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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을 이어온 정신, 고성의 호국불교 5.] 조선 건국의 꿈이 영글던 절집, 금태산 계승사

물결과 빗방울, 공룡발자국 백악기 공룡시대의 흔적
바위틈에서 흐르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석간수
고려 말 이성계가 수행하며 조선 건국 꿈 키운 곳

황수경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6월 05일
▣ 글 싣는 순서
① 옥처럼 귀한 샘물과 정신이 솟는 절집, 옥천사
② 호국정신이 구름처럼 일어나는 절집, 운흥사
③ 바다를 품고 화랑의 기상을 담은 절집, 문수암
④ 호국의 의로움이 곳곳에 숨어있는 절집, 장의사
⑤ 조선 건국의 꿈이 영글던 절집, 계승사
⑥ 천년고찰이 품은 호국불교의 가치

↑↑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의 꿈을 키웠던 금태산 계승사는 다른 절집과 달리 가람이 석 三자로 배치돼 있다.
ⓒ 고성신문

상족암은 바다니까 공룡들이 뛰어다닐 무른 땅이 있었다. 진흙 위로 또다른 진흙이 세월따라 덮이면서 공룡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1억 년의 시간을 건너뛰었을 것이다. 과학과는 공룡발자국이 찍힌 시간부터 지금까지의 시간만큼 머나먼 거리를 두고 사는 기자에게도 일단은 바닷가의 공룡발자국까지는 쉽게 이해가 간다.
그런데 공룡발자국이 산중 절집 계승사(경남 전통사찰 103호)에 있다. 공룡의 발자취만이 아니라 공룡이 살던 시대의 흔적까지도 볼 수 있는 곳이다.

↑↑ 호수의 잔잔한 물결이 만든 연흔
ⓒ 고성신문
↑↑ 세찬 빗방울이 남긴 우흔
ⓒ 고성신문
↑↑ 공룡발자국과 우흔, 연흔은 천연기념물이다.
ⓒ 고성신문
↑↑ 계승사를 둘러싼 백악기 퇴적구조
ⓒ 고성신문
# 1억 년 전 공룡시대 연흔과 우흔, 공룡발자국
영현면 대법리 금태산. 침점리나 대법리 두 곳 중 어느 곳을 택해도 절집으로 향하는 산길이 나있다.
금태산 중턱, 7부쯤 될까.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둔 절집은 분주했다. 절집 뒤로는 거대한 바위가 위용을 뽐낸다. 바위 형세가 마치 용머리를 닮은 듯하다. 그래서 용두봉이라고 한다. 용두봉 아래로는 보통 절집과는 다르게 대웅전과 보타전, 약사전이 석 三자로 정갈하게 배치돼있다.
계승사에는 일주문이나 천왕문이 없다. 절집에서 처음 만나는 범종루는 기왓장과 흙을 쌓은 단 위에 올렸다. 범종루를 지나 절집 마당으로 들어서면 대웅전 뒤를 휘어감은 절벽과 그 사이에서 쉼없이 흘러나오는 석간수가 크지 않은 절집을 웅장하게 만든다. 절벽은 마치 시루떡처럼 무지개떡처럼 켜켜이 흙이 쌓이고 쌓여 얼만큼의 세월을 보냈을지 모르겠다.
종무소 앞 너른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바위 위에는 연흔(漣痕·물결자국)이 남아있다. 진흙 위를 방금 작은 물결이 스쳐간 듯 물결자국이 선명하다. 연흔은 가로 13.5m, 세로 7m에 이를 정도로 넓다.
계승사의 백악기 퇴적구조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퇴적층이다. 2006년 12월 천연기념물 제475호로 지정됐다. 보호면적은 6필지 8천46㎡에 이른다.
계승사 주변의 지질은 물결이 잔잔한 호수 환경에서 주로 보이는 형태다. 퇴적암에 화성암이 뚫고 들어가 그 열에 의해 원래의 암석은 변질되고 더 단단한 검은 색의 암석으로 변했다. 여러 겹의 단면은 퇴적 당시 환경이 일정하지 않아 퇴적물의 종류나 크기, 성분이 다른 흙이 쌓이면서 생긴 특징이다. 물결자국이나 빗방울자국, 공룡발자국으로 지층 퇴적 당시의 환경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주지 동산당 상원 스님의 안내로 절집을 둘러봤다. 대웅전 뒤 약사전으로 향하는 흙담 돌계단길을 따라 오르면 비스듬히 기울어진 바위 위에 공룡발자국이 찍혀있다. 하나에 60~70㎝, 큰 것은 90㎝에 이르는 커다란 초식공룡 용각류의 발자국이 모두 일곱 개다. 발자국 하나의 크기만으로 보면 상족암군립공원 주변에 살던 공룡들보다 훨씬 덩치가 크지 않았을까.
공룡발자국 위에는 혹시나 공룡의 흔적을 못알아채고 지날까 누군가 돌거북이 한 마리를 올려뒀다. 계승사에서만 볼 수 있는 웃음나는 이정표다. 또 어떤 바위에는 수없이 많은 홈이 패어있다. 빗방울이 무른 흙 위를 지나며 만들어낸 4~5㎜쯤의 무수한 흔적, 우흔(雨痕)이다. 연흔과 우흔은 계승사 안 바위 곳곳에서 보인다.
공룡이 이 땅의 주인이었던 1억 년 전. 고성을 비롯해 경남 남해안 일대는 커다란 호수였다. 파도는 잔잔하게 일렁였다. 공룡들은 먹을 것이 넘쳐나는 물가에 살았다. 호숫가는 공룡들의 식당이기도 했고 놀이터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결이 지나거나 비가 오면 무른 땅이 패었고 날이 개면 흔적이 남은 채로 땅은 말랐을 것이다. 그렇게 1억 년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 눈 앞에 공룡들의 흔적이 속속 나타났다. 계승사는 중생대 백악기 고환경 연구에 아주 좋은 자료들이 산재한 곳이다.

