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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가 좋으시모 저는 모두 좋심미더 지금 제 삶은, 아부지가 주고 가신 씨앗이며 뿌리임미더

최인락 마암면(86세)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10월 08일
ⓒ 고성신문
어젯밤 꿈에 아부지를 뵈었심미더.
팔월 보름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받으며 들판을 걸어가는 젊은 남정네는 얼굴이 붉었심미더.
마을 앞 신작로를 따라 동네로 들어오시는데 소가 몇 마리 앞서 걷습디더. 그 소들은 하나같이 몸집도 좋았고 뿔도 부드럽고 오붓하게 걷는 모습들이 참 다정합디더. 모두 우리 집으로 걸음 하는 것 같아서 맨발로 달려 나가 맞았는데, 사방 화안하게 달빛이 소를 감싸고 있어서 분간이 안 갑디더. 무엇이 소인지, 어디가 들판인지, 누가 사람인지, 분간이 안 가서 눈만 껌벅거리다가 잠이 깨고 말았지예.
오늘 새벽에도 눈을 뜨자마자 전동차를 끌고 동네를 한 바퀴 했심미더. 아무도 나오지 않은 길을 달려 동네 앞 들판을 여기저기 살피고는 재실齋室로 들어갔지예. 드나드는 쪽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화산재禾山齋’ 앞에서 생각에 잠겼심미더. 아무래도 제가 조상님 꿈을 꾼 모양임미더. 꿈에 보이는 소는 조상을 뜻한다는 말을 들었지예. 암매도 올해는 세상이 어수선해서 식구들 모여 추석 차례도 제대로 못 모시는 줄 알고 조상님들이 선몽을 하신 것 같았심미더. 후손들 맘 불편하지 말라꼬, 후손들 오가는 길 훤히 비춰주시고 앞날도 대낮같이 밝으라꼬 그라는거 아닐까예? 그라고 제가 재실 잘 지어서 조상님 음덕 기리는거 ‘엄첩다’ 하시며 고마버서 오신거 아이까예? 올해는 우리 식구끼리 단촐하게 제사 모셨지만, 꿈 생각만 하모 제 마음이 좋아서 우짤줄을 모리것슴미더.

↑↑ 50년 전, 어머니를 모시고 네 명의 자녀들과 찍은 사진
ⓒ 고성신문
아부지,
참 오랜만에 불러봄미더. 제 나이 스물다섯 되던 해 돌아가셨으니 육십 년도 더 됐다 아임미꺼. 그 때 아부지는 사십대 팔팔한 청춘이셨는데 저는 이제 꼬부랑 할배가 다 됐심미더. 저를 알아보기는 하시것지예? 암만 세상이 넓어도 핏줄은 땡긴다 안카데예? 텔레비전 보이 태평양을 건너 떨어진 쌍디가 어릴 때 헤어지고 노인되어 만나도 닮은기 많아서 핏줄은 못 속인다는 말을 증명한다 카데예. 어쩌면 지금 제 모습이 아부지 늙으신 모습과 비슷할거 같심미더.
기억 나시지예? 제가 여섯 살 되던 해에, 고성읍내에서 왜놈들 주문 받은 집 짓다가 감전으로 불이 났고, 기와쟁이가 죽었다 카데예. 대목수였던 아부지는 집 짓는 사업을 하셨는데 그 일로 쫄딱 망하고 마암면으로 오셨다 아임미꺼.
그 전에는 대가면에 살았지예. 5대조 조모님이 함안이씨 성을 가진 분이셨는데 가난한 집에 시집오셨고, 그 따님이 사업수완이 뛰어나셔서 만석살림을 일구셨담서예. 증증조 고모님이야 시집 가셔서 남편의 집안을 따르셨으니 저희 집안하고야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그 그늘이 넓고 깊어서 많은 사람들이 휘하에서 어울려 살았다고 했심미더. 저도 여섯 살까지 살았던 대가면 저수지가 훤~~하게 기억이 납미더.
