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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사람 사는 이야기

서른 아홉에 혼자 되어도, 내 살아온 뒤끝은 이리 밝소

동해면 검포마을 이종순(87세)
먼저 간 영감이 손해 아니것소? 그라이 내가 용서해야지!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6월 05일
↑↑ 집 앞 팽나무에 숲에 새들이 깃드는 모습을 보며, 올망졸망 곁을 맴돌던 자식들도 이젠 각자의 식솔들을 잘 챙기는 한 가정의 기둥이 되었으니, 더없이 맘 편안한 이종순 님
ⓒ 고성신문
내는, 동해면 검포마을에 사는 이종순이요.
내곡리 전주이씨 집안, 머슴도 셋이나 있던 제법 살림 따뜻한 집에서 첫째로 태어났소이다.
일하던 사람들이 디딜방아도 찧어주고, 물지게로 들통을 양쪽에 묶어 물도 길어주고, 부엌 아궁이의 재도 쳐주고, 마당이며 골목도 쓸어주고, 흙먼지 날리지 말라고 물도 뿌려주는 통에 자분자분 안살림만 챙기면 되는 처자로 살았소.
친정 논은 ‘성날 마을’ 안쪽 참새미골에 있었는데 가을에 추수를 하면 온 골짝 논에 누렇게 벼가 깔렸소. 아침부터 장정들이 매달려 벼를 베고 나란히 눕혔다가 볕에 말리고, 단을 묶은 벼 낟가리를 밤에 쌓았더랬소. 얼마나 높이 올려쌓는지 등불 잡아주느라 잠을 못 잘 정도였소. 그 벼들을 탈곡하는 날은 온 동네 사람들이 와서 거들거나 품삯을 받고 일 했소. 내는 어메를 도와 허연 쌀밥에 마늘쫑을 달달 볶고, 정구지 김치에, 머윗대와 어묵을 볶고, 삐드거리하게 마른 호래기를 지지고, 멸치조림을 짭쪼롬하게 졸여 상추쌈을 곁들여 점심을 차렸소. 온 동네 사람들이 ‘맛있다!’ 라며 고봉밥을 두 그릇이나 먹어도 걱정이 없었소. 벼 낟가리를 풀어서 홀태로 낱알을 훑고 도정하면, 뒤주에 쌀이 그득 차곤 했소. 그런 살림이니 동네 사람들 쌀밥 한 끼 푸지게 퍼 드리는 건 시피(쉬이) 봤던 기요.
내 나이 17살 되니 중신아비가 왔소. 글줄도 읽었고 살림도 따숩고 스무 네 살 된 총각이 훤칠하게 잘났으니 양가가 서로 기우는 데가 없다 캅디다. 친정에서 살림을 바리바리 싸서 달구지에 실어 시집으로 나릅디더. 그리고는 혼인잔치를 하고 시집살이 왔지요.
와서 보니, 듣던 말과는 많이 다릅디더. 신랑이 야당 정치에도 이런저런 관여를 했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관심이 많아서 입은 박사인데 농사일은 어중개비였소. 아침에 일어나 밥하러 부엌에 나와 보면, 물통도 비었고 쌀독도 비어있고 아궁이에 재는 그득 쌓여 있었소. 친정에서는 머슴들이 해 주던 일을 아무도 해 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다 했소.
새벽같이 일어나서 물 긷고, 디딜방아 찧고, 낮에는 농사일을 쉬지도 않고 했소. 처음에는 논 네 마지기에 밭 일곱 마지기가 있었는데 신랑은 정치 바람이 들어서, 그 논밭을 야금야금 팔아 치웁디다. 내가 앞날을 걱정이라도 하면 눈을 부라리며 ‘걱정 마라, 니 안 굶긴다.’ 큰 소리 치는 통에 주눅이 들어서 더 이상 암말도 못하겠습디다.
