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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의 바다는 노동의 마당이었고 지금의 바다는 추억과 그리움의 징검다리네

동해면 큰막개 김윤선(81세)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7월 31일
↑↑ 마당에 나와 바다를 보면, 거기 윤선의 한 평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삶이 풍경이 되고, 그 속의 어느 페이지에는 주인공이었던~
ⓒ 고성신문
내곡리 예쁜 처자 윤선네 부엌방으로 동무들이 모여들었다. 갈방이파리가 바람에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음보 터지는 열 여섯 애기들이었다. 윤선의 혼삿날이 정해졌으니 모두들 마음과 손을 모아 횃대보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색색의 고운 수실은 방물장수 점분 아지매한테 넉넉히 사 두었으니 저마다 수틀을 들고 앉았다. 따로 배운적 없으나 눈썰미 좋은 막둘이가 밑본을 그렸다. 금슬을 상징하는 원앙과 기러기를, 건강과 부귀를 빌며 창포와 목단을, 가르침과 배움을 위해 주황색 감을, 다남多男과 다복多福과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복숭아 그림에 습자지를 대고 빼낀 뒤에 색칠을 했다. 이제 그림에 맞게 십자수를 놓으면 될 터이다. 솜씨가 서툰 처자들은 베갯잇에 꽃을 수놓았고, 솜씨 좋은 사촌 올케가 마무리를 해 줄 참이었다. 옆 집에 사는, 입담 좋은 석이옴마가 첫날밤 이야기를 들려 주기로 한 날이었다. “내사 마, 석이아배가 옷고름을 풀라꼬 땡기오는데 부끄러버 죽은 줄 알았다 아이가.” “그래서예?” “옷고름을 너무 쎄게 쫑차매모 풀기가 에럽지.” “올매나 매야 됩미꺼?” “그기 말로 되나? 살짝 뭉차든지 매매 짜매든지 다 풀린다. 해 봐야 알제.” “그래서 물어본다 아임미꺼.” “처자들아, 가보모 알게 된다. 첨에 에럽지, 몇 밤 지내모 명경알같이 훠언~해 진다.” 석이네의 소곤소곤한 밀담에 귀를 쫑긋 세웠다. 모두들 눈과 손은 수틀 위에서 분주했지만 모든 오감은 귀에 몰려 있었다. 마당엔 교교히 별빛이 내리고 미리내는 하염없이 깊었다.
‘아~ 내게 다가올 첫날 밤은 무슨 빛일까?’ ‘내 낭군님 될 분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시랴?’ 저마다의 기대와 설렘으로 수틀에 얼굴을 묻고 밤을 밝혔다.
↑↑ 갑용과 함께 였던 외국 여행지, 같이 바닷가에서 바지락을 캐고 모내기의 품앗이를 나누던 이웃들 대부분이 세상을 따났다.
ⓒ 고성신문
윤선은 막개로 시집을 왔다. 임진왜란 때 군대를 위한 막사가 있었다하여 지어진 이름의 막개는 반농반어의 작은 포구였다. 시부모님과 8남매의 시누이·시동생들이 기다리는 집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저녁에 삶아 시렁에 얹어둔 소쿠리에서 보리쌀을 두어 됫박 퍼고, 쌀을 한 줌 얹어 솥에 안쳤다. 불쏘시개로 불을 지피고, 끌티를 몇 넣어 밥이 부르륵 끓어오르길 기다렸다. 손바닥으로 비벼 까끌한 솜털을 털어낸 호박잎과, 꼭지를 따 내어 십자로 칼집을 넣은 가지를, 밀가루에 살짝 버무린 풋고추 옆에는 들깨잎을 얹었다. 밥물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잉걸불을 아궁이 앞으로 당겨 된장을 지졌다. 멸치 몇 마리에 고추를 떰벙떰벙 썰고 호박잎 줄기를 잘라 넣은 뚝배기에 쌀뜨물을 부었다. 한소끔 끓고 나면 된장을 두어술 넣으면 될 터였다. 윤선은 장독으로 부엌으로 날마다 바빴다.
