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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 일본인의 발걸음이 닿지 않게 하리라

100년을 거슬러, 기억해야 할 역사를 마주하다
조선의 건축왕, 미스터리 독립운동가 정세권
서울 북촌한옥마을 정세권 선생의 손에서 탄생
낙원동 300번지 자택이 조선물산장려운동 본부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교육에 적극적으로 투자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7년 09월 04일
글 싣는 순서
① 고성독립운동, 잊혀진 현장을 찾다
② 고성청년들, 일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다
③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조선인이오
④ 꺼지지 않는 조선독립의 불꽃 서울에서 피다
⑤ 조선 독립의 열망,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다

탑골공원을 지나 낙원악기상가 아래 삼일대로를 지났다. 지도에서는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지점이 거기요, 하고 깜빡이는데 도통 어딘지를 모르겠다. 다시 탑골공원으로 되돌아가기를 여러 번 끝에 찾은 곳은 처음의 그 지점이다. 수십 년간 한 자리를 지켜온 낙원악기상가를 마주하고 섰자니 지도앱이 당신이 있는 거기가 거기다, 한다.
ⓒ (주)고성신문사
ⓒ (주)고성신문사

#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300번지
1960년대 당시 파고다공원이었던 탑골공원에 서양식 아케이드가 들어섰다. 탑골공원을 빙 둘러 상가들을 만든다고 했다. 공사가 시작되면서 낙원동 300번지는 헐렸다.
그때 공사를 하겠다며 서류에 도장을 찍어줬던 이들은 알고 있었을까. 그들이 허물어도 좋다고 허가하는 그 건물이 사실은 조선물산장려운동의 본거지였고, 서울 최고의 관광명소가 된 북촌한옥마을을 세운 건양사가 있었던 건물이었고, 미스터리 독립운동가라 불리는 정세권 선생이 살던 집이다.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낙원악기상가 아래 삼일대로는 여전히 어두컴컴하고, 차가 막히고, 사람들은 여전히 바삐 오가는데 낙원동 300번지는 삼일대로가 지나는 어느 한 지점이 됐을 뿐이다.낙원동 300번지는 희미한 흑백사진 속에서 탑골공원의 팔각정 너머로 삐죽 솟은 절반 정도의 모습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곳을 기억하는 이들은 자꾸만 사라지고 있다.

# 미스터리 독립운동가 정세권
정세권 선생을 두고 일부에서는 ‘미스터리 독립운동가’라고 한다. 백범 김구 등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이 그에게서 독립운동자금을 건네받았다. 그러나 그는 집장수로 불릴 뿐이었다. 그런데 이 집장수의 행적이 평범치는 않다. 1888년 하이면 덕명리에서 태어난 정세권 선생은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였다. 당시 3년제였던 진주사범학교를 단 1년만에 졸업한 그는 18살의 나이에 하이면장을 맡았다. 하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경술국치를 맞았다. 
그는 돈을 벌어 고향의 초가집들을 번듯한 기와집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안고 고향 고성을 떠나 경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경성은 고성 시골길보다 더 더럽고 궁핍한 삶의 집합소였다.1920년 회사령이 철폐됐다. 그는 본격적으로 부동산사업에 뛰어들었다. 건양사를 세우고 집을 지어 팔기 시작했다.1920년대 초 일본인들은 한강 이남지역에 주로 살았고, 조선인들은 북촌으로 불리는 한강 이북지역에 주로 살았다. 
정세권 선생이 건축사업에 뛰어든 당시는 일제가 북촌에 눈독들이고 있던 때였다.가회동은 고관대작들의 집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조선의 근간을 이룬 곳이었으니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일제에게 내놓을 수가 없었다. 정세권 선생은 낡은 집들을 허물고 한옥을 짓기 시작했다. 가회동과 익선동에서 시작된 그의 한옥 건설은 멀리 행당동까지 이어졌다. 서울이 그의 한옥으로 뒤덮였다. 누가 봐도 조선의 땅이었다.

