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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을 이어온 정신, 고성의 호국불교 2.] 호국정신이 구름처럼 훨훨 일어나는 절집, 와룡산 운흥사

신라 문무왕 16년 창건, 1천500여 년 역사
보물 제1317호 의겸스님이 그린 괘불탱과 궤
전통의 미 가득한 장독대 사진명소로 입소문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병 6천 명 주둔
수륙양동작전 논의 위해 이순신 장군 세 번 방문
불법반출된 동종 일본 도쿄 네즈미술관에 방치

황수경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5월 15일
▣ 글 싣는 순서
① 옥처럼 귀한 샘물과 정신이 솟는 절집, 옥천사
② 호국정신이 구름처럼 일어나는 절집, 운흥사
③ 바다를 품고 화랑의 기상을 담은 절집, 문수암
④ 호국의 의로움이 곳곳에 숨어있는 절집, 장의사
⑤ 조선 건국의 꿈이 영글던 절집, 계승사
⑥ 천년고찰이 품은 호국불교의 가치

1천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와룡산 운흥사는 사명대사와 서산대사가 승군을 이끌고 머물며, 이순신 장군과 수륙양동작전을 논의한 호국사찰이다.
ⓒ 고성신문
코로나19 때문에 잔뜩 움츠렸던 산아래 논에는 어린모를 키워낼 물들이 찰랑인다. 농부들은 경운기를 털털대며 농로를 달리고, 허리가 ㄱ자보다 더 굽은 촌부들은 무슨 일이 그리 많은지 밭에 엎드리다시피 하고 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법한 시골풍경들이 펼쳐지는 길을 지난다. 상리를 지나서도 한참을 더 가서, 사천이 나오기 직전에서야 갈림길을 만난다.
한 달 전만 해도 벚꽃이 흩날렸을 하이저수지 꽃길은 이제 푸릇한 잎새 터널이다. 벚나무길을 지나서도 제법 한참을 가야 겨우 와룡산을 만난다. 용이 누운 형상이라 와룡산이라고 이름 붙었다지만 딱히 특색이랄 것까지 없는 흔한 산이다. 게다가 향로봉을 오르는 하이면 와룡리 주변은 흔히 ‘점빵’이라 불릴만한 구멍가게조차 없는 동네다.
고성읍으로부터 서쪽으로 장장 30여 ㎞의 거리. 그 길 끝에 구름이 이는 절집, 운흥사(雲興寺)가 있다.

