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고성신문 |
|
지난 9일 故 제정구 선생이 돌아가신 지 20주기를 맞아 고성 ‘아름다운 사람, 제정구 기념사업회’(회장 이진만) 고문단체 대표, 운영진과 회원 등 26명은 선이 생전에 활동했던 경기도 시흥시 일대를 방문했다.선생께서 1977년부터 판자촌 철거민 이주단지를 세운 복음자리 마을과 한독마을, 목화마을을 둘러보고, 작은자리회관, 복음신용협동조합, 제정구 장학회관 등 선생의 발자취를 둘러보는 행사였다.제정구 선생은 평생을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하여 ‘빈민의 벗’, ‘철거민의 대부’라 불린 빈민운동가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에서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고 신에게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었다. 그가 꿈꾸었던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는 아직 우리 사회의 큰 숙제로 남아 있다. 세상을 떠난 지 어언 20년이 지나도 묘소와 생가, 선생의 활동 지역에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다.오전 7시 고성을 출발해 12시경 경기도 시흥시에 도착, 점심 후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다. 이날 시흥시에서는 故 제정구 선생의 부인 신명자 여사와 제정구 기념사업회 박재천 상임이사가 우리 일행을 맞이해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나서는 길을 동행하면서 시흥에서의 선생 활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고 짧은 하루였지만 ‘빈민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이유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
# 흔적이 사라진 복음자리 마을먼저 처음으로 시작한 복음자리 마을 터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1977년 故 제정구 선생과 故 정일우(John Vincent Daly) 신부의 주선 아래 서울 양평동, 문래동 등 안양천 주변의 판자촌 철거민이 처음 세운 마을이다. 명칭은 삶의 터전, ‘보금자리’라는 의미와 성서에 나오는 ‘기쁜 소리’라는 뜻을 지녔다. 서울에서 경기도 시흥시까지 오게 된 이유는 싼 땅을 구하려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됐다고 한다. 지금 이곳은 2010년에 신천휴먼시아아파트가 들어섰다. 현재의 모습 어디에서도 복음자리 마을의 흔적을 찾기 어렵고 복음자리 공원과 오직 버스정류장의 이름으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독일의 후원을 받은 한독마을복음자리 마을에서 약 1㎞ 떨어진 곳에 있는 한독마을이 있었던 곳으로 이동해 선생의 흔적을 찾아본다. 한독마을도 서울시 시흥동, 당산동, 사당동 등지의 철거민들을 위해 1979년 제정구 선생과 정일우 신부가 독일의 구호 단체인 미제레올(Misereor)재단의 후원을 받아 시흥시 은행동 찬우물 북쪽에 조성한 마을이다. 한독마을은 집단 이주 철거민들을 위해 독일 구호 단체의 후원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이를 기리고자 한국의 ‘한’ 자와 구호 단체 소속 국가인 독일의 ‘독’ 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당시에는 온통 논·밭·과수원이던 동네였다. 약 9평의 집에 방 1~2칸, 거실, 주방이 있는 이층집 6동 164가구가 입주했다. 한독마을도 1997년 재개발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녹원아파트가 건설됐다.
