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내겐 부처님” 청련암 승욱 스님 입적
홀로 된 아이들 거두는 일을 불사로 여겨
18세에 출가, 1978년 청련암과 인연 맺어
진주서 만난 남매 인연, 아이들과 함께 생활
아이들과 여행하며 소통, 2002년 보리수동산 설립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9년 09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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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없이 중노릇하는 내가 남이 만들어 놓은 생명들, 이렇게 예쁜 내 새끼들 잘 거두는 것도 소중한 인재불사 아닌가.”옥천사 청련암 회주 승욱 스님(보리수동산 대표이사)이 지난 2일 주석처인 청련암에서 입적했다. 법랍 48년, 세수 70세.승욱 스님의 영결식이 지난 4일 300여 명의 사부대중이 모인 가운데 옥천사 자방루에서 엄수됐다. 영결식에서는 5타의 명종에 이어 삼귀의와 반야심경독송, 도호 스님의 영결법요, 남일 스님의 행장소개, 도선사 주지인 도서 스님과 신도 대표인 강성불화 청련암 정토만일봉사회장의 조사, 발인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조계종 법계위원장 무관 스님의 법어와 쌍계사 회주 영담 스님의 추도사, 상좌인 옥천사 주지 원각 스님의 인사가 이어졌다.무관 스님은 “마음을 거두어서 현재 내가 생각하는 그 인연들을 다 거두어 나고 죽는다”면서 “죽은 사람에 대해 한탄하는 마음을 가지면 극락세계 왕생하고 갔다 왔다 하는 일이 그렇게 큰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옥천사 주지 원각 스님은 “승욱 스님은 출가수행자의 권위만 내세우지 않고 늘 인정을 베풀며 따뜻한 미소로 모두를 대한 천수관음 같았다”며 “스님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는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부대중께 감사하다”고 인사했다.영결식 후 승욱 스님의 법구는 연화산 기슭에 마련된 다비장으로 운구돼 사부대중의 애도 속에 다비식이 진행됐다. 18세에 옥천사 도현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승욱 스님은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쌍계사 고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계했다. 1978년 옥천사 청련암 감원 소임을 맡았을 당시 진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배를 곯던 남매를 만난 후 스님은 아이들을 한둘씩 절집으로 데려와 품기 시작했다. 스님은 생전 ‘부처님께서 아이들 돌보는 일을 수행 삼으라고 하시는구나’ 여기며 세상에 혼자 남은 아이들을 부처님 모시듯 돌보며 정진해 ‘천진불의 천수관음’으로 불렸다. 승욱 스님은 청련암에서 도량 중창과 기도수행, 지역사회 포교는 물론 1997년에는 청련암 정토만일봉사회를 창립해 수행과 전법, 사회복지의 기틀을 마련했다.스님은 생전 “아이들이 내겐 부처님이다. 홀로된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게 내겐 관세음보살이며 기도수행”이라며 소외받고 고통받는 아이들의 아버지를 자처했다. 가슴으로 낳은 아이들이 하나둘 늘어갈수록 시줏돈만으로는 아이들을 거두기 힘들어졌다. 스님은 장례식장에서 염불까지 해가며 아이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 승욱 스님은 아이들에게 고운 마음을 지어 좋은 불종자로 키워내는 일도 불사라 여겼다. 가출한 아이들을 찾아 헤매기도 부지기수였다. 가출한 아이를 찾아 고성으로 돌아온 후 스님은 매년 아이들과 함께 백두대간을 종주하거나 동해안을 일주하고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세상에 마음을 붙이게 했다.아이들이 산속 암자에서 생활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스님은 2002년 1월 1일 산속 절집을 떠나 좌련분교에 둥지를 틀고 보리수동산으로 이름 붙였다. 아이들이 바른 마음으로 자라길 바라며 사물놀이도 가르쳤다. 승욱 스님은 1990년 설립된 감로심장회 이사장을 맡으며 심장병을 앓는 아이들의 수술을 지원했다. 생전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부모와 같은 사랑을 못줘도 삶에 대한 희망은 주리라”고 말해온 승욱 스님의 추모일정은 오는 8일 오전 10시 옥천사를 시작으로 15일 청련암, 22일 청련암, 29일 옥천사, 다음달 5일 보현암 약사전, 13일 남산 보광사를 거쳐 10월 20일 옥천사에서 49재가 진행된다. |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9년 09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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