1년에 한 번 영산대재일에 절집 앞마당에 내걸리는 운흥사 괘불탱
ⓒ 고성신문
전통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운흥사 장독대(사진제공=고성군, 이성용 씨 촬영)
ⓒ 고성신문
# 불교미술작품 가득한 와룡산 운흥사
고성의 5대 사찰 중 하나인 운흥사는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일설에는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에 창건됐다고도 한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은 온갖 궂은 일은 절과 승려에게 떠넘겨놓고도 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다.
고난을 겪었을 운흥사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보제루가 마치 성벽 같다. 32개의 커다란 기둥이 떠받친 보제루 뒤로 대웅전과 영산전이 서있다.
보제루를 지나 이어지는 돌계단을 오르면 너른 마당에 석탑이 우뚝하다. 둘러보면 이정표가 없었다면 절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것처럼 산이 절을 둘러싸고 있다. 범종루에는 범종·법고·목어·운판 네 종류의 북이 조석으로 삼라만상의 평온을 기원한다. 범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 법고는 육지에 사는 생물, 목어는 물에 사는 생물, 운판은 하늘에 사는 모든 생물을 의미한다고 한다.
운흥사 대웅전은 경남도문화재 제82호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묵직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대웅전은 영조7년(1731년)에 중건됐다. 화려한 수미단 위에는 삼존불상이 모셔졌다. 불상 옆으로는 수월관음도와 감로탱, 왼쪽은 신중탱화가 걸려있다.
운흥사의 수월관음도는 대웅전 중건 1년 전인 영조6년에 그려진 불화다. 그러나 그 모습은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와 엇비슷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는 주로 약간 옆을 향하는 자세인 반면 운흥사 수월관음도는 정면을 향하고 있다. 관음보살은 구슬로 장식된 보관을 쓰고, 어깨까지 구슬장식을 드리우고 있다. 속이 비치는 옷자락은 발 아래까지 늘어졌다. 진홍색과 녹색으로 화려한 수월관음도는 가로 2.4m, 세로 1.72m다. 그러나 지금 운흥사 대웅전에서 볼 수 있는 수월관음도는 조선시대에 그린 탱화 대신 1998년 4월 모신 새로운 관음도다.
감로탱은 보통 조선 중기 이후에 주로 그려졌다. 맛이 달콤한 이슬이라는 의미를 담은 감로탱은 사부대중을 업의 굴레에서 구제하는 자비의 상징이다. 굴레에서 구제받는다면 중생은 해탈에 이른다는 불교의 교리를 담았다.
불화의 대가로 익히 알려진 의겸이 영조6년에 그린 감로탱은 역시 의겸이 그린 선암사의 감로탱보다 6년 먼저 그렸지만 모습은 차이가 있다.
감로탱의 아래에는 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받는 중생, 중간에는 불교 의식의 공덕, 위에는 불보살이 공덕에 감응해 감로를 베푸는 모습이 그려졌다. 감로탱에는 비슷한 시기 풍속화에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생활상이 등장한다. 전쟁은 물론 연희패의 놀이판이 벌어져있기도 한다.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싸우거나 주인이 하인을 때리고, 만취해 싸움질을 하거나 호랑이에 물리고 벼락이 맞아 죽는다. 그야말로 풀지 못한 업이다. 숱한 사연으로 죽은 혼귀들을 부처님의 자비로 구제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 감로탱이다.
감로탱을 그린 의겸 스님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조선시대 불교회화 중 가장 많은 걸작을 남긴 화사(畵師)다. 의겸 스님은 전라도와 경상도 일원의 사찰을 오가며 약 40년 정도 작품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존하는 괘불 중 가장 큰 괘불탱과 궤(보물 제1317호)도 운흥사에 보관 중이다. 가로 8.18m, 세로 12.72m로, 영조 6년인 1730년 의겸과 이연, 진천, 보사, 노덕화, 가선광음 등 20여 명의 화사가 함께 그린 거라 전한다. 지금은 1년에 한 번, 영산대재 때만 외출해 사부대중 앞에 선다.
괘불탱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법의를 걸치고, 귀가 어깨에 닿을 듯 늘어진 석가여래가 중앙에 자리했다. 양쪽에 세 분씩의 부처가 서있다. 괘불탱은 삼베를 겹겹이 바르고 일곱가지 물감을 썼다. 닥종이로 된 뒷면에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진언(眞言·석가의 깨달음), 영조의 어언(御言·임금의 도장)이 남아있다.
운흥사 괘불탱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세 번이나 반출을 시키려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싣기까지 했으나 출발하려 하면 번번이 풍랑이 일어 실패했다. 부처님의 자비도 정도껏이고 양심껏이지, 우리 문화재를 밖으로 빼돌리는 파렴치한 일제는 부처님도 두고 볼 수 없었던가 보다.
대웅전 옆으로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과 관세음보살을 모신 보광전, 그 뒤로 영산전과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다.
운흥사에 갔다면 놓칠 수 없는 풍경의 백미는 장독대다. 돌과 황토를 켜켜이 쌓아올리고 기와로 덮은 동그란 돌담이 무척이나 정겹고 이채롭다. 둥근 돌담 안에는 높고 낮은 장독들이 봄볕에 반짝이며 절집의 장맛을 익히고 있다. 반들거리는 장독이 스님들, 보살님들의 손길에 담긴 정성을 짐작하게 한다.
원래 운흥사 장독대는 대웅전과 보광전 사이 마당에 있었다. 그러나 영산재마다 외출하느 괘불을 걸 괘불대를 설치하면서 장독대는 법당 뒤로 이사했다. 이렇게 말하면 괘불대에 밀려난 것 같지만 사실 이 절집에서 볕이 제일 잘 드는 자리가 지금 장독대 자리이기도 하니 이래저래 딱 좋은 이사였다.
마치 어미닭이 날개를 펴고 알을 품는 모양새에, 화려하지는 않아도 고즈넉한 전통의 아름다움이 소문난 덕분에 운흥사 절집보다 장독대가 더 유명하다. 운흥사를 찾는 사진작가들은 운흥사보다 장독대를 담기 위해 일부러 걸음하기도 한다.