↑↑ 동네 친구들과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봄소풍을 갔던 까마득한 그 날이 언제였더라? 왼쪽 첫번째가 이종순 님
ⓒ 고성신문
첫아를 배속에 품었을 때 영장이 나와서 신랑은 군대에 갔소. 신랑이 없으니 밭농사 일은 내 차지가 되었지만 먹을 것이 없었소. 쑥털털이라도 해 먹으려고 바구니 들고 쑥을 캐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언덕 밑에 숨었소. 혹시라도 지나가던 사람이 내 꼴을 보고 거지같이 산다꼬 친정 동네에 소문이라도 낼까봐서 심장이 펄떡거렸소.
하루는 하도 힘들어서 눈물바람으로 터벅터벅 걸었더니 나도 모르게 친정집 대문 앞에 서 있습디다. 그래, 옴마가 맨 발로 뛰어나와서 나를 델고 새밋가에 가서 얼굴을 씻기고 먹을 것을 줍디다. 그란데 친정아부지가 냉정하게 내쫓디요.
“옷섶에 뼈를 싸도 그 집에서 살아야 된다. 니는 그 집 사람이란 말이다.”
그 말씀을 듣고는 방에 발도 못 디디고 바로 시댁으로 걸어왔소. 내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섧고 눈물이 나요.
“고생이 돼도 자식 키우고 살아야지. 살다보면 옛말 할 때가 있을끼다.”
아부지가 내 등을 두드려줌서 이리 말해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소만, 내가 혹시라도 약한 마음 먹을까봐 모질게 대한 것이 아닌가 싶소.
제대한 신랑이 장사를 한다꼬 논을 팔아 진해로 떠났소. 내는 홀시모를 모시고 신랑만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소. 그 사이에 4남 2녀의 자식들이 태어나 있었소. 내 혼자서 여덟 식구를 먹여 살린다꼬 허리가 휘어집디다. 진해에서 그물장사를 하던 신랑은 돈을 조금 벌었담서 논을 한 마지기 사 줍디다. 또 돈을 벌어올란갑다 싶어서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는데,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단 연락이 왔습디다. 시신을 고향으로 모셔와서 장사를 지내고 나니, 내 나이 서른 아홉입디다. 안즉 마흔도 안 되었는데 자식들만 주렁주렁 조롱박처럼 달아놓고 떠난 신랑이 미버 죽것습디다. 고마 나도 칵, 엎어지고 싶습디다. 그란데 우짭미꺼? 산 사람은 또 살아야 안 되것습디꺼?
그 때부터 머슴처럼 소처럼 일만했소. 내는 덩치가 있어서 기운도 쌨고 몸을 안 아끼고 일했더니 이 집 저 집에서 일꾼으로 불러줍디다. 보리 베고, 모 심고, 타작하고, 나무하고, 일이 있으면 타지까지 찾아다니며 했소. 천금같은 내 여섯 새끼 밥은 안 굶겨야 안 되겠소?
하루는 억척같이 일을 하고는 늘어져서 방 윗목에 누운 것을 보더니 시어메가 이캅디다.
“고마 살로(재가) 가삐라!”
“어메가 저것들 여섯을 멕여 살리끼요?”
“그란께, 자식이 웬수여. 우짜것노! 니 복이 그 뿐인 것을…….”
시어메도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셔서 섧디 섧은 세월을 살아오셨으니 떼밭을 헤매는 며느리가 불쌍해서 하신 말씀 아니것소. 시어메 그 말씀 듣고는 그동안 모질게 하셨던 미운 정을 모두 지웠소. 홀로 살아온 인생이 불쌍해서 서로 붙들고 한참을 울었더니 속이 뻥 뚫립디더.