# 조선 땅의 자립과 자유를 위하여
정세권 선생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한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서도 활약했다. 1920년대부터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일었다. 국산품을 사용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나아가 이 나라를 되찾자는 것이 취지였다.경성의 가장 노른자위땅이었던 낙원동 300번지에는 그의 4층집이 있었다. 1층은 건양사였고, 2층은 조선물산장려회가 생산한 물품들의 전시장이었으며 3층이 그의 집이었고 4층은 조선물산장려회의 사무실이었다. 
그의 집은 때로는 조선 팔도에서 올라온 실이 천으로 가공되고, 옷이 되는 공장이기도 했다. 1층에는 건양사 간판과 조선물산장려회의 간판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밤이면 은밀하게 정세권 선생을 방문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럼 정세권 선생은 또한 조용히 뭔가를 건넸다. 그는 집들을 지어 판 수익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선뜻 내놨다. 
고향마을에 학교를 짓기도 했다. 그리고 땅을 사들여 조선어학회 부지로 희사했다. 활약상을 꼽자면 한도 없다.1960년대 중반 정세권 선생의 집이자 조선물산장려회의 본부였던 이 건물은 헐렸다. 가족들에게 정부의 통보가 갔다. 낙원동 300번지가 헐릴 예정이니 관심 있으면 사진을 찍어가라고.# 나라의 발전과 독립의 근간은 교육정세권 선생은 가난 때문에 교육받지 못한 채 무지렁이로 사는 고향의 아이들을 위해 당시 돈 2천 원을 쾌척, 덕명간이학교를 세웠다. 
1993년 폐교된 하이초등학교 덕명분교의 전신이다. 나라의 발전, 독립의 근간은 교육이라는 생각에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민족교육기관인 양사원을 세웠다. 만주동포구제회를 만들어 김좌진 장군의 유족 등 만주의 조선인들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민족교육을 받게 했다. 
이쯤 되면 건설회사인 건양사는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조선물산장려운동을 하던 중 정세권 선생은 이극로를 만났다. 정세권 선생은 이극로의 활동을 지지했고, 당시 조선말큰사전을 준비 중이던 조선어학회에 발을 들이게 됐다. 종로구 화동 129번지 땅을 조선어학회 회관 부지로 내놨다.하지만 일본에게 정세권 선생은 요시찰인물이었다. 일제가 가만둘 리가 없었다. 조선어학회 동지들과 정세권 선생은 이북의 형무소로 끌려갔다. 그는 동지들을 위해 재판자금도 부담했다.
건양사가 한참 북촌에 한옥을 지을 당시 일제는 수 차례 회유했다. 일본식 집을 지으라고 협박도 하고 설득도 해봤지만 그때마다 정세권 선생은 일본집을 지을 줄 몰라 안 된다고 거부하던 터였다. 괘씸죄에 걸린 건지도 모른다.일제는 정세권 선생이 양사원 등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경제사범으로 몰아 자양동 일대의 3만 평이 넘는 부지를 압수하고 건양사의 건축면허를 취소해버렸다. 집을 지을 수 없으니 돈줄이 막혔다. 독립운동자금 조달도 쉽지 않게 돼버렸다.