# 바다와 육지, 영남과 호남이 만나는 군사 요충지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했다. 불교는 온갖 핍박을 받으며 나라의 부역까지 해야 했다. 그러나 사찰들은 승병을 꾸리고 수시로 쳐들어오는 왜군에 맞서 백성과 이 땅을 지켰다. 전쟁을 치르느라 무너진 성을 수리하고, 백성들의 피폐한 삶에 부처님의 말씀과 함께 희망과 자비를 전했다. 한양에서 멀어 군사가 빨리 당도할 수 없는 곳, 바다에서 가까워 왜군이 즉시 쳐들어올 수 있는 최전선이나 적의 침입이 한 눈에 보이는 산에는 어김없이 절집이 있고, 승병들이 머물렀다.
하이면은 바다와 육지, 영남과 호남이 만나는 곳이다. 이런 위치적 이유로 운흥사는 영남 승병의 본부였다. 바다와 멀지 않은 데다 산중 절집이니 왜구를 칠 전략을 세우는 본부로 적격이었다. 운흥사의 창건은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운흥사가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이다.
바다에서 가까우면서 오래된 절집들은 호국사찰인 경우가 많다. 운흥사도 마찬가지다.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진주와 가깝고, 앞뒤로는 산이 둘러싸고 있으면서 와룡산은 정상부에서 육지와 남해가 모두 조망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육지와 바다의 적을 모두 감시할 수 있어 사령부로는 안성맞춤이다.
이런 덕분에 조선시대 운흥사는 승병의 본거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지휘하는 6천여 명의 승병이 머물렀다. 지금의 운흥사를 보면 6천 명이나 되는 승병들이 다 어디에 머물렀을까 싶다. 그러나 조선시대 운흥사의 규모는 지금과 달리 절집만 29동에 천진암과 약서암을 비롯해 모두 아홉 개의 암자가 있었다. 운흥사 입구에서 1㎞ 정도 거리의 언덕에는 부도가 모셔졌다. 옛 운흥사의 규모는 주변의 절터 흔적들과 부도로도 알 수 있다.
1592년 부산진에 왜군이 기습상륙했다. 왜군은 한양으로 가는 한편 한반도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이동했다.
육지에는 진주성의 김시민 장군이 있었다. 단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승리를 이어갔다. 바다에는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과 김시민 두 명장은 사천과 삼천초에서 수륙양동작전을 펼쳤다.
운흥사에는 사명당과 서산대사가 이끄는 승병이 집결해있었다. 승병을 이끄는 수장들과 육지, 바다에서 승리를 이어가던 명장들은 운흥사에서 만나 작전을 짰다.
이순신 장군이 전략을 위해 운흥사를 찾은 것만도 무려 세 번이나 됐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을 승리로 이끈 총사령부가 바로 운흥사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이듬해 조선군은 진주성 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 왜군은 치밀하게 준비하고 조선을 치러 왔다. 이에 맞서 진주성의 군과 민이 필사적으로 항전했으나 전멸당하고 만다. 이 때 운흥사도 불탄 것으로 추정된다.
사명당은 일본과 담판을 지어 조선인 포로들을 구해왔다. 목숨을 걸고 한 일이다. 그러나 조정은 이를 어떤 기록에도 남기지 않았다. 승병의 전투력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오히려 전쟁 후에는 절집에 무거운 부역의 의무를 짊어지웠다. 승려들은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의지로 적과 싸웠을 뿐인데 어쩌면 그때의 ‘양반’들은 승병의 힘이 두려워 그들을 핍박하고 무너뜨리고자 했을 것이다. 그 대단한 그러나 알량한 권력 때문이었던지 조정의 공식기록에서는 운흥사의 전투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왔다. 지방 유생들은 기록을 남겼다.
1624년 해명대사가 운흥사를 다시 세웠고 효종 2년(1651년) 중창됐다. 임진왜란 후 운흥사는 불가의 화원 양성소로 이름을 떨쳤다. 영조 재위 당시 불화사로 이름이 높은 의겸을 배출했다.
의겸 스님은 조선 숙종 재위 당시인 1730년 몇몇의 화사와 함께 괘불탱을 그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90년간 매년 봄이면 운흥사 마당에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싸운 승병, 지방의병, 관군, 수군들의 영혼과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영산대재가 열린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삼월 삼짇날은 임진왜란과 정묘재란을 치르는 7년 중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날이다. 숙종은 어명을 내려 가장 많은 승병이 산화한 삼짇날에 재를 올리라 했다. 전국 절집 중 유일한 승병 제사다. 아마 삼짇날이 승병의 희생이 가장 많았던 이유도 있겠지만, 임진왜란을 치르며 수륙의 명장들이 모두 운흥사에 모여 공을 세운 것 또한 이유이지 않을까.
불보살과 영가를 모셔오는 시련(侍輦), 영혼을 부르는 대령(對靈), 관욕(灌浴), 신중작법(神衆作法)처럼 일반적인 불교의례를 따른다. 좀처럼 보기 힘든 운흥사 괘불탱도 이날 하루만큼은 사부대중 앞에 서는 날이다.
영산대재를 세 번 보면 극락에 간다는 말이 있다. 게다가 1년에 한 번 괘불탱까지 볼 수 있으니 영산재가 있는 날이면 고성을 넘어 전국에서 불교신자는 물론 사진작가들까지 몰려온다.
29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영산대재가 올해는 코로나19를 피하지 못했다. 괘불탱의 나들이는 6월 20일로 미뤄졌다. 부처님 오신 날 봉축법회마저도 평 4월 초파일이 아니라 윤 4월 초파일로 연기됐다. 온 나라가 코로나19로 고생하는 지금, 부처님의 자비와 살핌이 있어야 할 텐데.