# 옛 모습 그대로 유지한 목화마을세 번째 방문한 마을은 목화마을로 제정구 선생이 건립한 이주단지가 유일하게 옛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의 건축상태가 주변의 건물과 비교하여도 크게 뒤떨어지는 모습이 아니어서 그 당시 최신 공법으로 신축한 듯하다. 이곳은 서울 목동 철거민들이 정부의 보상금을 받아 1986년 입주한 연립주택 마을로, 주위의 복음자리 마을·한독마을과 더불어 하나의 공동체로 생활했다. 1980년대 중반 서울시 목동 철거가 이루어지면서 이주민 36세대를 주민들이 공터에 합동으로 임시 천막을 지어 거주하게 했다. 이후 이들이 입주할 건물 3개 동 105세대가 지어졌다. ‘ㄷ' 자 건물 형태인 목화연립은 이웃집의 드나듦이 보여 사생활 보호는 어려웠어도 이웃 간의 소통이 수월하기도 하고 치안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인근 공장에 근무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지금도 그때 당시 입주한 주민과 자녀들이 50% 정도 거주하고 있으며 여전히 목화마을은 목화연립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이주민들의 은행 복음신용협동조합제정구 선생은 복음자리 마을, 한독마을 그리고 목화연립을 건립한 후 주민이 모두 한 공동체로 인식하며 생활했다. 이주민들의 경제적 개념과 공동체 의식을 높이기 위해 복음신용협동조합을 설립했으며, 주민의 90%가 가입했다. 조합은 복음자리 마을 이주 과정에서 빌린 융자금을 갚고, 복음자리 마을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 1978년 5월에 설립됐다. 철거 이주민 170세대가 형편대로 출자했으며 출자금의 10배 한도 내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 양평동 판자촌 시절부터 고질이었던 고리 사채도 거의 없어졌다. 독일 융자금을 완납할 수 있었던 것도 복음신용협동조합의 역할이 컸다. 지금은 경기시흥신용협동조합으로 발전했다.
# 청소년들의 희망 제정구 장학회관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시흥시 신천동에 있는 제정구 장학회관이다. 시흥시 청소년활동진흥센터로 명명된 이곳은 청소년들에게 안정적이고 정기적인 봉사 활동 수요처를 개발하고 활동하게 하여 봉사를 통한 참여의 가치, 청소년과 지역사회와의 밀접한 관계 인식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한 기관이다. 2013년 건물의 소유권이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제정구 장학회에서 독지가들의 기부를 받아 건물을 매입하게 되었고, 2013년 사단법인 제정구 장학회와 위·수탁 체결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흥 지역 청소년들은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대토론회 및 차세대위원회 활동을 통해 시 정책 제안에도 참여하고 있다. 장학회에서는 17명의 장학생을 육성하고 있었다.
# 더불어 사는 삶 작은자리회관집단 이주마을 주변에 있는 작은자리회관을 찾았다. 1977년 제정구 선생은 집단 이주 후 지역 복지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을 통해 각각의 마을 안에 유치원과 장학회, 공부방 운영, 신용협동조합 설립의 첫 결실로 1984년 ‘작은자리회관’이 건립됐다. 작은자리회관은 설립 이후 10여 년 동안 주민들의 문화적 공간과 경제적 자립 향상의 기초를 제공하는 한편 지역을 묶어 주는 공동 센터의 역할도 수행했다. 작은자리회관에서는 1985년 한글·풍물·서예 등의 교육을 했으며 1987년 시흥·부천 지역 노동자 중심의 한울야학, 1988년 노동자회 지역 청년 사랑방, 1990년 300여 명 회원이 가입한 도서 대여 사업, 1993년 어깨동무 공부방, 1994년 시흥시 등록 작은도서관 개원 등 다양한 시민 문화 및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지금은 경기도교육감 시흥시 평생학습관으로 지정되었고, 2006년에 복지관을 신축하여 ‘작은자리종합사회복지관’으로 변했다.고성군에서는 대가면 연꽃테마공원 주변에 제정구 커뮤니티센터를 건립 중인데 시흥의 작은자리회관이 ‘작은 사람들이 마음 편히 드나들고 만나고 쉬는 회관’인 설립 목적처럼 고성의 제정구 커뮤니티센터도 ‘마음 편히 드나드는’ 곳으로 건립되고 운영됐으면 하는 느낌을 받았다.시흥시 곳곳에 제정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철거민들을 위한 3곳의 이주단지와 경기시흥신용협동조합, 작은자리종합사회복지관, 제정구 장학회 등 모두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 있고 또, 버스 정류장의 안내판에도 제정구 선생의 약력이 소개되어 있을 만큼 시흥에서는 오늘날까지 선생의 뜻을 이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이번 성지 순례를 통해 제정구 선생의 출생지인 고성에서도 경기도 시흥시 못지않게 빈민운동의 대부로 도시빈민 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고, 시흥의 제정구 기념사업회와 고성의 기념사업회가 연대하면서 자매도시 결연 및 원활한 교류를 통해 선생의 유지를 이어가기를 바라면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 하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