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주)고성신문사 |
‘우리 고장 고성엔 충절녀 ‘월이’라는 여인이 있다. 전남 해남군 어란진에는 어란여인 있었다.’서울여해재단이 운영하는 이순신학교라는 곳이 있다. 여해(汝諧)재단은 이순신 장군의 별칭인 자에서 따온 단어이다. 이순신학교는 여해재단이 ‘사랑’, ‘정성’, ‘정의’, ‘자력’을 바탕으로 이순신 정신을 배우고 선양하여 밝고 건강한 사회건설에 앞장선다는 취지로 운영 중이다.
필자는 이 이순신학교 2기생으로 얼마 전 이순신 장군이 활동한 전라우수영 전적지를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 이 답사에서 전문가들의 해설과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역사적 이야기를 혼자 알기는 아까워 답사기로 적어 본다.
2017년 10월 14일, 참으로 맑은 날씨다. 서울여해재단 윤동한 이사장(한국콜마 회장)과 이재인 교장(전 한국보육진흥원 원장)을 비롯해 이순신학교 2기생이 수료여행을 겸해서 전라우수영 전적지 답사기행에 나섰다. 삼남(三南)은 아직 이른 가을일진데, 더욱이 시간도 오전 9시 정도인데도 첫 번째 휴식처인 정안휴게소엔 관광버스들로 빽빽하다. 우리가 탄 버스도 모두 새벽같이 나왔으니 김밥과 귤, 초콜릿 등으로 요기를 하며 졸린 속에 달려왔다.
이젠 사위(四圍)를 돌아볼 때가 된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빙고게임으로 서서히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고인돌휴게소에서 잠시 근심을 비우고, 차창으로 초가을의 풍경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소스라칠 안타까움이 나타난다. 목포 신항만에 세월호가 덩그러니 누워있다. 아픔과 갈등이 커서인지 그다지 말이 없다.첫 번째 답사지는 고하도. 목포 끝자락 영산강 하구에 유달산을 북으로 하고, 현대삼호중공업을 남으로 해, 율도 달리도 등 작은 섬으로 빙 둘러싸인 영산강의 빗장역할 자리이다.
|
 |
|
ⓒ (주)고성신문사 |
|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대첩으로 이끈 후인 1597년 10월 29일부터 이듬해 고금도로 이진하기까지 106일간 주둔하며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력을 재정비하던 곳이다.총총한 소나무가 제법 연륜을 자랑한다. 거북선 건조에 필요한 목재를 어디서 조달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충분히 헤아려진다. 산봉우리로 해풍을 막을 만한 데다, 먼바다에선 보이지 않고 진 앞에는 작은 섬으로 차양을 쳐 진으로서는 안성맞춤이다. 더욱이 섬 언저리가 뻘밭이 아닌 바위로 빙 둘러있어 배를 대기에도 제격이란 이순신전략연구소 이봉수 소장의 설명이다. 고하도는 목화가 유명하다. 10월 중순에 붉게 물들어가는 목화 잎에다 한두 송이씩 피기 시작한 목화가 어우러진 모습을 보니 어머니 생각이 난다. 늦가을쯤 목화가 한창 피기 시작하면, 바람에 하얀 솜이 티끌에 묻을세라 내 작은 일손을 구하던 기억이 난다.고하도에 들어오면서 윤 이사장의 목화에 얽힌 역사해설이 있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목화는 고려시대 문관 문익점 선생이 추위에 떠는 백성들을 위해 원나라에서 붓 뚜껑에 담아와 장인을 통해 고향인 경남 산청에서 처음 재배됐다. 그런데 고하도가 목화로 유명하다니? 아픈 사연이 있다. 지금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의 이순신 전승지를 답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목화씨를 얻어간 일본은 품종개량을 한 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제강점기 때에 고하도에 이식하면서 유명해졌다는 얘기다. 아이러니라 해야 할까.