# 일흔을 넘겨 임진왜란에 앞장선 서산대사
서산대사는 양반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양친을 여의고 양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갔다. 성균관에서 글과 무예를 익힌 후 과거를 봤으나 떨어진 후 지리산으로 향했다. 산사에서 불경을 공부하다 문득 깨달음을 얻은 서산대사는 불법을 갈고닦아 승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벼슬을 하는 것은 본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길로 서산대사는 승직을 버리고 금강산과 묘향산을 다니며 불법수도에만 정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서산대사를 불렀다. 서산대사는 승병을 모으면서 동시에 전국 팔도의 사찰과 승려들에게 구국에 앞장서야 한다는 글을 보냈다. 임진왜란 당시 그는 이미 고희를 넘긴 노승이었으나 그가 이끌었던 승군은 1천500명이었다. 제자 사명대사와 합류한 후에는 명나라와 힘을 합쳐 한양을 되찾았다. 당시 팔도선교도총섭이라는 직책도 받았다.
그러나 워낙 벼슬에는 관심도 없고 필요도 없다 여겨 제자인 사명대사에게 물려주고, 서산대사는 불법을 공부하던 묘향산으로 다시 들어갔다고 한다.
서산대사가 북쪽의 묘향산에서 남쪽 끄트머리인 고성까지 왔다는 것은 대사가 남긴 ‘청허당집’에 남아있다.

一聲楚雲雁 孤帆遠客舟
한 소리는 구름 속 맑은 기러기 울음이요
외로운 돛단배는 먼 길 가는 나그네의 배


海色碧於天 兩兩飛白鷗
바다 빛은 하늘보다 푸른데
짝지어 나는 하얀 갈매기


悠悠萬萬古 城下水空流
유유히 흐르는 한 아득한 세월에
성 밑의 물은 속절없이 흐르네


誰知采芝人 今日獨登樓
누가 알리요, 지초 캐는 사람이
오늘 홀로 성루에 오른 줄을! 


성루에 올라 푸른 바다를 보며 깊고 깊은 생각에 잠겼을 서산대사는 이런 시를 남겼다. 제목이 ‘철성의 성루에 오르니 느낌이 있어(登鐵城城樓有感)’다. 이 시의 제목에 들어있는 철성(鐵城)은 고려시대까지 고성을 이르던 옛 지명이다.

# 운흥사에 머문 승군 명장, 사명대사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이자 승병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스승과 함께 승군을 이끌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부모님을 연달아 여읜 후 김천 직지사로 출가한 사명대사는 봉은사 주지로 천거됐지만 사양하고 묘향산으로 향했다. 묘향산에서 평생의 스승이자 동지였던 서산대사를 만나 선리(禪理)를 참구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근왕문(勤王文)을 보내왔다. 그리고 스승인 서산대사는 격문을 보내 이 땅을 살리는 데 지체없이 일어설 것을 당부했다. 사명대사는 승병을 모아 순안에서 활약했다. 사명대사가 지휘하던 승군은 6천 명에 이르렀다. 사명대사가 운흥사에 머무는 동안 이순신 장군은 수륙양동작전을 논의하기 위해 세 차례나 찾았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사명대사는 외교력도 뛰어났다. 1604년 대마도주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일본의 새 통치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조선이 강화에 응하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을 수도 있다 했다. 선조는 사명대사에게 대마도를 방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재침 위협이 사실인지 확인하라는 명을 내렸고 사명대사는 대마도로 향했다.
사명대사는 우선 대마도에 3개월을 머물다 예정에 없이 일본 본토로 가서 1605년 도쿠가와 이에요시를 만났다. 사명대사는 도쿠가와에게 일본은 조선을 재침략하지 않는다, 상호화평의 상징으로 통신사를 교환한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을 송환한다, 전란 중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자를 조선에 인도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 3천여 명이 합의 다음해 5월부터 조선에 돌아올 수 있었다.
포로가 송환된 후 사명대사는 사실을 왕에게 전한 후 가을에서야 묘향산에 들어가 스승인 서산대사의 영전에 절을 올릴 수 있었다.