↑↑ 동해국민(초등)학교 교정에 아름드리 벚나무가 봄이면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고, 친하게 지낸 선생님 부인들과 벗이 되어~
ⓒ 고성신문
우리 큰 아들 학용(문도)이가 고생을 많이 했소. 이웃에서 새끼소를 한 마리 빌려와서 여물주고 풀 뜯기고 키웠더니 부룩데기(어린 황소)를 한 마리 낳아줍디다. 그 소를 키우던 중에 큰아들이 색시가 있다 카데요. 가난하고 동생 많은 우리 집에 시집 와 준다니 고맙기 그지없지만 우찌 장가를 보낼까 걱정하는데 내 친정에서 장롱이며 살림살이를 장만해 줍디더. 일하던 멸치 어장막에서 돼지를 한 마리 보냈고, 내는 정성들여 동동주를 담그며 잔치 준비를 했소. 그 뒤 빚이 남아서 부룩데기를 팔았소. 내는 고마, 빚이라카모 언글징이 납디더.
복며느리가 들어와서 야무치게 살림 살아주고 내조도 잘 해서 살림이 많이 늘었소. 재 너머에서 굴 양식장을 하는데, 겨울엔 굴을 까는 일꾼이 많소. 일꾼들 밥도 다 해 먹이고 부엌은 반들반들 깨끗이 닦아놓고 입도 무겁고 내게 효부요. 큰손주도 옆에서 아비를 돕고 있소. 배운게 있는 젊은이라서 가리비랑 벚굴도 양식하고 머리 쓰는 일을 잘 한다고 다들 칭찬을 합니더. 내는 어장일이 고되고 쉴 짬이 없다고 책상 물림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는데 요새는 그게 아니라카네요. 오히려 지 주장대로 지 맘대로 주인되어 사는게 훨씬 배짱 편히 좋다카고, 아비랑 손 맞잡아 오순도순 일하고 돈도 제법 번다니 뭘 더 바라겠소?
둘째 진안이는 형제 중에 특히 머리가 좋았소. 1학기를 보내면 2학기에 배울 게 없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소. 친구들 숙제 대신 해 주고 연필이며 공책도 받아왔고 꾸짖을 일이 없었소.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며 조르던 것을 내가 식구들 먹여 살리기도 버겁다고 딱 잡아뗀 게 지금도 아쉽고 미안하오. 각시가 손끝이 야물어서 식당도 하고, 바느질도 하고, 생선장사도 했소. 신랑을 하늘같이 떠받들고 사는거 보믄 내가 흐뭇하오. 지금은 고향에 돌아와서 형님 옆에서 거들고 같이 일함시로 땅도 사고 딸들도 결혼 시켰고 아무 걱정 없이 잘 살고 있소. 둘이서 알콩달콩 사는 거 옆에서 보믄 웃음이 난다오. 부부가 맘 맞춰 잘 사는게 효도지요.
↑↑ 마산 사는 셋째 아들 옥진이가 시골 집에 어무이 뵈러 와서 나란히, 볕살보다 따스히, 평상에 앉았다.
ⓒ 고성신문
셋째아들 옥진이는 큰 회사 다니다가, 아이들 가르치는 학원하며 부부금슬이 참 좋소. 손주도 학교 선생하다가 지금은 군대에 갔고 손녀도 영양사로 회사 다니며 결혼했소. 겨울에는 큰형 어장막의 굴이며 가리비를 가져가서 조개구이 집을 한다는데 손님이 많다 캅디다. 같이 사는 각시가 욕본다 아이요. 군말없이 신랑을 잘 따라주니 내가 며느리 복이 엄청 많소. 옥진이도 몇 년 뒤 촌으로 온다카요. 도시 생활이 더 즐겁고 재미날 거 같은데 아들들은 왜 자꾸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겠다 카는지 모르것소. 하긴, 형제들끼리 사이좋게 서로 챙겨주고 우애를 나눔서 사는게 따뜻하기는 할 거 같소. 그걸 쳐다보는 나도 마음이 좋을끼요.
