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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을 죽이는 악세를 왜놈에게 줄 수 없다!”

송계장터 만세운동 주역 이판금
이름 신분 감추고 숨어서 독립운동
마을주민 생존유가족 증언 불구
수형기록 없어 독립운동하고도 미서훈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4년 06월 07일
ⓒ 고성신문
1919년 4월 2일 오후 2시. 고요하던 대가면 송계리가 일순간 소란해졌다. 나팔소리와 함께 수백 명의 군중
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송계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주모자는 21세의 청년 이판금이었다. 송계장터 독립만세운동은 ‘이판금 일가족 만세사건’으로도 불린다.

# 1919년 4월 2일 송계장터 독립만세운동
만세운동이 일어난 송계리는 지금도 그렇듯 대대로 함안이씨들이 살았다. 송계리 507번지 이판금의 집은 큰집이고 이판금은 종손이었다. 이판금의 아재 이진동과 친동생 이상모, 삼종동생 이상천은 모두 한 집에 모여 살았다.
1919년 고종의 인산연 이후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었다. 송계리 사람들 가슴 속에서도 독립의 열망이 끓었다. 당시 이판금은 갈천서원에서 동네 아이들, 청년들을 가르치는 척하며 민족의식을 심어줬다.
이판금은 송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했다. 인근의 영현면과 개천면, 멀리는 상리면의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면서 송계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삼종동생 이상천은 연락 책임자이자 행동대원으로, 두 개의 무리로 나눠 거사를 준비했다.
대장군마냥 기골이 장대하고, 옳은 일에 죽고 못살며 의리파였던 이판금의 아재 이진동도 이때 행동대장이었다.
거사는 4월 2일 오후 2시로 결정됐다. 나팔소리가 동리로 퍼지자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모인 군중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했다.
이 소식에 일본헌병과 고성경찰서 대가면주재소 순경들이 출동했고 총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이 사건으로 이진동은 1920년 11월 26일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동생 이상모는 일경에 체포된 후 주동자인 형님 이판금의 행처를 밝히라며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자식을 보지 못했다. 후에 이판금의 작은아들 이재희(전 경남도의원)가 양자가 돼 이상모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당시 이판금은 혹시라도 본인이 잘못되면 큰집 살림들을 맡을 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삼종동생 이상천을 만주로 이동하는 농민들 틈에 넣어 만주로 피신시키기도 했다.

# 농민을 몰락시키는 악세를 낼 수 없다
이판금 선생은 고성농민조합 간부이기도 했다.
지주는 소작료를 많이 받으려 들었고 마름은 횡포를 일삼았다. 농민을 몰락시키는 농회비와 축산조합비 따위의 지독한 세금들을 이판금 선생은 두고 볼 수 없었다. 이 악세들을 낼 수 없다는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교육에 있어서도 차별은 마찬가지였다. 일본인, 친일파, 유산자의 자녀들은 정규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항일이 밝혀진 자의 자녀들, 돈도 없고 뼈 빠지게 농사 지어도 지주가 7~8할은 가져가니 먹고 살기 힘든 농민의 자녀들은 배울 수가 없었다.
이판금 선생은 누구든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재를 출연해 송계야학을 만들고, 나이도 직업도 상관없이 배우게 했다. 모임자리만 있다 하면 찾아가 항일투쟁만이 우리의 살 길이라 알리고 계몽했다.
1940년대, 일제는 한반도의 모든 민족정기를 끊어놓으려 발악했다. 일제는 조선인의 이름조차 모두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민족혼을 말살하고 조선을 영원한 속국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식 이름이 없이는 유학도, 사회생활도, 배를 타는 일조차도, 신분 증명이 필요한 모든 일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판금 선생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끝끝내 이름을 지켜냈다.
이판금은 숨어다니며 독립운동을 했다. 마침 어머니가 옥천사 대보살이라 은거하기에도 딱 좋았다. 암자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이름도 이상찬, 이상우 등을 쓰며 신분을 철저히 숨겼다.
본명을 감추며 숨어서 독립운동을 했고, 심산의 암자들을 옮겨다닌 덕에 일제에 체포되지 않을 수 있었다.

