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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향교 심상정 전교의 서원이야기-2 전경재공의 효심이 살아있는 위계서원

마암면 석마리 위치, 매년 10월 향사
이인형 선생 비롯 함안이씨 충훈 유업 추모
서원철폐령 당시 비문 기록으로 지켜낸 서원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5년 03월 07일
ⓒ 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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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늑한 위계산에 안긴 아름다운 위계서원
향교와 서원 모두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이라는 점은 같다. 그러나 향교는 나라에서 세워 지원하고 운영했고, 서원은 사대부들이 세운 사설 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운영상 차이가 크다. 향교는 중국과 조선의 선현을 배향했지만 서원은 지역이나 집안이 배출한 학자나 정치가를 배향했다는 점도 차이다.
또 하나의 차이는 구조와 위치이다. 서원과 향교는 기본적으로 교육 공간과 배향을 위한 사당으로 구분되는데 서원은 중심에 강학당이 있고 좌우에 동재와 서재로 교육 공간을 나눠두고, 사당이 뒤에 있는 형태가 대다수다. 향교는 지역의 중심에 자리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서원은 중심지에서 벗어나 물과 산을 접해 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한다.
위계서원 역시 마찬가지다. 고성읍에서 동으로, 마암면 장산숲을 조금 지나면 서북쪽으로 위계산을 마주하게 된다. 산기슭에 자리잡은 위계서원은 아늑한 위계산의 품에 쏙 안긴 모양새다. 정갈한 골짜기는 물론 입구부터 앞마당의 사철 달라지는 아름다운 풍경만으로도 나그네들의 발길을 붙든다.
위계서원은 이인형, 이의형, 이령, 이현, 이허, 이응성 선생의 충훈과 유업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했다.
위계서원이 있는 석마리에는 예로부터 함안이씨들이 일가를 형성해 살고 있었다. 함안이씨 9세손인 이미 선생은 점팔재 김종직 선생과 동문수학한 인연으로 그의 아들 넷을 점필재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큰아들인 매헌 이인형 선생(1436~1498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어찌나 총명했던지, 세조 1년이었던 1455년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너무 젊은 나이에 벼슬을 하면 성품이 교만해질 수 있다며 일부러 벼슬을 늦추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후 세조 14년(1468년) 장원급제한 이인형 선생은 대사헌과 한성부좌, 우윤 등 관직을 두루 거쳤다. 무오사화로 세상을 떠난 후 예조판서 직함을 받기도 했다.
의형과 지형 형제는 동시에 과거에 급제하며 가문의 명성을 떨쳤다. 장손인 전경재 이령은 부모의 무덤을 위계산에 모시고, 조상의 뜻을 받들고 자손들을 가르치는 사당을 지어 숭모정신을 이어가도록 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을 비문에 새겨서 후손들이 함부로 바꾸지 못하도록 했다.
위계서원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올린 목조 기와집이다. 사당인 숭덕사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선조를 모시고 있다. 내삼문과 강당의 좌우에 우진각지붕의 익랑채, 정문으로 솟을대문인 유인문이 자리하고 있다. 매년 10월이면 향사를 올리고 있다. 가운데 3칸을 대청으로, 강학장소인 동재와 숙소인 서재로 나뉜 교육공간이 있다. 강학당 주련에는 북송(北宋) 석만경(石曼卿)의 시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이는 문구들이 남아있다.

樂意相關禽對話(낙의상관금대화)
生香不斷樹交花(생향부단수교화)
蘿丹松翠書牕靜(나단송취서창정)
橘綠橙黃畵坊秋(귤록등황화방추)
春山北苑屛間畵(춘산북원병간화)
秋水南華架上書(추수남화가상서)

뜻이 통하니 새들과도 대화하며 즐기고
나무와 꽃이 어우러져 향기가 끊어지지 않는구나
푸른 비단 펼쳐진 서창은 고요하고
귤록 등황 또한 그림같이 여물었네
춘산 북원은 병풍 속의 그림이요
추수 남화는 시렁 위의 책이로다