# 정세권의 흔적은 돌 한 조각뿐
멀리 북한산과 인왕산이 보인다. 서울같지 않은 조용한 서울의 한복판에 북촌한옥마을이 있다. 아직도 사람들은 정세권 선생이 만든 집과 골목을 오가며 살고 있다. 몇 해 전부터인가 중국과 대만 관광객들이 북촌을 찾는다. 골목 곳곳에 있는 작은 상점에서 중국말이 들려오는 건 이제 예사다.정독도서관에서 출발해 북촌로를 따라 거스르다가 골목골목을 둘러보며 다시 정독도서관으로 향하는 코스를 택했다. 어딘가에 그의 흔적이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기대에 찬 마음으로 출발했다.한복을 입은 중국인, 대만인들이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남기기 바쁘다. 사설 전망대에 올라 북촌을 내려다보니 멀리 청와대와 인왕산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로 고만고만한 기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있다. ㅁ자로 빙 두른 집안에는 작은 마당과 함께 수도가 있다. 
좁은 골목길에는 화분이 있기도 하고, 50년 전쯤 붙였을 것 같은 빛바랜 간판과 글자들이 아직도 남아있기도 하다.삼청동과 안국동까지 다다랐다. 풍문여고 근처 별궁길을 따라 걷는데 종아리 높이쯤 되는 검은 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조선어학회터. 정세권 선생의 흔적이었다. 그 수많은 일들 가운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정세권 선생의 손끝에서 탄생한 한옥들 그리고 이 책 한 권만 한 돌 한 조각이었다.일제도 그리고 광복 후의 우리 정부도 그런 기록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일본은 알고 싶지 않았겠지만 우리 정부에서는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체기가 일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주)고성신문사
“조선의 건축왕 정세권, 평가는 지금부터다”
김경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

“관광명소가 된 북촌8경 등 서울 곳곳의 한옥마을들을 누가 처음 지었을까 싶었어요. 아주 작은 관심에서 시작됐는데 여기저기서 정세권이라는 이름들이 나오더라고요. 결국 건축을 넘어 한국 근현대사와 독립운동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정세권이라는 인물의 삶을 재구성하게 됐습니다.”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김경민 교수는 하버드대학에서 도시계획·부동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운동사나 근현대 역사와 관련이 있는 연구가 아니었다. 우연히 만나게 된 조선의 디벨로퍼 정세권 선생의 기록들은 어느 한 지점이 아니라 서울과 만주, 고성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기록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제대로 밝혀내지 않은 이야기였다.
“정세권 선생은 100년 전 경성 도시계획의 선각자였고 누구보다 열정 가득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의 족적이 너무나 거대해 마치 퍼즐조각을 맞추듯 하나하나 기록과 자료를 모아야 했어요. 선생의 행적이 지금처럼 눈에 보이기까지 5년이 걸렸습니다.”김경민 교수는 유족들도 수 차례 만났다. 
그리고 생전 “사람수가 힘”이라고 했다거나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기도 했다.
“경성 전역에 한옥집단지구를 조성한 정세권 선생은 경성의 지도를 재편하고 도시 전체를 바꿨습니다. 선생은 근대 도시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도시 문제, 주택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대단위 택지를 조성해 많은 사람들에게 주택을 공급하는 근대적 디벨로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겁니다. 그와 동시에 일제에 항거한 인물이지요. 정세권 선생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김 교수는 연구 끝에 정세권 선생이 익선동 166번지 개발을 시작으로 가회동과 삼청동 일대의 북촌한옥마을을 만들었고 성북동과 혜화동은 물론 서대문과 왕십리에 이르기까지 경성 전역에 근대식 한옥단지를 조성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 기록들을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라는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정세권 선생은 1920년대 일제로부터 조선인들의 주거공간을 지켜냈습니다. 시대를 읽는 사업가로서의 통찰력과 기획력은 물론 사람들을 이끌어 일제에 맞서게 하는 힘을 가진 인물이었어요. 사업가가 인허가권을 틀어쥔 정부와 척을 진다는 건 자살행위였습니다. 그런데도 당당히 일제에 맞선 선생의 민족의식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집장사로 폄하하는 분위기가 정세권 선생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게 만들었어요.”
김경민 교수는 1920~1930년대 근대식 한옥을 규격·표준화해 집단지구로 개발한 정세권 선생의 사례를 서구의 도시개발과 비교연구할 계획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정세권 선생의 도시개발을 국제학계에 알리는 일이 계획돼있다. 
김경민 교수는 말한다.“경성을 바꾼 건축왕이자 미스터리 독립운동가 정세권 선생에 대한 평가는 지금부터입니다.”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7년 09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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