↑↑ 용두봉에서 발원해 마르지 않는 석간수
ⓒ 고성신문
# 용두봉에서 절집까지 흐르는 마르지 않는 석간수
용두봉에서 시작돼 계승사까지 흘러내려오는 석간수는 지금껏 마른 적이 없다. 옛날 옛적에는 석간수가 흐르는 바위틈 사이에서 매일 부처님전에 올릴 석 되 두 홉의 공양미가 쏟아졌다. 절집에서 공양미 걱정을 덜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던 중 스님 한 분이 대체 이 바위틈에 뭐가 있어 공양미가 나오나, 틈을 벌리면 더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탐진치 삼독을 버려야 열반에 들 텐데 탐욕과 우치를 버리지 못했다. 이 행자승이 바위구멍을 더 크게 만들고부터는 더 이상 바위틈에서 공양미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금산 법진 회주 스님이 계승사의 주지로 있던 70년대 말의 일이다. 늦가을 이른 새벽 이슬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법진 스님이 도량식을 마치고 예불을 드리던 중 밖에서 쿵하며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났다. 놀란 스님이 혼미한 상태로 밖에 나와보니 요사채 공양간 문이 부서져있었다. 들짐승 짓도 아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손전등을 비춰가며 살폈다. 세상에, 공양솥과 국솥 사이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들어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날이 밝기를 기다려 동산에 올라보니 산봉우리 소나무 아래에서부터 굴러내려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 길을 더듬어가니 이 바위는 법당을 향하고 있었다. 그대로 법당을 덮쳤다면 큰일이 났을 터였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법당 뒤에 떨어진 바위가 방향을 90° 급히 틀어 공양간으로 들어간 것이다.
스님이 급히 마을로 내려가 청년들과 함께 이 바위를 깨어 없애려 했다. 하지만 깨기는커녕 구멍조차 내기 힘들었다. 당장 공양을 해야 하니 온 힘을 모아 겨우 조금 치웠다. 더 희한한 것이 바위 앞에서 마음을 다스려 합장하면 바라는 일이 이뤄졌다. 그래서 법진 스님은 이 바위의 이름을 하심석(下心石)이라고 이름 붙이고, 지금의 자리에 놓고 있다.