마암면에는 달성배씨가 천석꾼으로 살았고, 아부지는 대목수의 손길로 재실이며 안채며 기왓집을 몇 채나 지으셨던 것을 저도 압미더. 고래등 겉은 배씨 집을 볼 때마다 속상했심미더. 솜씨 좋은 아부지는 언제쯤 저런 집을 우리한테도 지어주실까 하고 억수로 기다렸심미더. 아부지는 머리가 비상하게 뛰어난 분이셔서 손가락 점만 쳐도 비가 올지 안 올지를 안다카시데예. 그런 분이 다 망하고 가진 것 없이 남의 집이나 지어주고 품삯 받아 사실려니 얼마나 속이 문드러졌을랑가예. 아리고 쓰린 속을 어디 풀데는 없으실테고 일 끝나는 저녁 되면 약주 잡숫는기 낙이었을 낍미더. 그 속, 저도 다 알아예.
제가 19살에 군에 갔다 아임미꺼. 휴전 중인 상황이었는데 강원도 양구에서 복무했지예. 어느 날 군용차량으로 이동하다가 차가 골짝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나서 허리와 다리에 큰 골절을 입었심미더. 소대장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니 살아난 것만도 다행이었지예. 부산 삼육군 병원으로 실려와서 수술도 받고 오래토록 치료를 받다가 나머지 복무기간을 마치고 제대를 했는데, 골병이 들어서 몸이 성치 못했심미더. 그런 저를 보며 아부지가 얼마나 속상하시고 애가 타셨을지 지도 잘 암미더. 제 불효를 용서해 주이소. 제가 가난보다 더 큰 상처를 드렸으이 아부지가 우찌 견뎠을랑가 싶습미더. 4남매의 맏이인 제가 24살 되던 해에, 상리면 조동부락 출신의 이귀순이와 혼인을 했심미더. 다음 해에 아부지가 돌아가셔서 우리는 반쯤 혼이 빠졌다 아임미꺼. 지금 생각해보모 위암 같은데 옳은 약 한 첩 못 해 드리고, 병원 한번 못 모셔가고 불각시리 저 세상으로 보내드렸네예.

↑↑ 허리와 다리가 아파 제대로 걷지 못하지만 전동차로 온 동네를, 재실을 둘러본다.
ⓒ 고성신문
아부지.
아직 어린 자식들이 눈에 밟혀서 저 세상으로 떠나시는 걸음이 돌띠를 매단 거 맨치로 무거웠지예. 제가 아부지 돌아가시던 그 나이를 지나오면서 속울음을 많이 울었심미더. 가장이 되모 식솔들 등 따숩게 챙기고 배부르게 밥 먹이는기 젤 중한 일 아이던가예. 배를 곯아도 항꾸네 곯고, 수제비나 국시를 삶아도 항꾸네 오순도순 머리 맞대고 묵는기 사람 사는 세상 아임미꺼. 아부지 돌아가시고 동생들 쳐다봄시로 힘을 냈심미더. 제가 상이용사가 되었지만은 손 놓고 있으모 남은 여섯 식구 굶것더라고예. 그래서 머리를 짜냈다 아임미꺼.
그 당시 삼천포장과 사천장에 소가 싸다는 소리를 어디서 들었지예. 하루를 꼬박 걸어서 장에 가서는 발품을 팔아서 싼값에 내 놓은 소를 샀심미더. 집안에 우환이 들었거나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겼거나 초상이 나서 돈을 마련하기 마땅찮으모 소를 끌고 안 나옵디꺼. 그런 집 소는 작정하고 팔러 나온 소보다 소끔(값)이 좀 헐슴미더. 돌아오다가 지치모 상리 처갓댁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오기도 했지예.