# 주민들에게서 이어지는 이판금의 기억
이판금 선생의 이야기는 올해로 104세가 된 큰딸 이일희 씨, 큰아들 이만희 씨, 후에 이상모의 양자가 된 작은아들 이재희 씨 등 유가족은 물론 이 가족과 한 동네에서 지냈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송계장터 만세운동에 대해 듣고 자란 사람들은 분명 기억하고 있다.
향토사학자이자 그간 수많은 미서훈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해 추서로 이어지게 한 추경화 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은 이판금 선생의 추서를 위해 기록과 증언 확보에 나섰다. 100세가 훌쩍 넘은 딸을 직접 만나고, 대가면 송계리를 찾아 지역민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판금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기를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대가면 일원에서는 송계장터 만세운동이 ‘이판금 일가족 만세사건’으로 구전되고 있고, 실제로 이판금 선생을 비롯한 이진동․이상모․이상천 선생 등 4명이 4칸접집 즉 한 집으로 이어진 공간에 같이 살면서 대한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했으며, 이판금 선생이 그 주역이었다는 것을 증언을 통해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판금 선생과 이상천 선생에 대한 수형기록 등 관련 서류가 남아있지 않은 것은 옥천사를 비롯해 암자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피신하면서 일경에 체포되지 않았으며 이후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이상찬, 이상우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숨어서 독립운동을 한 탓이다.
송계에서 태어나고 자라 이장을 맡기도 했던 황정환 씨는 “선친께 들은대로라면 이상찬 투사와 작은집 이진동 어르신, 친동생 이상모, 작은집 동생 이상천 4명이 독립운동을 했다”라면서 “고성군 전체에서 단 세 가구만 창씨개명을 안 했다는데 이상찬(이판금) 어르신 댁이 그 중 하나”라고 증언했다.
황씨는 “작고하신 저의 선친께서 바로 뒷집 이상찬(이판금) 어르신이 송계장터 만세운동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사람은 가문도 중요하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라면서 “이상찬 어르신은 함안이씨 종가의 장자이자 장손으로, 덕망 높은 한학자였고 어르신이 대가면은 물론 인근 면의 유지와 서당 등 한학자들께 연락하고 협조를 구해 후세를 위해 나라를 찾는 데 헌신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창하면서 이뤄진 큰 독립만세운동이라고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전 이장이자 대가면주민자치위원인 정만업 씨는 할아버지에게서 이판금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며 외지에 있는 자식들을 대신해 이판금 선생 부부의 묘소 벌초를 지금껏 직접 하고 있다.
정씨는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일제의 앞잡이는 자식들을 공부시켰는데 항일투사와 어려운 가정의 자식들은 공부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사재를 털어 송계야학을 하셨다고 한다”라면서 “송계장터 독립만세운동은 총계획과 지휘, 실행은 이판금 어르신이 했고 이상모, 이상천 어르신은 고성군 농민운동 주모자였다고 알고 있다”라고 증언했다.

# 이판금, 수형 기록 없어 미서훈
이판금 선생의 동생인 이상모 선생은 2008년, 이진동 선생은 2021년 각각 대통령표창과 함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송계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판금과 이상천 선생은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 추서받지 못하고 있다. ‘수형기록’이 없어서다. 본명을 철저히 감추며 숨어서 독립운동해 기록되지 못한 탓이다.
함께 송계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이진동 선생이나 친동생 이상모 선생은 수형기록이 확인돼 국가보훈부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추서받았으나 수형기록이 없는 이판금 선생과 함께 주모했던 삼종동생 이상천 선생은 일제에 피체돼 고초를 겪은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미서훈자로 남아있다.
이판금 선생의 큰아들 이만희 씨는 “송계장터 만세운동을 주동한 분은 저희 아버지인 이판금이고 함께 기거하며 뜻을 같이 한 주천할배 이진동, 작은아버지 이상모, 야동아재 이상천 선생이 합세해 행한 거사라는 것은 마을 일원이 다 아는 사실”이라면서 “숨어서 독립운동을 한 탓에 수형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해 자식으로서 아버지께 송구스러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미 80세를 훌쩍 넘긴 아들 이만희 씨는 “아버지께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공적이 수형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이대로 사장된다면 내가 죽어 아버님을 뵐 면목이 없다”라면서 “부디 아버지의 독립운동 활약상이 사실로 인정받아 아버지께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되길 간절히 바란다”라고 말했다.
추경화 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은 “이판금, 이상천 선생이 고성 대가면 송계장터 만세운동을 한 사실은 이미 다수의 고성군민들로부터 인정받은 사실”이라면서 “수형기록이 없다고 해도 독립운동 사실을 증언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두 분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4년 06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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