장독대 옆에 작은 꽃밭이 있었다. 맨드라미는 닭볏처럼 꼿꼿한 목을 세우고 윤선을 쳐다봤다. 바쁜 걸음을 내딛는 신발코를 보는지, 동무 막둘이가 선물한 앉은뱅이꽃이 수놓아진 앞치마를 보는지 모를 일이었다. 여름내내 장독대를 지키던 봉숭아와 원추리도 까무룩히 몸피를 눕힐즈음 가을이 왔다.
남편 조갑용은 천성이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잠시도 앉아 있지를 못하고 새벽부터 한 밤까지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첫새벽에 일어나 소를 몰고 나가면, 식전에 소꼴을 한 짐 지고 마당에 들어섰다. 그는 언덕에 소를 방목하고는 소가 배를 불리는 동안 논둑을 베었다. 사이사이 논두렁콩을 돌보고, 풀들을 죄다 모아서 지게에 얹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른 아침을 먹고 갑용의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었다. 논을 매고 밭을 갈았다. 해거름녘이면 산에 올라 나무를 했다. 소나무를 귀히 여겨 솔을 치던 시절이라 잡목을 베어야 했다. 굴참나무 졸참나무와 오리나무를 베었고 소나무의 잔 가지를 쳤다. 삭정이와 마른 끌티(그루터기)를 포대에 담았다. 갈비를 긁었고 솔방울을 주웠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윤선이 동행했다.
소처럼 묵묵하고, 개미처럼 부지런한 갑용을 따라 다니며 윤선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몸은 날렵해졌다. 부창부수夫唱婦隨의 화음은 동네의 모범이 되었다. 다들 둘을 칭찬하며 배우려 했으나, 아무도 갑용과 윤선의 날랜 움직임을 따르지 못했다.
갑용은 어장에 대한 꿈을 풀어냈다. 부부가 힘을 합쳐 열심히 일했고 품삯이 모였다. 그 돈으로 배를 마련하여 정치망 허가를 받았다. 거제의 칠천도 근처에 ‘칠월 어장 자리’를 어렵게 마련한 것이다.
어업은 새벽부터 시작된다. 조력潮力은 이른 아침에 바닷물을 평정시키는 특징이 있었다. 동틀무렵이 가장 잔잔했다. 갑용은 선착장에 모인 일꾼들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그물을 당기면 물고기가 은비늘을 드러내며 반짝였다. 봄이면 공멸치가 많이 잡혔다. 갑판 아래 물칸에 가득 채운 공멸을 선착장 가까운 곳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삶았다. 보일러 관을 연결하여 기름이 흘러내리면 송풍기로 불길을 일으키는 방식이었다. 쎈 불길에 재빨리 삶아 낼 것. 그물에서 걷어내는 즉시 육지까지의 운송이 공멸의 신선도를 결정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했다. 윤선은 갑용이 잡아온 공멸을 잘 삶아내고, 잘 말리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펄펄 끓는 가마솥에서 삶긴 공멸을, 빈 채반을 넣어 걷었다. 채반을 담가 알맞은 속도로 휘저어야 거기에 공멸이 균형지게 얹히는 것, 경험과 노련함과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윤선은 데이지 않으면서도 채반 걷기를 아주 잘 했다. 말리고 포장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 수협에 내다 팔았다.