한 해끼 섣달 그믐에 그동안 모아놨던 돈을 줌치에 차고 장에 갔다 아임미꺼. 곧 설이 다가오니 집집마다 돈 쓸데가 많아서 소를 팔러 나오는 거를 알고 있었지예. 어떤 아재가 소를 끌고 왔는디, 암만해도 그 소가 새끼를 밴 거 같았어예. 그래서 부르는 값보다 소끔을 더 쳐 주고 몰고 왔더마는 초하룻날 부룩데기를 낳았다 아임미꺼. 세상에나 만상에나 을매나 좋았던지 제가 조상님 계시는 곳으로 저녁 땀에도 절을 하고 밤에도 또 했심미더. 부룩데기는 태반을 뚫고 나오자마자 걸어댕기는기 복덩이 같이 좋았심미더. 제가 어미소한테 콩을 푹푹 삶아서 밀기울 넉넉히 넣어 버무려서는 야밤에도 갖다 바치고, 추울까 싶어서 솜이불도 덮어줬다 아임미꺼. 아무리 소를 상전같이 모신다캐도, 엄동설한에 짚을 엮어 등에 덮어주기는 했지만 사람도 덮기 어려운 솜이불이 가당키나 합디꺼. 그만큼 고맙고 또 고마버서 그랬지예.
그 당시는 황소 한 마리가 논 한 마지기 값이랑 맞뭇심미더. 황소는 힘이 좋아서 달구지도 끌고 질만 잘 들이모 무논일도 척척 했어예. 하루 일당이 사람보다 훨씬 비쌌다 아임미꺼. 송아지를 사 와서 잘 먹여 어미소로 키워서 팔고, 또 송아지를 낳으면 잘 키우기도 하고, 그렇게 살림을 점차 일궜지예.
아부지.
되는 집은 가만있어도 복이 들어온다는 말이 있지예. 정부에서 특별법을 만들었으니 저보고 상이용사 등록을 하라카데예. 군대에서 다친 사람이 증명서를 붙여서 신청을 하면 보상을 해 준다는 기라예. 저는 삼육군 병원의 입원 기록이 남아 있어서 6급을 받았다 아임미꺼. 매달 보상금을 주었고 제 아이들 공부 시키는데도 여러가지 혜택을 받았심미더. 그랬지만 젊어서 다친 다리며 허리가 계속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심미더. 비가 오거나 날이 추우면 온 삭신이 쑤시고 아이고야, 란 말이 절로 나왔어예. 나이가 들면서 몸이 더 나빠졌고 입원하고 수술 받고, 관할인 진주보훈청의 재심을 받아 지금은 4급 판정을 받았심미더. 후유증이 심하고 허리가 꼬부라져서 바로 서서 걸어다니기에 힘이 듭미더. 다행이 전동차가 생겨서 그걸 타고 다니면 훨씬 수월함미더. 세상이 참 좋아진기라예.

↑↑ 재실 지은 그 해, 맏손주(두번째 줄 한복 입은 젊은 부부)가 조상님께 인사 드리러 왔다.
ⓒ 고성신문
아부지.
제가 5남 2녀의 자식을 봤심미더. 그 자식들이 혼인하여 손주를 낳았고 맏손주가 증손까지 안겨줍디더. 아부지가 낳아주신 4남매의 후손들이 다 모이면 30명이 넘슴미더.
고조부, 증조부, 조부님까지 3대째 독신으로 내려왔으니 집안에 자손이 귀하다꼬 조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심미더. 어무이가 시집오셔서 4남매를 낳아 손孫을 늘리셨고, 우짜든지 자손을 더 늘리는 며느리 맞겠다고 상리까지 가셔서 집안 번창하는 댁의 처자를 제 집사람으로 맺어주신데도 다 뜻이 있으셨지예. 그 뜻을 쫓아 제가 7남매를 낳아 길렀으니 잘 했지예?
이 모두가 조상님 음덕이니 기쁨을 아부지께 바칩미더.
그라고예. 제가 자식들 자랑을 좀 더 할람미더. 열심히 살아온께 살림이 불어서 논 마흔다섯 마지기에 밭이 3천 평이나 됩미더. 근동에서 논밭이 좀 많은 편인데 저는 늙었고 일을 몬합미더. 이 논밭을 자식들이 다 짓슴미더. 아들 다섯이 울산, 김해, 마산에서 직장 다니고 사업하며 삽미더. 제 옆에서 농부로 사는 아들은 아무도 없지만, 주말마다 와서 농사일을 다 해주고 갑미더. 봄 되면 모판 만들고, 모내기 하고, 거름 내고 비료 뿌리고, 가을에는 추수도 저거들끼리 다 함미더.