# 고성총쇄록에 기록된 운흥사
역사적, 호국적 가치가 높은 운흥사지만 공식적인 기록은 많지 않다. 다행히 고성총쇄록에는 운흥사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나온다.

“불우(佛宇) 법천사는 고을 북쪽에 있다. 운흥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내원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안정사는 고을 동쪽에 있다. 문수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장의암은 고을 동쪽에 있다. 용화사는 고을 남쪽에 있다.”

오횡묵이 부사로 재직할 때는 통영이 고성의 관할이었다. 때문에 고성총쇄록에서는 용화사를 고을 남쪽에 있는 사찰로 설명한다. 북쪽에 있다는 법천사는 지금은 계봉화상비와 몇 기의 부도만 확인될 뿐 흔적조차 명확치 않다.
고성총쇄록에서는 운흥사를 방문한 부사가 절집을 둘러보고, 감흥을 전하기도 했다.

“새벽에 덕치를 출발해서 내원동, 석지, 와룡동을 지나 운흥사에 들어가니 여기가 바로 삼한(三韓)의 옛 큰 절이다. 골 어귀에 혜월당의 비석이 있고 돌아서서 절로 들어갔다. 대웅전이 중앙에 있고 북쪽에는 시왕전이 있고 남쪽에는 나한전이 있고 서쪽에는 극락전이 있고 동쪽에는 칠성각, 천진암이 있고 동쪽 벼랑에는 일곱 기의 부도가 있는데, 응화, 홍찬, 포연, 경선, 기삼, 도현, 긍전 등이 그 승려들이다. 두루 도량을 관람하니 흰 구름이 골짝에 잠기고 흐르는 물이 시내에 울린다. 홀연히 옛날에 용이 누워 있던 곳인가 싶은데 와룡산이 바로 주산이다. 어린 소나무와 아름다운 대나무가 몇십 리의 산을 둘러 있는데, 무너지는 주추와 기울어진 기둥이 사람으로 하여금 황량한 누대의 탄식을 일으키게 한다.”

이 기록에서는 운흥사에 대해 ‘삼한의 옛 큰 절’, ‘무너지는 주추와 기울어진 기둥’이라는 설명이 등장한다. 19세기 말에 기록한 것을 고려하면 이미 그 이전부터 운흥사는 옛 영화를 서서히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와룡산 운흥사의 중 금영(錦泳)과 취관(取寬)이 찾아와서 좌반(佐飯) 한 그릇을 드리고 이야기하기를 ‘본 사찰이 산중에 있지만 과연 오래된 사찰인데 근래에 이웃 마을 나무꾼이 함부로 폐단을 지어 하나하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별다른 금령이 있은 연후에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했다.”

운흥사 주변의 숲이 울창한데 오랜 기간 남벌로 인해 폐허가 되고 있다며 운흥사의 두 승려가 부사에게 호소했다는 것이다. 오횡묵은 이와 관련한 시도 지어 읊었다.

“또 말하기를 “수십 년 전에는 이 골짝 안 30리가 모두 한 아름 되는 큰 소나무들이었는데, 통영사또가 금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인해 일곱 고을 나무꾼이 일시에 마구잡이로 베기를 매일 수천 명씩 하니 십일도 안 되어 이렇게 민둥산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로 중들도 점점 줄어들고 불당도 훼손되어 저절로 퇴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몇 해 전에 통영에 하소연을 해서 겨우 오늘의 모양을 이룬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모두 한탄하니 나도 마음에 분함이 있어, 그 일을 시로 읊었다.

