 스님이 되길 바란듯 싶소. 헌데 사는 기 우찌 맘대로 되는가요?
3년 동안 절밥을 묵고 또 무도 속이 헐빈한기 죽것디요. 스님 몰래 절에서 내려와 전국을 돌아댕깃소. 머슴도 살고, 품팔이도 하고, 똥장군도 지고, 어장배도 탔소. 19살 때 산양면 명지개 어장 멸치그물에 말리드가서 고마 죽을뻔도 했소.
그라다가 영장이 나와 육군 보병으로 군인이 되었소. 한 날은 휴가를 나와서 가야극장에서 쇼를 보고 나오는디 헌병이 잡는기라요. 복장이 불량하다꼬 내를 잡아간다 안카요. 내가 헌병한테 따지다가 싸움이 났소. 그 때 옆에서 이삔 처자가 내를 보고 있었다 안카요.
↑↑ 멋쟁이 내 할멈과 제주도 여행길에, 저렇게 환히 웃던 모습도 한 줄 바람처럼 사라지고
ⓒ 고성신문
함양 수동 출신의 한 처자가 고성 이모집에 놀러왔다가 무서븐 헌병하고 싸워서 이기는 내를 보고 한마디로 뿅~갔다 카데요. 내도 그 처자를 보고 놀라 자빠졌다 아이요. 얼마나 이쁜지 천사같고 배우 같습디더. 군대 제대 하면 다시 절에 가서 절밥 묵는 길을 가려다가 맘을 바꿔 먹었소. 딴 놈이 업어가기 전에 얼른 순남이를 델꼬 와서 바로 살림을 채리삣소. 그 시절에 연애결혼은 드물었는데, 우리는 눈과 맘이 맞아삔기요.
그래 내가 24살, 순남이가 19살 때 고성 철뚝 우리 집에서 옛날식으로 식을 올렸소.
묵고 살아야 하니 대한통운에 가대기를 하러 갔소. 부산에서 비료며 밀가루 같은 것을 싣고 온 ‘도생호’, ‘다문호’에 올라가서 짐을 지고 푸는 일이었소. 그 배들이 돌아 갈 때는 동해면에서는 목선에 싣고 온 빼떼기를, 배둔에서는 콩과 폿을, 삼산면에서는 옥수수와 잡곡을 싣고 갔소.
그리 하다가 수협 중매인이 되었소. 11번을 달고는 건어물을 경매했고, 15번을 달고는 생선을 받았소. 내가 왼쪽 섶을 열고 옆구리에서 신호하는 손가락질을 잘 한다오. 멸치는 염포를 하고, 메기나 문어는 건조하여 마산이나 부산으로 내다 팔았소.
마흔넷에 집사람이 읍내에 ‘남양횟집’을 열었소. 음식 솜씨가 좋아서 손님이 많았소. 그러는 동안 딸 셋에 아들 셋을 낳았소. 세월이 우찌나 빨리 흘렀는지 참으로 유수 같았소. 평생 마누라가 식구들 건사하고 자식들 공부시키고 욕을 많이 봤소.
내가 장례사가 된 야기를 좀 하것소.
안정사에서 절밥을 먹으면서 공부를 할 때 이야기요. 19살 되던 해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실 적에 뒷서더리(뒷일)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꼬 내를 부르는기요. 시체 몬치는 것을 보았고 염하는 것과 장례 절차를 배웠소. 첨이라캐도 무섭지 않았던 거를 보믄 내가 그리 살아갈 팔자였던갑소. 내가 일하는 걸 보더마 어떤 보살님이 자격증을 따는기 우떻노 카데요. 아드님이 경남도청에 근무하시는데 정보를 알아봐 주셨소. 안정사에서 돌아가신 그 보살님을 화장 하니 몸에서 사리가 나옵디다. 공부를 좀 하고 시험을 봐서 경상남도 지사님이 주는 ‘염사자격증’을 땄소. 그 귀한 거를 집에 물이 들어서 다 떠내려 보냈소. 요새 같으모 일련번호도 적어놓고 컴퓨터에 저장도 하더만 옛날에는 그런 기 어디 있었소?
내가 이래뵈도 자격증만 5개요. 장례지도자 1급과 2급, 풍수지리학, 수맥탐사 자격증까지 다 딴 사람이요. 보건대에서 교육 받고 실습을 잘 해야만 나오는 자격증인기라요.
내보고 상여 앞소리를 잘 한다카요. 예전에는 초상이 나면 염하고, 입관하고, 장사지내고, 묘를 쓰기까지 절차가 많았소. 상여가 나가면 앞에서 끌어주는 이가 있었소.
그래, 내가 풍수도 보고 장례 절차에 대하여 모돌시리 아니까 돈을 제법 받았소. 그거 다 모았으모 고성 부자 되었을끼요. 내는 주머니에 돈이 들면 다 풀어삐야 맘이 편했소. 초상집에서 욕봤다꼬 삯을 주면 시장 지나가다가 할매들한테 만 원, 이만 원 드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술 받아 주고 물쓰드끼 썼던기요. 내 별명이 ‘날아가는 까마귀도 오라캐서 술 사 주는 사람’이었소. 우리 할멈이 참 고생했소. 내가 그리 돈을 안 아끼고 써 제쳐도 바가지를 안 긁었소. 할멈이 내 하는대로 가만 놔둬서 내가 더 헤프게 썼던 기요.
