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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남외경의 사람 사는 이야기

3대가 살아온 100년의 삶 ‘독립운동 애국지사, 농촌운동가, 순교자’

심진표(대가면 연지리, 45년생, 76세)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01월 08일
↑↑ 일본 ‘간조농학교’ 시절의 심재인 애국지사. 뒷줄 왼쪽 첫번째
ⓒ 고성신문
↑↑ 일본 ‘간조농학교’ 시절의 심재인 애국지사
ⓒ 고성신문
# 아버지 심재인(1918년 출생, 1950년 작고) 애국지사의 삶
1918년, 나는 대가면 연지리 심부잣집 맏이로 태어났소.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학문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부친의 바람대로 소학교를 거쳐 고성농업실수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했소. 이구희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애국애민 정신을 심어주시며 왜 공부하고 배워야 하는지를 깊이 새겨주셨소.
1935년, 내 나이 17살 되어 학생 10명이 선생님 뜻을 좇아 일본으로 유학을 갔소. 가문의 代를 걱정했던 부모님의 권유로 떠나기 전, 한 살 많은 영현면 처자와 혼인을 했소. 자식이 떠난 빈자리의 서운함을 며느리를 통하여 마음의 안위를 얻으려 하셨던가 보오.
1938년, 일본 간조농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소. 인류애와 박애정신에 눈을 떴소.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고 귀한 존재다. 한국인들을 ‘조센징’ 이라 부르며 차별대우 하는 일본인들을 보며 강제로 점령당한 조선의 운명에 치욕과 울분을 느꼈소. 그런 마음은 유학간 학생들 누구나가 느끼는 공통심리였소. 고성에서 같이 간 친구들이 저마다 다른 학교로 배정받은 이유를 처음엔 몰랐지만 한 사람씩 떼어 놓으려는 기우(杞憂)가 있었던갑소. 혼자는 약하지만 모이면 강하다는 원리가 있잖소. 그렇다고 책만 파고 공부만 하고 있을 우리가 아니었소. 일본은 세계사의 흐름을 좌지우지 하려는 욕심으로 우리나라를 강점했고 문화말살에 민족혼을 빼앗을 온갖 수단을 강구하는 중이었으니 우리 눈에도 그 모든 게 다 읽혔소.
우리는 분기탱천하여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다짐했소.
1940년, 고성에서 같이 떠났던 친구들이 주축이 되어 재일학생단을 조직하여 독립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했소. 나라가 힘이 없으면 그 고통은 오롯이 백성의 몫이 되는 것이고 나라의 힘을 키우는 것 또한 백성이 앞장서 해야 하는 책무이자 임무인 것이오.
스무살이 갓 넘은 학생들은 의분에 차서 일본내에서 조직을 키우고 한국의 독립군들과 소통하며 구체적인 독립활동을 하나씩 도모하고 있었소. 일본순사들과 친일파들이 우리 같은 사람을 찾아내어 처단하려고 눈에 불을 켰소.
1942년. 일본열도는 태평양 전쟁의 화마에 휩싸였고 경북 예천경찰서에서 온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혀 한국으로 소환되었소. 내게 씌워진 죄목은 ‘재일학생단독립운동 수괴’였소.
1943년. 참혹한 고문으로 초죽음이 된 미결수 기간을 거쳐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육군형법 위반 혐의로 학생 신분으로는 무거운 4년형을 언도받았소. 고문과 기아로 참혹(慘酷)해진 내 몸은 죽음의 문턱에 닿아 대구형무소 측에서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통보를 했고 아내와 동생이 달려왔었소.
1944년.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고성으로 돌아오기까지 몇 군데의 의원에 들러 수액을 맞고 응급처방을 받아야 했소. 고향 땅에 돌아와 물을 마시고 공기를 들이키니 10여 년 타국살이와 형무소의 모진 고초들이 피눈물로 흘러내려 씻김 당하는 것 같았소. 시부모님 모시고 종부(宗婦)의 길을 묵묵히 걷던 아내의 얼굴을 비로소 마주보게 되었소.
1945년. 꿈에도 그리던 대한독립을 맞았고, 해방둥이 큰아들도 낳았소. 여전히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수구(守舊) 다툼으로 어지러웠소. 극심한 혼란 속에 좌·우 갈등은 첨예하게 대립 했고, 나는 민족주의자의 길을 택했소. 뜻을 같이 하는 지인들과 방향을 설정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 농민들 삶의 질을 돋움하고 의식의 진일보(進一步)를 위한 계몽운동에 앞장 서는 나를, 경찰에서는 사회주의자로 몰았소.
1948년,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프락치에게 쫓기는 일이 일상이었던 우리는 경찰에 맞서기보다 피하게 되었소. 어느 한 때의 특별한 경험은 살아가는 내내 영향을 끼치기 마련인 거요. 피하면 뒤쫓고, 강자의 원리를 적용하면 피하는 자는 죄인이 되는 것이잖소. 경찰에게 잡혀 마산형무소에서 다시 옥살이를 하게 되었소. 면회 온 아내가 출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 준 말이 있소. “둘째도 사내놈이 태어났다니 나는 이제 죽어도 괜찮겠구먼. 그 놈 이름은 편할 일(逸), 백성 민(民)으로 지으시게.”