차곡차곡 돈을 모아 산도, 땅도 샀다. 고향인 내곡과 한내에도 논을 샀다. 재산이 불어나는 동안, 시누이들과 시동생은 제각각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뤄 집을 떠났다. 중풍을 앓으시던 시부모님도 오랜 병구완을 받으신 뒤에 돌아가셨다. 아이들은 오뉴월 옥수수대처럼 자랐다. 아이들 학업을 위해 도시로 나가고 싶었지만 갑용씨의 부지런함은 시골을 떠날 수 없었다. 살아오는 동안 윤선 또한 근면 성실함이 몸에 배였다. 가만히 앉아 몸을 쉬게 하거나 게으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갑용이 그물을 깁거나 뭍에서의 일을 하는 동안 윤선은 갯가로 달려갔다. 바지락 밭에 물이 빠지면 밀물이 차 오를때까지 호미질을 했다. 그 바지락을 잘 건사했다가 장날이면 배를 탔고, 당목에 내려서는 머리에 이고 배둔까지 걸어갔다. 머리가 벗겨지는 듯 아파도 신이 났다. 돈을 마련하여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식구들을 건사하고, 저축하여 땅을 마련하고, 번듯한 새 집을 짓기 위해 동분 서주했다. 밤에 호롱불을 켜고 마늘을 심었고, 낮에는 바다로 산으로 정신없이 다니던 시절이었다. 일도 살림도 재미있었다. 나날이 새롭고 날마다 흥이 솟아 올라 힘든 줄 몰랐다.
↑↑ 며느리가 엄마라 부르며 잘 따랐다. 둘은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사랑을 나눈다.
ⓒ 고성신문
↑↑ 손주 생일 '할머니 촛불 꺼 주세요!'라던 이 아기가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동네 아가들이 모여 케이크를 먹고 까르르 웃음보 터트리던 날들도 모두 세월 속으로 흘러갔다.
ⓒ 고성신문
아들이 청년이 되어 혼인을 하게 되었다. 동네 어른의 조카를 소개받았는데 서로의 집안과 내력을 잘 알고 있으니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들만 낳은 윤선은 며느리를 맞게 되니 참 좋았다. 딸처럼 여겼고 뭐든지 좋은 것은 며느리 몫으로 주었다. 조실부모한 며느리 또한 윤선을 옴마로 대했다. 살아오는 동안, 부엌을 떠나지 못했던 윤선의 일을 며느리가 맡아 주었다. ‘시어미 며느리 낳는다고 했던가’ 며느리 또한 부지런하고, 입 없고, 남편을 잘 받들었기에 나무랄 데 없었다. 떡두꺼비 같은 손주가 둘이나 태어났고 둘째와 셋째 며느리도 연이어 맞았다. 가족이 늘었고, 가족 모임이 잦았고, 집안에 웃음이 퍼졌다.
풀잎에 맺히는 새벽 이슬이 한낮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저녁 이슬로 돌아오는 세월 속에서 윤선은 할머니가 된 것이다.
↑↑ 갑용과 윤선의 다정했던 한 때, 케이블카라는 게 생겼다고 같이 나들이를 했지만 평생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몇 없다.
ⓒ 고성신문
윤선의 나이 예순 한 살, 환갑 되던 해에 갑용이 세상을 떠났다. 45년을 한 몸처럼 살던 남편을 묻고 돌아와 오래도록 앓았다. 세상의 절반이, 아니 윤선의 세상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함께 살고 있는 며느리와 아들이 기둥이 되었다. 손주 민호와 승호가 학교에서 돌아와 ‘할머니 다녀왔습니다.’ 라고 내미는 상장을 보며, 한 가족의 삶이 자신의 세대에서 아들에게로 다시 손주에게로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자지러지게 뜨거운 볕을 받으며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여름을 지난 것 같은 자신의 삶이었다. 밭둑에 심은 동부를 따면 꼬투리 속에 콩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나란하다. 가운데 빈 자리가 있을 수도, 속이 꽉 차서 야물 수도 있었다. 그 옆의 호박줄기는 또 어떤가? 잎만 무성하여 제대로 호박을 키우지 못하는 줄기도 있었고, 나직하게 고만고만한 잎을 매단 줄기에 실한 호박이 주렁주렁 열리기도 했다. 대체로 잎이 무성하면 씨앗이 부실했다. 참깨와 들깨가 특히 그랬다. 사람의 삶도 속을 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겉과 속이 다른 결과들을 맞으며 흘러갔다.