넷째아들 기호한테는 내가 참 미안하요. 막내로 낳았는데 사는 게 너무 바쁘고 막막해서 업어주지도 못하고 키웠소. 젖배도 많이 곯았소. 일하고 집에 오면 힘들고 지쳐서 따뜻한 말 한 마디, 따뜻한 손길 한 번 못 보내준게 아직도 명치끝이 아리요. 세상 모든 엄니들이 젤루 맘에 걸리는게 막내 아니것소? 진이 다 빠져서 낳은 막내이가 몸이 실하기나 하것소? 세상 사는데 깡이 있것소? 클 때부터 형들과 누나들이 업어 키웠으니 어리광 부릴 줄이나 알지, 뭐를 제대로 알것소? 그래서 옴마 눈에는 아직도 애기 같소. 지 각시가 참한 사람이니 각시 복으로 잘 살끼라 믿고 걱정은 안 하요.
↑↑ 두 딸 윤임이와 기임이가 제주도 여행가자고 하도 졸라서 못 이기는척 따라나선 길, 제주도 풍경보다 딸들 얼굴이 더 예쁘다.
ⓒ 고성신문
아이고, 우리 윤임이와 기임이한테 내가 일을 많이 시켜뭈소. 큰 딸 윤임이는, 내가 바깥 일 나가면 온갖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소. 한번은 물을 이고 오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물동이를 엎었소. 지 무르팍 깨진 것보다 물동이 찌그러진게 아까워서 울던 모습이 눈에 삼삼하오. 어릴 때부터 밥 하고, 빨래하고, 동생들 씻기고, 챙기고, 참 일도일도 많이 했소. 아부지가 일찍 돌아가셨으니 옴마가 아부지 몫을 하고, 지는 큰딸이라서 옴마가 할 몫을 다 했던 기요. 읍내에 살고 있어서 뭔 일만 있으모 내가 부른다오. 암말 않고 쪼르르 달려와서 거들어 주고, 챙겨주고, 밥도 같이 먹고, 말벗도 되어 주니 내사마 고맙기만 하오.
기임이는 잔정 있고 애살도 많소. 나는 마흔 되기 전에 자식 여섯 딸린 과부로 허리끈 쫄라매고 악착같이 살았는데, 기임이는 마흔 되어도 애기 같은 소릴 해서 웃깁미더. “옴마, 우리 내삐리고 갔으모 잘 살았을꼬? 발병이 나서 십리도 못 갔을끼로? 애 먹이는 신랑 뭐 할끼고, 혼자 사는기 더 낫지 뭐~” 이런 시태방태 같은 소리를 함시로 나를 놀림미더. 고시랑고시랑 말동무 해 줄 때는 딸 낳은 재미가 꼬솜합미더. 내가 자식들 키울때는 힘들었어도 이제는 모두 짝 맞춰 잘 살고 있으니 더 바랄게 뭐가 있겠소.
훗날 저 세상 가면 우리 영감님은 나를 알아볼랑가 모르것소. 돌아가실 때의 젊은 사진 걸어놓고 자주 쳐다보니까 그 모습을 기억하는데, 이렇게 쭈글쭈글 늙어 허리 구부러지고 할매된 나를 알아보것소? 그래도 내 이 말은 꼭 듣고 싶소.
“젊은 나이에 자식과 홀시모 맡겨 놓고 먼저 와서 미안소. 여섯 모두 어디 한 군데 짜부라진데 없이 잘 키워서 짝 맺어 주었으니 수고 많았소. 할멈, 고맙소!”
그라모 나는 영감 허벅지에 멍이 시퍼렇게 들도록 쎄게 꼬집어 줄라요. 등짝에 손자국이 나도록 힘껏 후리쳐 줄라요.
“문디 영감탕구, 내가 그리 밉디요? 여기가 그리 좋디요?”
그 말만 하고는 모두 용서해 줄끼요. 영감은, 여섯 자식이 모두 “옴마, 우리 옴마, 욕봤소!” 하고 치사하는 소리 한 번도 못 들어봤잖소. 내 살아온 뒤끝이 이렇게 환하게 밝은 줄 모르잖소. 여섯이 열 둘 되고, 자손이 퍼져 스물 넷이 되는 건 못 봤으니 아무래도 영감이 손해 아니것소? 그라이 내가 용서하고 웃어줘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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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6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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