1950년, 형무소 안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소. 경찰에서는 민족주의자(그들은 사회주의자라 불렀다)들을 처치할 방법에 골몰했소. 형무소 문이 열리기라도 하면 제일 먼저 곤욕을 치를 상대는 명약관화(明若觀火)였기 때문이오. 경찰들은 지역마다 다른 방법으로 수감자들을 처리하기로 했답디다. 내륙에서는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고, 해안에서는 오라를 묶은 끈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바다로 내몹디다. 나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했소.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독립유공) 제97호 애국장을 받았소. 1993년, 독립운동가로 국가유공자증을 받아 두 아들과 딸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남기는 소임을 다했소.

↑↑ 아들의 순교 뒤 13권의 일기를 썼고, 부친의 흔적과 각종 자료들이 거실에 그득하다. 독립애국지사의 생가 보존 차원에서 새 집을 짓지도 못하고 오래된 한옥 마루에 앉아 부친과 아들을 생각하는 심진표 님
ⓒ 고성신문
# 나, 심진표(45년생, 76세) 농촌운동가의 삶
나는, 아버지를 뵌 기억이 없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외부 활동을 하신 아버지는 가끔 나를 보셨다고 한다. 젖먹이로 꼬물대는 아들, 기저귀를 차고 아장아장 걷는 아들, 가끔 나를 빤히 쳐다보시는 낯선 어른(아버지)께 낯을 가리는 아들을 보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평화로운 세상이 오고 좋은 날이 되면, 우리 식구들 모여 웃음띤 얼굴 마주하며 살자.’
‘한 가정의 가장 노릇은 소홀해도 대의명분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는 아비를 이해할 날 있을 게다.’
‘사나이로 태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 수 있다면 이 또한 내게 주어진 사명이란다.’
이런 언약과 말씀의 눈길을 주셨을까? 내가 만난 아버지는 사진속의 모습이셨다. 까까머리에 교복을 입은 아버지, 형무소에서 출옥하실 때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모습이셨다.
동생이 태어날 때 이미 형무소에 계시던 아버지는 흔적도 없이 우리 가족의 곁을 떠나셨다. 그 뒤 ‘우리 아버지 심재인’은 금기어가 되었다.
형무소에 계신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조부님은 그 많은 전답을 거의 팔았다. 보리밥은커녕 밥솥에 얹어 찐 고구마 반쪽도 마음껏 못 먹는 배고픔과 곤궁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다행히 숙부님이 함께 사시며 농사를 짓고, 우리 형제와 사촌들을 돌보셨다. 한때는 누님 식구까지 17명이 한 집에 기거하며 살았다. 아버지 제사를 모시면서도 언제, 어떻게, 왜,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모든 것은 불문곡절 (不問曲折)이었다.
나는 25살 때부터 32년 동안 새마을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근면, 자조, 협동의 기본 정신을 전파하며 무보수로 일했다. 어렸을 때부터 없이 사는 데에 이골이 났고 내 이웃들이 오순도순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오래전에 키워온 탓이기도 했다. 전국 새마을연수원을 돌며 성공 사례를 발표했고, 유럽 선진지 시찰단(전국 5명)에 피선되어 비행기도 탔다. 새마을운동을 하며 청춘을 바쳤지만 그 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가난에서 풍요로, 無知에서 知覺으로,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개인에서 단체로, 많은 변화를 직접 목격했다. 온 국민이 잘 사는 계기가 된, 떳떳하고 소신있고 명분있는 국민운동이라 자부한다.
열심히 살아오면서 이웃과 사회를 위해 일하느라 신명을 다했다. 농협조합장 8년, 고성군발전위원 7년, 교육발전위원 17년, 경남도 의회의원 3년, 문화원 활동 11년으로 내 삶의 발자국은 어느 하나 허투루 소홀히 떼지 않았다.
내가 성인이 된 뒤에 숙부님을 통하여 ‘아버지의 삶’을 듣게 되었다. 아리고 쓰라렸다. 우리 집안의 생인손이셨던 아버지는 드러내 자랑해야하는 애국자요, 독립운동가셨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애국정신이 인정받고 조명받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 훈장 속에는 내 어머니와 숙부님 인고의 세월이 갇혀있다. 또한 우리 형제들이 겪은 가난과 서러움과 외로움의 날들이 모두 담겨있다. 훈장을 받은 날, 나는 목놓아 울었다. 45살의 중년이 되어 비로소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을 증거하는, 살아있는 증인이 된 것이다.