차는 전라우수영 명량대첩공원으로 달린다. 이순신전적지 답사만 250여 회를 하셨다는 이봉수 소장의 해설이 이어진다. 우리나라 지명에는 초량(부산) 마량(고금도) 노량(남해) 사량(통영) 견내량(거제) 달량(완도) 등 량이란 지명이 많다. ‘량梁’이란 육지와 섬 또는 섬과 섬 사이의 협수로를 일컫는 말이다. 마침내 울돌목이다. 선승후전(先勝後戰)의 명량대첩 전승지.‘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전투에 임한다’고 하면 이순신 장군의 고뇌를 너무 쉽게 평하는 것은 아닐까. 먼저 명량대첩탑에 묵념하고, 회령포의 결의 조형물과 쇠사슬 감기틀을 둘러본다. 쇠사슬은 울돌목 물 속에 쇠사슬을 숨겨두고 왜선이 지나가자 쇠사슬을 감아 걸리게 함으로써 왜선을 격침시켰다는 전승의 얘기다. 의견이 분분하다.왜군이 발 뒤꿈치를 쫓아오는 중에, 권율의 허락을 얻어 백의종군하는 몸으로 단성 진주 곤양을 거쳐 전선을 둘러보다가 진주 손경례의 집에서 마침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권된다. 이어 병사를 모으고, 수군재건을 논하며, 무기를 구하고, 군량미를 선적하며, 해상진출을 결의하는 숨가쁜 조선수군재건의 시간흐름상 물리적으로 철쇠 설치는 어려웠지 않겠는가라는 것이다. 아무튼 명량대첩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숙제로 남겨둔다.
답사 첫날은 음력으로 8월 25일이다. 23일이 조금이니 두물이다. 해수면의 조차(潮差)는 15일을 주기로 변하는데 일곱물 여덟물이 가장 거세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두물의 흐름도 만만찮다. 물살이 강물처럼 흘러가며 강변에는 윗물과 아랫물이 뒤엉켜 좌우로 빙빙 돌고 아래위로 소용돌이친다. 영화에서 본 것이 현실에 있다.고뇌하는 이순신 상이 울돌목을 응시하는 가운데, 시간을 던지는 낚시꾼이 그나마 외로움을 달래주는 듯하다. 사업이 망해서 울돌목에 죽으러 왔다가 물속에 비친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보고 거북선 농업의 참다래 신화를 만들었다는 얘기도 듣는다.
또 명량대첩을 차실천행(此實天幸)이라고 표현한 이순신 장군의 겸손이 예지몽으로 옮겨가면서 주검을 초월한 장군의 애민‧위민정신이 울돌목을 수놓았다.
명량대첩 예지몽이란 대첩 하루 전인 정유년 9월 15일(음력) 장군의 난중일기에 나오는 것으로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生則必死 死則必生)’는 유명한 말과 함께 “그날 밤 신인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저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알려줬다”는 내용이다.
윤 이사장의 부연설명에 따르면 아산에 살던 처녀가 이순신 장군을 그리워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었는데 이를 들은 이순신 장군이 시신을 안고 하룻밤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여인이 예지몽의 신인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공감이 간다.
명량승첩의 예지몽은 그 처녀 귀신이 도운 것이라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의 논리를 듣다보면 어찌 하늘도 감동하지 않았겠으랴. 지도자는 일념으로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고, 지역주민은 강강술래와 횟가루로 협력하며, 탐망꾼은 목숨을 걸고 지켰던 것을.어란진 가는 곳이다. 전남 해남군 송지면 땅끝마을 인근이다.군데군데 벼베기를 했다. 황금색이 연초록 잎사귀에 투과돼 그야말로 정감어린 황금색이다. 익어가는 감이 늘어지게 매달렸고, 밭에는 농부들이 고구마 캐기에 바쁘다. 배추도 아름으로 여물고, 언제 심었는지 마늘도 송송 잎사귀를 내밀었다. 하얀 억세와 불그레한 갈꽃이 바닷길을 경계로 키 싸움을 한다. 나이 드신 시골 영감님은 뒷짐진 채 동구밖에 우두커니 섰다.