앞산에 자귀꽃이 피었다. 윤선은 분홍 꽃타래를 송이송이 피워올리는 그 꽃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떠난 영감이 좋아하던 꽃이다. 이 꽃 피면 장마 온다고 말릴거 잘 챙기라던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하다. 소가 잘 먹는다하여 소여물꽃이라며, 한 짐 베어 와서 처마 밑에 쏟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소는 뒷전이고 윤선이 더 좋아서 장독대의 자그마한 단지에 가득 꽂아두고 ‘이뿌다, 이뿌다’ 했었다. 밤이 되면 이파리들이 마주보고 딱 붙어서 잠드는게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자꾸 쳐다보았다. 이렇게 예쁜 꽃, 우리 집에도 한 그루 있었으면 좋겠다 했더니 ‘산에 가면 천지삐까린데 뭣하러 집에까지 심노!’ 하시던 영감 목소리가 귓전에 자글자글 하다. 가신 그 나라에도 자귀꽃이 필까?
2007년, 막개에 삼강M&T(주)가 ‘고성 조선산업특구 지정고시’에 의해 공장을 지었다. 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소음과 방진으로 마을 사람들이 힘들었다. 이주 합의가 이루어져 이사한지 5년이 되었다. 60년을 살아온 집을 떠나려니 마음이 바다로 떠도는 것 같았지만, 아들이 큰막개에 땅을 마련하여 아담한 새 집을 지었다. 서로 알고 지내던 곳으로, 막개의 이웃들도 같이 이사 왔으니 서로 벗하여 살고 있다. 윤선은 집에서 아침을 먹고는 노인정에 간다. 이야기 꽃을 피우기도 하고 맛난 것을 해 먹기도 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 누구네가 제사를 모시거나, 생일을 맞으면 그 음식을 노인정에 가지고 온다. 마주보며 왁자하게 비빔밥을 비비거나 미더덕을 잔뜩 넣어 된장국을 끓인다. 커피를 마시고 과일을 깎아 먹으며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 8시쯤에 아들은 어김없이 전화를 한다.
“어무이, 별일 없지예? 저녁은 드시고, 약은 잡수셨어예? 내일 병원에 예약했으니 뫼시러 갈테니 편히 주무시이소.” 손주들 학교와 며느리 직장으로 마산에 집을 마련한 아들은 날마다 안부를 물어온다. 윤선이 허리가 심하게 아파 수술과 치료를 받게 된 뒤로, 간섭과 챙김이 더욱 잦아졌다. 며느리도 발걸음이 잦다. “엄마,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눕거나 앉아 계세요. 필요하신거 있으면 꼭 말씀 하시고요. 혼자 거동이 어려우시면 저희 집에 오세요. 언제든 엄마 뫼실게요. 저는 엄마랑 사는게 좋아요.” 윤선을 엄마로 대해주던 며느리는 여전히 살갑다. 그런 며느리도 이제 곧 새 식구를 맞게 될 것이다. 살아 생전 증손을 볼 수 있을까?
윤선은 마당에 나와 바다를 본다. 활처럼 휜 모습이라 하여 ‘활섬’이라는데 주민들은 그냥 ‘하섬’으로 부른다. 바다와 섬, 바다와 마을, 바다와 우리 집, 바다를 보는 윤선, 그들은 모두 하나의 풍경이고 그림이다. 아니 윤선이 살아온 역사이며 삶의 징검다리이다. 그 징검다리를 부지런히 건너왔다. 아쉬움과 회한은 모두 묻고 좋은 기억만 간직하고 싶다. 바다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 샛바람이다. 이제 물결이 출렁일 시간이다. 배들은 모두 마을로 들어오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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