청송심씨 안효공파 소종 9대 종손 진표는, 독립운동가의 생가를 지켜야하는 맏이의 임무를 더 크게 더 깊이 짊어지게 되었다. 역사에 지표(指標)가 되는 중요한 궤적(軌跡)을 책무로 짊어지게 되었으니 내 삶은 참으로 무겁다. 우리 집 앞에는 ‘애국지사 심재인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여느 집에 걸린 보통의 명패가 아닌, 애국지사 자녀와 손주들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 앞에 서면 저절로 숙연해진다. 우리 형제와 자손들은 얼마나 더 오래 아버지의 함자를 짊어지고 살아야 할까? 어질고 정직하고 착하고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애국지사의 존엄을 이어받아 그 분의 삶을 본받아 하는가.
2007년, 단장지애(斷腸之哀)의 한(恨). 29살 아들을 머나먼 타국에서 참혹하게 잃었다.
부정(父情)을 모르고 살아온 내 삶의 가뭄이 깊어 아들에게 사랑을 넘치도록 주고 싶었건만, 아들은 아비를 배신하고 먼저 할아버지 곁으로 갔다. 아들을 생각하면 내 가슴엔 비수가 꽂히고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이 난도질한다. 그래도 우리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내일을 이야기 한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그들 몫의 웃음과 기쁨과 행복이 존재하니까, 그 속에 담긴 눈물과 슬픔과 아픔까지 모두 합하여.
인터뷰 하러 온, 차마 끝말을 잇지 못하는 작가의 위로를 여기 남긴다.
“부친과 아드님 단명(短命)의 나머지를 모두 받아서, 남은 가족들은 오래오래 건강히 명운(命運)을 이어가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보냅니다.”

↑↑ 30세에 순교당한 심성민 씨. 조부와 부친을 닮아 이목구비 뚜렷하고 눈길이 깊다.
ⓒ 고성신문
# 아들, 심성민(1978년생) 순교자의 삶
내 기억 속, 우리 집안 분위기는 근엄하고 진지했으며 예의범절이 깍듯하고 철두철미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 어르신을 만나면 공손하게 인사드리고 예를 다했습니다. 학업에 집중했고, 학교 생활에 모범이 되고, 친구들과 싸우거나 욕설을 하는 행위는 우리 가족 사전에 없었습니다.
명절이 되면 서른 명이 넘는 제관들이 모여 엄숙한 분위기에서 제사를 모셨습니다. 아버지와 숙부님은 심씨 가문의 명예를 모두 짊어지신 듯 진중하셨고, 어머니는 종부의 자세로 제사 준비에 여념이 없으셨습니다.
제게는 눈 먼 고모님이 계셨는데 우리 집 대청마루에 앉아 이 모든 분위기와 상황을 보시며 어른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고모님은 명민하고 다정하셨기에 제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를 제일 먼저 들으시고는 반겨주셨습니다.
어머니는 늘 바쁘셨습니다. 대식구의 살림을 책임지고 밭이며 시장이며 아버지의 부름을 쫓아 마을회관을 문턱 닿도록 드나들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면 고모님이 저를 반겨주셨고 간식을 챙겨주셨고 군불을 지펴주셨습니다.
저는 진주고등학교 재학하며 열렬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낮은 곳에 임하는 자세로 불쌍하고 어려운 이웃의 친구가 되고 지팡이가 되려는 교리에 깊이 심취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샘물교회에 추진하는 사역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내전으로 피폐해지고 어려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선교 활동이 제게 주어진 임무였지요. 저는 평화와 사랑의 실천에 진심을 담았습니다. 그 곳에는 제 어린 날의 등불같은, 제 고모님 닮은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온 힘을 다해 그들과 함께하며 목회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저는 탈레반에 잡혔습니다. 그들은 국제적인 이슈몰이가 필요했고, 전 세계적인 주목을 원했고, 획득하려는 목표가 있었고, 마땅한 대상을 구하고 있었는데, 제가 걸려든 것입니다. 평화와 인류애와 생명을 존중하는 많은 단체와 대한민국의 외교력이 총동원 되었지만 탈레반은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제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저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목숨을 잃었지만 서울의대에 기증한 시신으로 7명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제 장기를 누군가의 몸에 이식하여, 그들의 생명이 되고 빛이 되고 숨이 되고 시간이 되고 역사가 되어 살아남았습니다.
제 순교를 기념하여 샘물교회는 장애인을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시력을 잃은 제 고모님, 장애인으로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인간의 존엄을 저당 잡힌 고모님의 삶 위에 제 생을 피륙으로 바칩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의 소망을 씨실로 엮고 비장애인의 사랑과 관심을 날실로 엮은 견고한 피륙이 세세면면 이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제 부모님의 통한(痛恨)에 석고대죄 드립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안고, 애국지사 할아버지의 명망을 등짐으로 지고, 남은 생을 살아가실 제 부모님이 부디 건강하시길 빕니다. 상실의 아픔일랑 세월이 모두 거두어가고 남은 생애의 시간들은 부디 평화와 기도의 반석 위에 건강으로 강녕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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