어란진은 회령포 이진 어란진 벽파진으로 이어지는 이순신 장군의 중요 기지이다.땅끝마을 바로 곁에, 만호 바다를 앞에 두고 누에머리 모양을 삐죽이 내밀고 있다. 서해바다로 올라가는 최단 뱃길로, 진도 바깥바다는 너무 돌기에 어쩔 수 없이 어란진을 거쳐가야 하는 곳이다.이러한 어란진에는 어란여인이라는 기록에 없는 민초의 충절이 숨어있다. 기생으로 왜적의 연인이었던 어란은 달마산 탐망꾼에게 왜군의 조선수군 침략일자를 알려준다. 난중일기에 장군은 탐망꾼의 정보를 믿을까 말까 고민하는 기록이 있다. 결국 대비함으로써 화를 면하고 대첩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필자는 당항포해전의 우리 고장 의녀 월이가 강하게 떠올랐다. 월이라는 이름의 여인은 왜구에게 부모를 잃고 어린 나이에 무기정이라는 주막의 부엌살림을 돕다가 과년하면서 기생이 된다. 그런 때 승려로 가장한 일본첩자가 기생집에 들어온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바랑을 살펴보니 남해안 지도가 여러 장 있었다. 그 중에 고성지역 지도가 있어, 마치 당항포가 고성 남쪽 남해안 바다와 연결돼 있는 것처럼 선을 그었고, 이를 보고 침입한 왜적이 되돌아 나가다가 당항포의 좁은 길목에서 몰살했다는 것이 당항포대첩이다. 전란 중에다 신분마저 미천하기에 어찌 기록을 찾을 수 있겠는가. 다만 지명과 전승되는 얘기로 숭고한 넋을 위로할 따름이다. 또한 고성 월이와 해남 어란여인의 너무나 닮은 모습에 민초들의 애국하는 마음이 결코 갓쓴 현감보다 덜하지 않았음을 느낀다.
이진 가는 길에 ‘희망의 땅끝마을’이란 이정표가 나온다. 병풍 같은 달마산을 두고 남쪽은 어란진, 북쪽은 이진이다. 성벽을 쌓고 수산물을 움직이던 곳이다. 장군이 토사곽란 중에 하룻밤을 세운 곳이 창사라고 하니 수산물보관창고가 아닐까 추측한다. 이순신 장군이 회령포에서 12척을 인수하여 이진梨津으로 이진移陣한 뒤 명량에서 대승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금은 주인 없는 작은배만 허허롭게 떠있다.강진에서 1박하고 다음날 노량해전의 준비기지 고금도로 향했다.
고금도는 농지가 넓다. 이순신 장군이 함경도 녹둔도의 둔전관 경험을 바탕으로 둔전을 경작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주변 완도 신지도 약산도 등에 전복과 김 굴뿐 아니라 약초 먹은 염소와 유자 등이 유명하다.
또한 정약용 등 유배 지식인의 가르침으로 향교가 발전했다고 한다.특히 이순신 장군의 보호 아래 피난민이 수만 호를 이루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그렇기에 45일만에 1천500명의 병력 모집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설명이다. 고금도에는 현재는 간척으로 연결된 아주 작은 섬 묘당도가 있다. 여기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주둔 당시 관우 장군을 모시는 사당과 관왕묘를 만들었는데 이순신 장군이 순국하자 진린이 월송대에 장군의 유해를 안장하고 장례를 치렀으며, 지금은 충무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이순신학교 일동은 이곳 충무사를 참배하고 고유문을 낭독한 뒤 자리를 떴다.
이제 마지막 답사지 회령포를 향해 간다. 가는 중에 이 소장과 윤 이사장의 해설이 이어진다. 전라우수영 지역이 애국심으로 결집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첫째 완도에 거주하던 장보고의 후예, 둘째 고려 삼별초 기지의 영향, 셋째 왕건세력의 후예가 옥씨, 전씨로 개명한 뒤 살아가다가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애민 지도자 이순신 장군을 만나면서 자발적 충성심이 더욱 결집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피력한다.
“이름 없이 성씨만으로 살던 민초들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한을 가진 민초들의 한을 보듬어주고, 배 활 총포를 만드는 기능인을 대우해 칼에도 도검장 이름을 새기게 하는, 더불어 산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이 힘겨운 민중에게 살아갈 힘과 용기를 심어준 게 아닐까 한다”고.마지막 답사지 회령포.원균이 이끌던 조선수군이 전멸하고, 도망다니던 경상우수사 배설에게서 남은 배 12척을 인수한 곳. 진으로서는 너무 좁아 梨津으로 移陣한 곳. 후세에 와서 배설의 후손들이 ‘도망이 아니라 전략적 후퇴’라고 말하는 억지 논리에 여론이 분노하며, 회령포 주민들이 운영하는 장터에서 동동주 한 잔을 기울이고 서울로 향했다.돌아오면서 전라남도는 가는 곳마다 조선수군재건로를 지역마다 분할하여 구례에선 병사를 모으고, 곡성에선 수군재건을 논하며, 순천에선 무기를 구하고, 보성에선 군량미를 선적하며, 장흥에선 해상진출을 결의한다는 안분논리에 우리 경남과 비교해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