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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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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다. 유교 성현을 모시고 학자를 키우기 위한 사설 교육기관, 서원은 전국 곳곳에 설립됐다. 서원은 향교와 함께 지방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지방사립대학인 셈이다. 고성은 예로부터 인물의 고장이라 불렸다. 학문에 정진해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많았던 덕분이다. 자신은 물론 집안과 지역을 빛낸 이들을 길러낸 곳이 바로 서원이다. 서원은 조선 후기 서원철폐령 등을 거치면서 사라졌다. 고성은 다른 지역에 비해 남은 서원의 수가 많아 조선 후기의 교육과 문화공간을 여전히 볼 수 있다. 다만 역사와 기록은 대부분 한문으로 작성돼 이해하기 어렵고, 서원이 위치한 장소의 특성상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고성향교와 고성신문이 고성군 곳곳에 숨어있는 서원의 내력을 찾아 쉽고 친근한 우리말로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고성 도연서원(固城 道淵書院) 마암초등학교에서 시루봉 방향으로 1㎞ 남짓 들어가면 도연서원을 만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도전리이지만 장산마을과 가깝다. 도연서원은 조선 숙종 13년인 1687년 호은 허기 선생의 후손들에 의해 창건됐다. 호은 선생은 고려말 중랑장(中朗將)으로, 공민왕에게 신돈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죽도(竹島·대섬·현재의 고성읍 수남리)에 유배됐다. 신돈이 5도 사심관이 되려 하자 생각을 고친 공민왕은 신돈을 체포해 유배, 참살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 이성계가 호은 선생을 다시 조정으로 불렀다. 같은 이유로 유배된 다른 신하들은 모두 조정으로 나갔으나 호은 선생은 홀로 개경으로 가지 않고 마암면 장산마을에 터를 잡고 살면서 김해허씨(金海許氏)의 고성지방 중시조가 됐다. 수백 년이 지나 숙종 대에 이르러 호은 선생의 후손들은 선조의 뜻을 기리며 도연서원을 세웠다. 도연서원은 정절공 호은 허기 선생, ‘천산재(天山齋) 허 선생’으로 불린 허천수 선생, 이견와(利見窩) 허재 선생을 봉안해 제향하고 있다.
# 나라를 생각하는 왕과 신하의 시가 있는 서원 도연서원 초입 마을은 마을 뒷산의 모습이 노루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원래 노루 장(獐)자를 써서 장산이라 불렀다. 그러다 조선 중기 천산재 허천수 선생의 빼어난 문장이 온 나라에 알려지며 마을의 이름은 글 장(章)자를 써서 장산마을이 됐다. 이름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장산마을에는 유달리 글을 써서 이름을 떨친 이가 많다. 최근 몇 년 사이 새로운 문학분야로 세계에 알려진 ‘디카시’도 장산마을이 발원지인 것은 우연이 아닌지도 모른다. 장산마을에서 도연서원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초곡지가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주민 허갑도 씨의 말에 따르면 서원이 있는 마을의 형상이 위에서 보면 달리던 말이 헐떡이는 모습이라 말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주둥이 앞에 초곡지를 조성했다고 한다. 초곡지를 지나 일원문으로 들어선다. 정면 3칸의 솟을대문인 일원문은 양쪽에 1칸씩의 방을 두고, 가운데를 출입문으로 사용한다. 일원문 위 까치발 모양의 계자난간이 설치된 누대(樓臺)가 눈길을 끈다. 왼쪽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목조 기와건물인 강당을 만난다. 강당은 방 2칸에 대청 2간, 방 1칸으로, 들어열개 삼분합문으로 대청과 후면 대청마루 후회칸을 구분한다. 강당 정면에는 다섯 개의 시구 즉 주련이 눈에 띈다. 주련은 공민왕과 호은 허기 선생이 주고 받은 것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왕과 신하의 뜻이 가득하다. 강당을 중심으로 뒤쪽에는 선조의 위패를 모신 추원사(追遠祠)가 자리한다. 추원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익공 맞배지붕이다. 내삼문 전면의 좌우에 익랑채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인 돈화실(敦和室)과 명성실(明誠室)이 자리하고 있다.