# 태조 이성계 조선 건국 꿈 키운 절집
계승사는 신라 문무왕 15년이었던 675년 의상대사가 창건했으니 그 역사가 1천500여 년에 이른다. 안타깝게도 계승사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아 이 절집의 발자취를 세세히 알 길은 없는 형편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 계승사와 인연을 맺었다. 계승사가 금대사(金臺寺), 금태사(金太寺)로 불리던 고려 말, 이성계는 장수였다.
이성계는 고관의 아들이었을뿐 아니라 타고난 장수이자 지략가였다. 고려를 못살게 굴던 몽골은 북쪽 초원지대로 밀려났다. 명나라가 들어섰다. 그런데 명나라는 고려땅 중 몽골이 지배했던 함경도 지방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최영 장군은 고려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중국의 요동을 쳐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이성계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반대했다.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잘못이고, 많은 군대가 요동정벌에 나서면 그 틈에 왜적이 쳐들어올 가능성이 크고, 여름에는 전쟁하기 힘들며, 장마철에는 전염병에 노출되니 군사력에 손실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요동정벌을 반대했다.
그러나 1388년, 명나라를 치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성계 역시 고려의 장수였으니 군대를 이끌고 국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화도에 이르러 이성계는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향했다. 어명을 어겼으니 반역이나 다름 없었다.
이보다 더 앞선 일이다. 지금의 경남 지역인 삼남도는 당시 왜구들이 바닷길을 통해 들고 나기 좋아 약탈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성계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삼남도에 내려왔다. 이성계는 계승사에 여장을 풀고, 수행하며 기도했다. 무학대사와 함께 당시 금대암(金臺菴)이라는 이름을 쓰던 계승사에 머물던 100일간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노라 다짐하며 조선 창업의 꿈을 키웠다.
왜구를 무찌른 이성계는 그야말로 백성의 우상이었다. 이성계는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고려의 개혁을 주도했다. 위화도회군에 역성혁명까지 이어졌다. 이성계는 차근차근 정치적 권력을 장악했고 결국 고려는 몰락했으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해 태조에 올랐다.
‘해동지도’에서는 금태산을 금대산(金臺山), ‘조선지지자료’에서는 금대산(金坮山)으로 기록했다. 조선을 건국한 후 이성계는 자신이 수행한 산의 이름에 ‘금’자를 붙이라고 하명했다. 금대산은 금태산(金太山)이 됐고, 남해 금산도 이 때 이름을 받게 됐다. 계승사가 있는 산 중턱에는 자그마한 암굴이 하나 있다. 이성계가 수행했다고 전한다.
산중 절집인 탓에 옥천사처럼 숨어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머물기도 좋을 것 같았다. 스님에게 그리 물었더니, 일제강점기에는 이 절이 없었다 한다. 임진왜란 당시 계승사는 완전히 소실돼 수백 년동안 터만 남아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고적조사에 나선 일제는 지금의 계승사가 있는 자리에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절집은 자취를 감췄고, 확인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1963년 인촌스님과 법진스님이 지금의 터에 절집을 중건했다. 복원불사하면서 기와와 도자기파편 등이 출토됐다. 문화재청 문화유적 자료에도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사찰터에서는 금동불상입상, 금동불상좌상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민화작가로 유명한 상원 스님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 고성신문
↑↑ 상원 스님의 작품 산신도
ⓒ 고성신문
# 세상사 길흉화복 담은 상원 스님의 그림
지금의 주지인 동산당 상원 스님은 민화작가로도 이름나있다. 스님은 원래 미술가를 꿈꿨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 적녹색약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미세한 색의 차이도 구분해야 하는 것이 화가니 적녹색약은 그림을 그리겠다는 꿈을 접어둬야 했다.
대학 시절 불교를 공부했고 졸업한 후에는 출가했다. 어린 시절의 꿈은 꿈으로 남겨뒀다. 그저 절집에 앉아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는 정도였다. 계승사 법당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던 스님을 보고 불자 한 명이 그림을 권유했다. 스님의 마음 속에 다시 불꽃이 일렁였다.
그렇게 시작해 지금껏 스님은 세상사, 인간의 생을 그림으로 그렸다. 작품만 보면 적녹색약이라는 것을 추호도 짐작할 수 없다. 생각해보면 종교인으로서, 인간이 추구하는 삶에 대한 답변을 법문 대신 그림으로 남기는 것이니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곧 기도이자 수행이다. 상원 스님의 그림은 계승사의 벽에도 꽃을 피웠다. 길흉화복과 수행정진이 스님의 붓 끝에 있다.
1억 년이 넘는 세월동안 계승사에는 물결과 빗방울, 공룡의 흔적이 숨어있었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의 원대한 꿈이 생겨났다. 오늘도 석간수가 절집 뒤에서 솟고, 스님들의 수행이 이어진다. 계승사에는 1천500년의 역사가 여전히 살아 숨쉰다.

“본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황수경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6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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