# 葦溪書院事實記 (위계서원 사실기·고성향교 심상정 전교 번역)
1864년 중건된 후 그해 4월 27일 향례를 봉행했다. 행헌선생은 진주에서 고성으로 이사해 살았으며, 위계산에 장례를 지냈다. 이에 아들인 전경재공이 손수 재실 20여 간을 묘소 남쪽 100보쯤에 지어 ‘전경당’이라 했다.
재실을 운영하며 숙소로도 사용할 수 있게 전답 만 평을 갖춰 해마다 제수비, 수리하고 관리하는 비용으로 삼았다. 그 사실을 비각의 뒷면에 새겨 먼 후손들이 함부로 어길 수 없게 하였다. 이 사실은 중종조 정해기에 실려있다. 이후 3백여 년 동안 감히 어기지 않고 이어왔다.
헌종 임인년(1842)에 집안의 어른인 호, 일신, 걸 세 분이 종중회의를 거쳐 재실을 이건하기로 의논하고 북쪽 산기슭에 묘지와 약간 떨어진 곳에 땅을 다듬어 무너지지 않게 하여 후손들이 걱정거리가 없게 하였다. 대개 이렇게 하는 것이 선산을 지키는 한결같은 도리였다.
당시 도내 유림들은 한결같이 말하기를 매헌, 행헌 두 선생이 “곧은 절개와 아름다운 명성으로 봉행의 향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고, “사당의 자리는 위계산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라고 했다. 이리하여 갑진년(1864)에 재실의 북쪽에 사당을 지어 매헌 선생의 아들 성재공과 증손인 와룡공을 함께 배향하였다.
당시에 재실의 이건을 잘 알지 못하고 혹자는 서원에서 향사를 지내자 하고, 이를 위해 미리 준비한 것인가 하였다. 이에 재실에 사당을 짓고 전답에서 나온 자금으로 제수를 마련하니 한 가지로서 재실의 운영과 향사를 모두 치를 수 있었다.
후손들은 도의에 따라 전경재공, 행촌공의 증손 신천재공과 경재공의 증손 황파공, 신천재공의 아들 경암공이 모두 학문과 덕행을 갖춰 배향해 향사를 올렸다. 철종 병진년(1856)에 이르러 사우가 협소하여 경재공과 신천재공의 행사로 그치고 황파공 경암공의 향사는 올리지 못했다.
고종 병자년(1876)에 조정에서 각도의 서원을 훼철하여 서원의 재산을 관에서 모두 몰수했다. 그런데 오직 위계서원의 재산과 전답은 전경재공이 부모의 묘소 관리를 위해 지은 것이고 일반적인 서원 건립이 아니라는 것을 비석에 새겨진 비문의 사실을 관에 아뢰고 변론하여 몰수된 서원의 재산을 모두 찾아 되돌려놓았다. 이 일은 집안의 어른인 석봉, 창건, 병구 세 종인이 힘써 노력한 결과였다. 이때부터 묘제를 다시 봉행해 아무 탈 없이 구십여 년이나 이어져 왔다.
해방된 이후에는 하나같이 덕을 숭상하고 어진이를 받드는 마음이 방방곡곡에서 일어나고 서원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향인과 선비들이 의논하여 위계서원도 중건되었다.
서원의 강당, 동재, 서재 및 문방의 부속 시설을 중수하니 서원이 새롭게 되었다. 서당의 북쪽을 개척하여 사당을 조금 넉넉히 건축하니 5간 3량이고, 기와를 얹고 돌담을 둘러 제구와 복식을 함께 갖췄다. 여기에 예전부터 배행했던 6위와 일찍이 의논했던 황파공, 경암공을 중건을 즈음하여 함께 배향하고, 일의 체제를 살펴 이치와 인정에 맞게 처리했다.
이렇게 치러진 까닭은 유림의 공론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한두 사람의 사사로운 뜻이 아니다. 그런즉 뒷날 이 서원에 들어와 제례를 올리는 후손은 마땅히 이 모든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대체로 여러 선생의 행적은 사서에 실려있으니 지금 덧붙일 일이 있겠는가. 이로부터 모든 공정을 끝냈으니 무릇 2년이나 걸렸다. 경비가 모두 1천만 원이 넘었는데 집안의 족질 계수, 창수, 홍수가 함께 헌성했고, 지락도 함께 공헌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위계산이 옛 모습 그대로 있고 꽃과 돌 또한 그대로인 것은 전경재공의 어버이를 위해 정성을 다한 정성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이 서원의 공역에 모든 종원이 스스로 참여한 것은 어버이의 뜻을 잊는 자식들의 일이니 누가 여기에 더 보탤 뜻이 있으리오. 그 공덕은 오로지 건물을 창업한 데만 못지않고, 또 어찌 지금의 사람들이라 가볍게만 말하리오. 일의 전후 즈음에 감격을 이길 수 없어 함께 그 일을 이와 같이 쓰노라.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5년 03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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