# 도연서원의 정신과 가치 서원은 기본적으로 향교와 비슷한 구조와 역할을 갖고 있다. 서원은 교육공간이 앞, 위패를 모신 사당 공간이 뒤에 있다. 교육공간은 중심에 강학당(강당)을 두고 좌우에 동재, 서재가 위치한다. 자리하고 있는 위치도 향교와 서원은 차이가 있다. 향교는 지역 중심지에 자리해 접근성이 좋은 반면 서원은 중심지에서 벗어나 경관이 좋은 곳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지역의 교육기관이자 선조들의 정신을 받드는 역할을 해온 도연서원은 조선 말 위기를 맞았다. 전국적으로 서원의 수가 많아지고 영향력이 커지면서 서원의 폐해 또한 심각해졌다. 정치인과 학맥으로 이어지며 당쟁에서 서원이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일부 서원들은 돈을 걷고 행패를 부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사액서원이 급증하면서 조정에서도 경제적으로 부담이 됐다. 일부 문중 서원은 문중의 재산을 은닉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에 숙종 대에서 서원에 대한 통제가 강화됐고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전국 200여 개의 서원이 철폐됐다. 조선 말 고종 당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전국에서 단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시켰다. 도연서원도 이 철폐령을 피하지 못하고 국령에 따라 철폐됐다. 이후 1920년 중건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세월이 흐르면서 서원이 더 이상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됐으나 그 정신과 역할, 건축적 가치는 1983년 7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됐다. # 道淵書院重建記(도연서원중건기) 我先祖貞節公湖隱先生은 當高麗恭愍王朝에 抗疏論旽賊蠹國하여 謫鐵城之竹島러라 鼎革而守罔僕志하여 以其終身이라 後數百年에 士林立道淵書院以俎豆之한대 及其見撤하니 而國隨不祀라 則卽其院而堂之러라 然自國亡而儒化弛하고 儒化而講誦廢하고 講誦廢而士林無與焉이라 可勝歎哉리오 頃年戊戌에 吾姓之爲先生後裔者가 以譜事會于堂한대 因忱然하여 於是齊聲發議曰 世道如此하니 無寧吾子孫之私復舊制하여 以伸情恨하고 於是合謨建祀하여 而又推而上之한대 首奉先生之祖與考忠穆公摠郞公하고 而先生及先生子縣監公序從焉이라 定以履霜之節에 行奠獻禮하여 歲以爲常이라 仍重建書堂에 翼東西兩廊하니 視舊頗宏敞이라 飮落之日에 擧族咸集甚懽이러라 諸父老命洞爲文以記之한대 洞不敢辭라 而槪記經紀始末如右하고 且書其所感于中者曰 夫人之子孫者는 致孝敬於祖先이 其大本專在乎繼志述事라 至於設堂宇奉香火는 猶屬儀文之末이라 故思傳稱武王周公之達孝는 必先善繼善述하고 而修祖廟薦時食은 居其次라 今吾姓之爲吾祖하여 盡孝敬之道는 亦在乎如是而已요 雖此儀文之設은 而又加之美焉이라 豈遽云吾之能事已畢乎아 竊伏惟我忠穆公은 在麗歷事四王하고 而糾察百官하여 直聲震動이라 朝端進講經筵에 仁言啓沃하니 君心忠懇所感이라? 卒能救還大駕라 其功烈固已銘彛鼎而被竹素矣더라 摠郞公祗有官諱之載史編이라 而恨其事功之殘闕한대 然其大體承襲乎家庭型範이라 至貞節公은 則以文武全材하여 忠誠貫日月이라 進而盡忠勘亂이요 退而秉義自靖이라 直與鄭司議 李石灘 李牧隱 吉冶隱 諸先生同其義하니 而幷美于千古러라 縣監公又篤守家傳이라 史乘所載하고 有云에 明經行義로 爲一代儒林宗師하니 嗚呼 其 偉哉라 爾後吾姓承四祖之遺風餘韻하여 文武忠孝로써 聯世炳菀이라 自世風一變에 寖不如古하니 以至于今에 則噫尤其寂廖矣라 범아자성은 登斯堂而慨然興懷하여 宜思所以振衰起沈之道하고 是道也亶在乎講明繼述之方하여 存之心如此하고 修之身如此하여 措之如國家天下如此면 何患乎世代之降이라도 而傳述之不如古乎아 然後可以盡孝敬之道면 而吾之能事요 於是乎畢矣라 諸宗盖各勉하라 旃是役也 章山宗人允道君擔其任하였기로 是可特書하니 以勸來後라 若夫書院故事之可徵者는 以舊記揭在堂楣하니 故玆不復詳云爾라 己巳白露節 後孫洞謹識 <번역 심상정> 우리 선조 정절공 호은 선생은 고려 공민왕 때 신돈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가 고성의 죽도로 귀양을 왔다. 새 왕조가 들어서자 모두 새 왕조의 신하로 들어갔으나 홀로 절개를 지키며 일생을 마쳤다. 그 후 수백 년이 지나 사림들이 도연서원을 세워 선생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냈다. 나라에서 서원을 훼철시켜 제사를 올릴 수 없게 되자 서원을 서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고부터 유학의 교화가 느슨해지고, 교화가 느슨해지니 강송이 폐지되고, 강송이 폐지되니 함께하는 사림도 없어졌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몇 해 지나 무술(1868)에 선생의 후손들이 서당에 모여 족보를 만드는 일로 정성을 쏟았다. 