예전에는 낫과 호미로 하던 일을 요새는 콤바인에 트랙터에 경운기, 탈곡기에 건조기에 볕짚을 묶는 기계에 트럭까지 없는기 없습미더. 일 하기 편하라고 80여 평 창고에 이 모든기 다 들어 있심미더.
↑↑ 대목수셨던 아버지 안목에는 부족하겠지만, 좋은 목재 석재 마감재까지 써서 지은 재실 화선재 앞에 서면 가을볕은 하염없다.
ⓒ 고성신문

아부지.
지는예, 주말에 자식들이 와서 왁자지껄 항꾸네 일하고, 항꾸네 밥묵고, 항꾸네 노는거 보믄 논문서 밭문서보다 더 좋은기라예. 아들들이 창고문을 활짝 열고 형은 콤바인 몰고, 동생은 경운기 몰고 뒤따라가는거 보믄 안 먹어도 마음의 배가 태산같이 부름미더. 을매나 우애가 좋고 서로를 잘 챙기고 사이좋게 지내는지 모림미더.
제가 배운 게 부족해서 젊었을때는 사실 기가 좀 죽어서 살았심미더. 그런데 지금은 제가 부러운 기 아무것도 없심미더. 들판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밭에는 콩이 야물어가고(요새는 짐승들 땜에 밭농사 짓기 힘들지만, 농갈라 묵는다 생각하고 웃고 삽미더) 자식들은 모두 건강히 잘 살고, 통장에는 제가 쓸만치 돈도 들어 있습미더.
제가 이 나이 되도록 살아봉께네예, 가방끈 짧은 거, 인물 빠지는 거, 권력이나 명예 못 가진 거, 이런 거는 아무 문제가 아니라예. 암만 부자모 뭐함미꺼. 형제끼리 서로 더 가지겠다고 싸우는거 보모 기가 찹디더. 제가 이 나이에 무슨 땅을 지고 살것슴미꺼, 통장을 끌어안고 살낍미꺼, 이제는 모두 나눠주고 훌훌 털고 가야지예. 그 생각을 진작에 하고 있었습미더.
그래서 몇 년 전에 우리 밭에다가 재실을 지었다 아임미꺼. 목재도 벽돌도 석재도 마감재도 젤로 좋은거 골라서 지었심미더. 대목수 우리 아부지 눈에 차게 지을라꼬 돈도 에북 썼심미더. 제가 얄궂은 거로 재실 지어놓으모 제삿밥 드시러 오시는 아부지 혀를 끌끌 안 찰낍미꺼.
안에도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병풍도 제 눈에 듭미더. 옷장에는 제 한복도 몇 벌 걸려 있지예. 집안 재실은 개인 사용이 어렵지만, 우리 재실은 마치 별장 같심미더. 우리 형제와 그 자손들은 누구라도 와서 편하게 뒹굴다가, 먹고 마시다가, 까불고 떠들다가, 술이 취하모 자고 감미더.
아부지.
전주 최씨, 문성공 후손 안렴사공파 ‘인락’이 사람 구실 해 놓고 아부지 부름 기다림미더. 최씨 가문에 비석 세울 일, 묘소 손볼 일, 체면 차릴 일 있으모 안 빠지고 댕깄심미더. 곳곳마다 제가 참여했단 사실 남겼슴미더. 이제 여한없이 제 할 일 다 한 듯 싶슴미더. 아부지는 솟을대문으로 들어오셔서 후손들의 절을 받으시이소. 조상님들께 후손 늘린 거, 재실 지은 거 고하시고 덕담을 들으시이소. 아부지가 좋으시모 저는 모두 좋심미더. 이거이 모두 아부지가 저희에게 주고 가신 씨앗이며 뿌리임미더.
지난 꿈에 소와 함께 오신 기 선몽인 듯 싶어 마음이 편함미더. 조상님들 재실에 오셨다가 마을까지 둘러보고 후손들 잘 사는거 다 살피고 가셨다고 생각함미더. 제가 언제 아부지 계시는 곳으로 갈지는 모르지만 그 때까지 정신 명료하게 잘 간수하며 살아갈낍미더.
2020년 (음력)팔월 열 엿새날 인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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