그리 살다가 내가 50살 넘었을 때 서울 살던 처남 정영궁이 이캅디다. ‘고 서방, 고성 사회에서 염과 상여 앞소리도 하고 묘자리도 잘 보니까 한양대 출강 교수님을 소개해 줄테니 풍수지리를 공부 해 보소’ 그 길로 교수님을 만나 5년간 1주일에 2번씩 공부를 하러 댕깄소. 1주일에 30만 원 용돈을 받으모, 첫 날에 고성에서 반은 술 마시뿌고 겨우 15만원 들고 공부하러 다녔소. 우리 할멈이 내보다 빨리 세상 떠난 것도 내가 애를 마이 미서 그런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아푸요.
61살 환갑이 되던 해에 목에 악성 종양이 왔고 후두암 판정을 받았소.
서울에 가서 종양 절제하고 레이저와 항암, 방사선 치료까지 받다가 1년만에 내려 왔소. 10년 뒤에는 완치종결 판정을 받았소. 그 질로 술을 끊었소.
그런데 할멈이 가습기 피해자가 된 기요. 병원에서 치료 받고 내려와서는 멀쩡하던 사람이 하룻만에 세상을 떠나삔기요. 8월 30일에 내려와서는 이바구도 하고, 도란도란 장난도 쳤소. 하마 화장실 가고 싶다쿠더마, 아래로 몸엣것을 모두 쏟아삐릿소. 본인은 죽을 날을 아는기요. 그라고 몸도 지 알아서 속을 다 비우는기요. 마이 아푼지 할멈이 ‘119 부르소’ 카더마, 그 말이 마지막이었소.
내가 지금껏 시체만도 수백 구를 만졌고, 이장(移葬)만도 수천 구를 했소.
죽음이 별 게 아이요. ‘살면서 마음을 비워라.’ 안 카요? 이승에서 떠날 때는 몸을 비우는 게요. 그렇게 모든 것을 비우고 훌훌 떠나는게 죽음이요. 인연도, 자식도, 재산도, 돈도 모두 버리고 텅 비어서 떠나는 거요. 욕심 부리고 아웅다웅 살 필요가 없는 기요.
↑↑ 누군가는 떠나도 남은 자손들은 또 그들 삶의 역사를 열심히 쓰고 있으니 고마울 뿐
ⓒ 고성신문
내 자슥들은 모두 잘 키웠소.
큰 아들은 횟집하다가 그만두고 삼성조선 외주회사에 취직하여 특수 용접을 하고 있소. 손주 은혜는 대학생이고 민수는 일 나가는데 착하고 기특하기 짝이 없소.
둘째 아들은 국방부 군악대 출신인데 한국전통무용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서울 예술단 단원이며 포천시립예술단장으로 타악도 잘 하고 학춤을 잘 추요. 소리꾼 장사익이 큰 무대에 설 때면 우리 둘째가 북을 치요.
막내아들은 육군본부 군악대 출신으로 고성 오광대 기능 보유자요. 꽹과리와 북도 잘 치지만 원양반 춤 전문이요. 남해안 별신굿에 고성오광대 상여 앞소리꾼으로 알아 주요. 경주대 전임이고 한양대는 겸임교수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소.
내가 하던 장묘 사업은 큰 사위가 맡아서 한다오. 내한테 배워서는 대전으로 올라가더만 지금은 장례버스와 리무진을 몇 대나 가진 사업가가 되었소. 큰 외손주도 추계예대를 나와서 유골함에 글 새기는 사업을 하고 있으니, 가업을 큰 딸 가족이 잇는 거요. 둘째 딸 미숙이, 셋째 딸 미옥이 가족 모두 건강하고 손주들도 잘 자라고 있으니 내사 부러운게 없소.
다만, 할멈이 내 혼자 두고 먼저 떠난기 두고두고 섧소. 5년만 더 살았더라모 얼마나 좋았을꼬 싶소. 명운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정하것소. 모두가 하늘의 뜻이지요. 죽음 앞에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기 아무것도 없소. 오면 받아들이고 갈 때가 되면 훌훌 털고 가는기요.
죽음은 슬픈기요. 떠나는 자의 마음은 내 모르겠소만, 남은 자에게는 영원한 이별이 아니요? 다음 생에 좋은 목숨으로 환생하려면 마음을 바르게 쓰고 살아야 하는기요. 삶과 죽음 사이는 종잇장 한 장 만큼 얇디 얇은 것이요. 살아있는 동안 좋은 일 하고, 좋은 말 하고, 웃으며 살다 가야하는 기요. 바람처럼, 나비의 날개짓처럼 가볍고 가벼운게 삶인게요. 우리는 모두 그리 살다가 어느 날 훌훌 떠나는 기요.
들판에 누렇게 물든 거 봤소? 내가 심은 벼들도 잘 자라고 있소. 예전에 할멈과 약속을 했소. 힘 닿는데까지 농사를 지어서 수확하면, 어려븐 이웃들한테 나눠줄끼라는 거요. 작년에도 좀 나눴소. 내 평생 살면서 할멈한테 약속을 못 지킨 거야 많것지만, 이거는 꼭 지키고 싶소. 올 가실에도 수확하면 20키로 20포대는 나눌 수 있을 듯 싶소.
지금까지 내 이바구 잘 들어줘서 고맙소. 내는 고성 읍내에 사는 고성일이요.

ⓒ 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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