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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남외경의 사람 사는 이야기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 한 보따리 풀어 놓고 유월 땡볕과 푸른 나뭇잎을 아흔아홉 번째 봅미더 ~

동해면 덕곡 출신 황제연(1922년생 99세)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6월 26일
↑↑ 손주가 특별히 주문한 의자에 며느리 김말란과 다정히 앉았다. 해바라기 피고 옥수수가 익는 진전면 이명리
ⓒ 고성신문
큰 며늘아,
내는 니 없으모 몬 산다.
하루도 더 몬 살고, 한 시간도 더 몬 산다.
니가 아니면 여기가 내 집인지, 남의 집인지,
내 이름이 뭔지, 아침인지 밤인지 암것도 모린다.
그라이 니는 내 떠날 때까지 내 옆에 꼭 붙어 있어라.
니는 내 맘 알제?
내가 아무 말 안해도 알고 입 닫고 있어도 알제?
그래, 내 장손 홍표는 언제 온다 카더노?
아아레 왔다 갔다꼬? 그래도 보고 집지.
왼종일 보고 있어도 좋기만 하제.
싫증 안 나는기 자식 목소리고 손주 얼굴이더라.
내가 요로코롬 오래 살아서 보고 또 봐도 그립지.

며늘아,
내는 동해면 전도에서 태어나 택호는 내산댁이다.
그 시절 우찌 그리 가난하고 형제들은 많았을꼬?
9남매의 장녀로 태어났으니 말 안해도 알것제?
쌔빠지게 일만 했다.
낮에는 밭 매고, 논둑 베고, 갯가에서 개발하고, 빨래하고,
보리쌀 삶고, 소죽 끓이고, 다듬이질 하고, 나무하고
밤에는 삼베 짜고, 새끼 꼬고, 가마니 짜고
일도 일도 우찌 그리 많이 했을꼬?

야야,
내는 글도 모린다. 내 여동생하고 둘은 일자 무식이고
그 밑으로는 야학에 다님서 글은 익혔다.
내는 평생 살아옴서 기억력 하나로 버텼다.
모든 기 내 머릿속에 다 있는 기라.
제삿 날, 생일 날, 줄 돈, 받을 돈,
바다 물 때, 나락 심을 때, 마늘 심을 때,
총기라도 있어야 남들한테 기 안 죽제.
그란데 요새는 금방 이자뿌네. 머릿속이 멀겋다.
그래도 니 이름, 우리 손주 얼굴은 훤~하다.
내가 젤로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인께 안 이자뿐다.

↑↑ 아흔아홉 생신 날, 4대가 함께 어울렸다. 왕할매 살아온 나날이 주름살로 남아 세월을 증거하시네
ⓒ 고성신문
이 사람아,
내 열여덟에 일본 델고 간다는 말만 믿고 시집을 갔제.
사흘 만에 신랑 혼자 달랑 일본으로 가삐데.
며느리 예뻐하시고 끔찍이 돌봐주시던 시아부지도
1년 만에 훌훌 세상을 떠나시데.
시동생 다섯에 음전한 시모님 모시고 악착같이 일했제.
먹고 살아야 했으니 오만떼만 일 다 했제.
덩치도 있고 손이 빨라서 넘들이 삼베 1필 짤 때
내는 1필 반을 짰어야. 많이 불려 다녔제.
집에서는 멀건 죽도 한 숟갈 제대로 못 먹는데
일 가면 돈 주지, 밥 주지, 벌어와서 식구들 먹여 살렸제.
7년 지나니 남편이 돌아왔는데 빈손이데.
머리에 든 것은 많아서 책은 짜드리 읽어샀는데
일 하고 돈 버는 재주는 아주 꽝이었어야.

나는 시동생들 손 맞잡고 뼈가 부러지게 농사 지었어.
그런데 농사가 어디 돈이 되던가?
둘째를 들쳐 입고 장사길에 나섰던기라.
나룻배 타고 소포포구에 가면 부산 가는 배가 있었제.
등에 둘째를 업고, 머리에 보리쌀을 이고
동네에서 달걀 한 꾸러미 10원에 받아와서 양손에 들고
국제시장에 내다 팔고, 올 때는 돈 될만한 것 가져왔제.
동동구리무, 입술연지, 스카프, 반짇고리, 가위, 손톱깎이...
제법 장사 재미를 알아가는데 어떤 남정네가 이카데.
‘고생 그만 하고 내캉 삽시더! 아들도 잘 키워 줄끼요’
그 길로 부산 장삿길 접었어야.
내는 맘에 없어도 외간 남정네한테 그런 소리 듣고 더는 몬하제.
부산에서 장사 계속 했으모 돈 많이 벌었을거로.
사는 게 우찌 내 맘대로 되던가?
팔자도 있고, 운명도 있고, 인연도 있는 게지.
부산에 자리 잡았으모 니 같은 며느리 우찌 만나노?
내는 니 만난 게 젤로 잘한 일이라카이.
내한테 떡뚜꺼비 같은, 보약같은, 세상에 둘도 없는
손주들을 낳아준 어멈 아인가베.