이에 한 목소리로 의논하길 “세상이 이러하니 우리 후손들이 옛 모습을 복원하여 한을 푸는 것이 좋겠다”하고는 사당을 세워 제향을 올리고자 의견을 모았다. 선생의 조부와 부친인 충목공과 충랑공을 맨 윗자리로 모시고, 선생과 선생의 아들 현감공을 차례대로 모셨다. 해마다 가을 시제철에 전헌례를 올리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서당을 중건하였는데 동랑과 서랑을 세우고 보니 옛날보다 규모가 크고 훤칠했다. 낙성하는 날 온 집안이 모여 기뻐하였다. 여러 어르신이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그간의 경위를 위와 같이 대략을 기술하고, 또 마음속 느낀 바를 적는다. 무릇 사람의 자손으로서 조상에게 효도와 공경을 바치는 것은 그 큰 근본이 오로지 뜻을 이어받아 사업을 계승하는 데 있다. 건물을 세우고 제향을 올리는 것은 격식을 차리는 일 중에 말단이다. 그러므로 무왕이나 주공처럼 효자로 알려진 사람도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조상의 사당을 짓고 제철 음식을 바치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지금 우리 허씨 집안에서 선조를 위해 효도와 공경을 다하는 것도 이처럼 해야 한다. 비록 이렇게 격식을 차례서 훌륭해질 수는 있지만, 어찌 우리가 할 일을 다 끝냈다고 선뜻 말할 수 있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우리 충목공은 고려조 네 임금을 내리 섬기면서 모든 관리를 규찰하여 올곧은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조정의 수상으로서 경연에 진강하여 어진 말로서 달래니 임금도 충성스러운 말에 감동되어 바르게 이끌었으니 이공은 진실로 이정에 새겨지고 죽백에 쓰였다. 충랑공은 단지 관직과 휘만 역사에 실려 있으니 그 업적을 알 수 없음이 아쉽다. 그러나 그 대체는 가정의 가르침을 잘 이어받은 것이다. 정절공은 문무를 모두 갖춘 인재로 충성심이 일월을 꿰뚫었다. 관직에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하였으며, 물러나서는 바른 도리를 지키며 편안하게 지냈다. 단지 정사의 이석탄, 이목은, 길야은 등 여러 선생과 그 의리를 함께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천고에 남겼다. 현감공은 또한 집안에 내려오는 규범을 철저하게 지켰다. 역사서에 의하면 경서에 밝고 행실이 발라 한 시대의 으뜸가는 선비라 하였다. 아! 훌륭하도다. 그 후 우리 집안에서는 네 선조의 유풍과 여운을 이어받아 문무와 충효로서 대를 빛났다. 세상의 풍조가 한번 변하여 점점 옛날만 못해지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적막하고 쓸쓸하게 된 것을 탄식하고 원망하고 있다. 우리 집안의 모든 사람은 이 서당에 올라서 개연히 감회를 일으켜 쇠미하고 침체된 도리를 진작시킬 도리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학문을 밝히고 선대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방법이다. 이것을 마음에 지니고 그것으로 몸을 닦으며 그것으로 국가와 천하에 조처하면 세대가 내려가서 옛날만큼 전승되고 계승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 도가 실현된 연후에 효도와 공경을 다 할 수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마쳐지게 될 것이다. 여러 종친은 힘써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장산 종친 윤도 군이 책임을 맡았으니 특별히 언급하여 후인들이 근면하는 것이 옳다. 서원의 고사는 문미에 걸려 있는 기문에서 볼 수 있어 여기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을사년(1905) 백로절에 후손 형이 삼가 적다. # 右賡和拱北樓御製詩(우갱화공북루어제시) 다음은 주련에 있는 시를 심상정 전교가 풀어쓴 내용이다. 공북루에서 임금과 신하가 주고받은 시로, 이 시는 정절공 허기 선생의 임금에 대한 충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右賡和拱北樓御製詩(우갱화공북루어제시) 觀風知偃草(관풍지언초) 憂國誡苞桑(우국계포상) 會有河淸日(회유하청일) 君臣共一堂(군신공일당) 바람이 불면 풀이 눕는 것을 알 수 있고, 나라가 걱정스러우면 근본이 튼튼해야 하네. 날씨가 맑고 좋은 날 강가에 둘러앉아 군신이 함께 즐기는구나. 退野思王蠋(퇴야사왕촉) 登山愧伯夷(등산괴백이) 澤蘭愁楚色(택란수초색) 墟麥愴殷詞(허맥창은사) 벼슬에 물러나 왕촉의 충절을 생각하니, 산 위에 올라서도 백이에 부끄럽도다. 택란도 초나라 모습처럼 근심에 차 있고, 보리밭 들녘에 은나라 노랫소리도 서글프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