내 들으니 운흥사
삼한시대부터 복지로 소문나,
사방에 산이 둘러 30리 한 지역에
아름드리 소나무 울창하였네.
한 가지도 도끼와 자귀의 남벌을 막아
승려 많고 사찰 부유 이익 많았네.
아첨하는 사람의 요설 나무의 재앙 되어
추상같은 새 명령 대원수 같았네.
하루아침에 민둥산 불모지 되니
돌부처도 그 일에 눈물 흘릴 일.
오정장사의 신검은
어찌 탐욕의 머리 자르지 않는가?”


오횡묵은 옛 삼한시대부터 존재했던 오래되고 큰 사찰이 쇠락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런 기록들을 남긴 오횡묵은 조선 말기 문신으로, 그가 고성부사로 재임하던 1893년 1월월부터 1894년 11월까지 고성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고성총쇄록을 통해 당시의 고성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불법밀반출된 운흥사 동종이 도쿄 네즈박물관에 방치되다시피 전시돼있다.
ⓒ 고성신문

# 밀반출된 동종, 일본 개인미술관에 방치
일본과 상황이 악화일로를 걷기 전, 도쿄에 갈 일이 있었다. 도쿄 미나토구 오모테산도는 일상과 예술이 어우러진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오모테산도역에서 그리 멀지 않고, 찾기에도 어렵지 않은 곳에 네즈미술관이 있다.
네즈미술관은 네즈 가이치로가 7천 점이 넘는 자신의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해 만든 사립미술관이다. 도부 철도사장 등을 지낸 사업가 네즈 가이치로는 일본은 물론 조선과 중국의 예술품에도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네즈 가이치로는 메이지 유신 후 폐가가 돼가던 다카기 가문의 저택을 1906년 사들인 후 정원을 만들었다. 전통 일본식 정원이니 모르고 갔다면 퍽 아름답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일제강점기에 밀반출된 우리 문화재 중 일부가 오모테산도에 있는 네즈미술관에 있다고 했다. 또한 그 중 하나가 운흥사에 있던 범종이다.
미술관에 입장한 후 후원으로 나가려면 계단으로 이동해야 한다. 내려가는 계단의 후미진 곳에 범종이 방치되다시피 전시돼있다. 자칫하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설명하는 작은 팻말에는 ‘범종’과 함께 ‘운흥사’라는 이름이 분명히 적혀 있다. 고성 운흥사에서 밀반출된 동종이다.
높이 1m 5㎝인 종의 표면에는 ‘고성현 서령 와룡산 운흥사 대종’이라고 음각돼있다. 용 두 마리가 이어진 종의 고리, 몸통의 관음보살과 함께 하단에 김애립이라는 이름과 시주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있다. 김애립은 조선 숙종 당시 최고의 주종장이었다. 설명판에도 김애립이 만든 운흥사의 범종이며, 강희(康熙)29년인 1690년에 제작됐다는 사실이 명기돼있다.
일본은 1937년 태평양전쟁 당시 군수품을 만들기 위해 조선에 금속공출령을 내렸다. 1940년 네즈미술관 개관 이전부터 운흥사 범종이 일본에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운흥사 범종이 금속물품들과 뒤섞여 같이 공출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자취를 감춘 운흥사 동종이 네즈미술관의 구석에서 발견된 것이다. 어느 절에나 다 있었던 범종이 2010년대 초반까지 운흥사에만 없었던 이유다.
네즈미술관 측은 1945년 3월 도쿄대공습으로 관련서류가 모두 불타 반출과정과 시기를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니 불법반출됐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점을 들어 반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운흥사 동종을 비롯해 네즈미술관에 소장된 우리 문화재들이 반환대상으로 언급된 적이 있다. 그러나 네즈미술관의 문화재들이 개인소장품이라는 이유로 반환품목에서 제외됐다. 남의 것을 탐하는 것만도 죄가 되는 법인데 몰래 가져간 것도 모자라 되돌려주지도 않겠단다. 운흥사는 네즈미술관 측에 정밀복제를 요청했지만 그것마저도 아무 답이 없다.
와룡산은 향로봉이라고도 불린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민족정기 말살을 위해 지명까지 바꿨다. 그 틈에 용이 누워있던 와룡산은 산이 아닌 봉우리가 된 것이다. 동종도, 절집을 안고있는 산의 이름도 일제에 의해 모두 사라져버렸다. 되찾아야 할 일이다. 그리고 1천500여 년 호국사찰의 역사만큼은 잊지 말아야 한다.

“본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황수경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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