↑↑ 사람 사는 집에는 아아들 소리가 나야제. 제비새끼처럼 조잘댐시로 웃고 떠들고 맛난걸 무야제.
ⓒ 고성신문
한국에 둘도 없는 며늘아,
시에미 며느리 낳는다꼬 니는 우찌 그리 내를 닮았노?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고생 모르고 살다가
아부지 눈 감기 전에 좋은 데 시집 보낸다고 인연이 되었제.
내는, 마음 먹으면 꼭 해 내야 되고, 칼 같은 성질에
손과 몸 재빠르고 억척같고 개미처럼 일하는 시에미
너는 말없이 고분고분 잘 따라주고
여간해서는 성에 차지 않는 내 성질까지 맞춰주고
시댁의 어른들 두루두루 잘 챙겨드리고
올바르게 부지런히 사려깊게 살아주었구나.
니가 복덩이라 시집 오고나서 살림이 붙었구나.

우리가 참외, 토마토, 포도 온갖 농사를 짓고
바지락, 홍합, 굴 까서 마산에 내다 팔고
나는 또 사이사이 장거리 다듬어 시장에 나가고
억척같이 일해서 논도 사고 새 집도 짓고
살림도 불리고 등도 따뜻하게 사네.
내 뜻 잘 좇아 묵묵히 살림 살아준 자네 덕분이네.
영특하고 너그럽고 예의 범절 바른 자네 공이네.

세상에 둘도 없는 내 며늘아,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하나 둘 일구고 산다꼬
니도 내도 참 욕봤다. 우리 둘 애 많이 쓰고 살았다.
내는 뒤숭시러븐 남편 만나 악쓰듯이 살았는데
그 영감이 철학가이고 인문학자라 쿠네.
‘숲이 깊어야 범을 만난다.’
‘큰 사람이 되려면 먼저 준비가 되어야 한다.’
‘사자는 고양이와 싸우지 않는다.’
‘니가 어떤 인간이 될지 자세를 바로잡고 살아라.’
‘먼저 인사하고, 먼저 베풀어라.’
어릴 때부터 할배가 이렇게 가르쳤다고 좋았다 카네.
맏손주 끼고 자면서 책 읽는 걸 몸으로 보였다 카네.
그 말씀들이 지한테 이정표가 되었다 카네.
그라고 보믄 사는게 참 웃기고 재밌는기라.
내는 식구들 먹여 살리고 살림 늘리는데 재미 붙이고
영감은 짚으로 새끼나 꼬았음서 손주한테 존경 받네.
손주한테 그 말 들으니 내를 고생시킨거 다 용서가 되네.

↑↑ 내 생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이 둘이다. 먼저 간 아들은 생각도 안 나지만 아직도 내 손 잡아주는 며느리와 맏손주
ⓒ 고성신문
딸보다 정 깊은 내 며늘아,
내 장남 전점도 암말없이 베트남 갈 때 애 태운거
둘째 아들 20년 전에 암으로 먼저 보낸거
대학까지 공부시킨 총명한 셋째 아들 또 보낸거
내 가슴에 송곳이 되어 박혔제.
부모가 자식 대신 그 길 갈 수 있으면 말해 뭐할라꼬?
올 때는 순서로 와도 갈 때는 지 맘대로 가는 그 길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니를 욕보이제?
그란데 와 큰손자는 자꾸자꾸 내를 붙잡는고?
할매가 옆에 있어서 좋다고 자꾸 치대는고?

↑↑ 대문 앞에 앉아서 동구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손주를 기다리신다. 젤루 사랑하는 며느리와 그의 아들을 맞을 때면 99년 묵힌 사랑이 쏟아진다.
ⓒ 고성신문
세상에 하나뿐인 내 며느리 말란아,
보약같은 내 손주가 주문 해서 만들어준 의자에 앉아
대문가에서 당산나무를 쳐다본께
나무는 올해도 무성한 잎을 달았네. 저 나무가 자넬 지켜줄끼다.
자네가 심은 옥수수며 해바라기는 꽃을 피우네.
내 가만히 이 말 입으로 뇌어본다네.
사랑한다네. 고맙다네. 인연으로 내 손 잡아 줘 감사하다네.
우리 다음 생에 만나면 니가 시에미 하라모.
나는 며느리 되어 니 말 다 들어 주꾸마.
니 하라는대로 다 하고 고분고분 절하면서 공손히 살아가꾸마.
↑↑ 참 오래도 살았지만 뒤돌아보믄 내 살아온 99년이 한 줄 바람과 같이 퍼뜩 지나갔제. 늬들은 서로 손 잡고 웃으며 재미지게 살아보라모.
ⓒ 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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