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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가, 그들의 피 맺힌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100년을 거슬러, 기억해야 할 역사를 마주하다
최낙종, 고종 인산 갔다가 만세운동 참여
고성 최초 구만 국천변 만세운동 주도
조선일보 기자 거쳐 일본행, 아나키스트 활동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7년 08월 28일
글 싣는 순서
① 고성독립운동, 잊혀진 현장을 찾다
② 고성청년들, 일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다
③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조선인이오
④ 꺼지지 않는 조선독립의 불꽃 서울에서 피다
⑤ 조선 독립의 열망,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다

단발령이 떨어져도 상투를 틀고 갓을 썼던 선비였다. 성격은 대쪽처럼 꼿꼿했다. 한학을 공부했다. 그냥 그렇게 평범하게 살 것 같았다.
1919년 1월 21일.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이 갑작스럽게 훙거했다. 인산을 이틀 앞둔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은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내 탑골공원에서는 대한독립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한성에 올라갔던 최낙종 선생과 최정철 선생도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이 나라에 태어나 살고 있는데,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주)고성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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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를 되찾기 위해 우리도 움직여야 하오
최낙종 선생은 서부 경남 의거에 앞장섰던 진전 사람 변상태를 통해 독립선언서를 입수했다. 구만면으로 돌아온 최낙종 선생은 허재기, 최정주, 최낙희, 최석호, 이종선, 문태룡, 우태선, 김해제, 구남서 등 유림동지들에게 한성의 정세를 전했다. 그들은 밤이면 당시 구만면사무소 바로 옆이었던 최 선생의 집 사랑채로 은밀히 모여들었다. 
고성에서도 한성의 3.1 만세운동 같은 거사를 일으키자 결의했다. 구만면서기였던 의재 이종흥이 쉽고 간단하게 쓴 독립선언서를 격문과 함께 구만면사무소에서 필사했다. 그리고 구만면 12개 마을과 마암면, 개천면, 영오면, 회화면에도 전했다.거사일은 3월 20일. 최석호 선생이 최낙종 선생의 집 뒤 당산에 올랐다. 손에는 나팔이 들려있었다. 
오후 1시, 나팔소리가 구만면 전체로 뻗어나갔다. 1천여 명이 천변 사장으로 몰려들었다.최정원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허재기 선생이 공약삼장을 낭독했다. 최낙종 선생이 선두에 섰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열은 10리길을 걸어 서서히 배둔장으로 향했다.일본헌병과 경찰들이 달려왔다. 총칼을 들이대며 만세 소리를 멈추라 했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다. 군중들은 헌병을 둘러싸고 성토했다. 나팔을 든 이들은 일본헌병과 경찰의 귀에 대고 나팔을 불어대며 조롱하고 저항했다. 국상 중이라 평양립을 쓰고 있던 최정주 선생은 헌병에게 호통을 쳤다. 헌병대는 결국 길을 터줄 수밖에 없었다.최낙종 선생이 이끄는 대열은 서찬실, 김갑록, 김동기 선생이 이끄는 회화면의 시위대와 합류했다.일본헌병대는 시위대 몇몇을 붙들고 제압을 시도했다. 최정주 선생은 이번에는 호통으로 끝낼 상황이 아니었다. 일본헌병대의 엄지손가락을 꺾고 붙잡힌 동지들을 구했다. 배둔장날에는 하루종일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이어졌다.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대열은 해산했다. 이것이 고성군 최초의 성공적인 만세운동이다.

# 적의 심장부, 일본 도쿄로 향하다
밤이 찾아왔다. 구만면민들과 집으로 돌아온 최낙종․최정원․허재기 선생 등은 다시 한 번 최낙종 선생의 집에 모여 이번에는 일본 정부의 녹을 먹고 사는 한인 관리들에게 하루 속히 용퇴하라는 내용을 담은 ‘한인관리퇴직권고문’을 등사하기 시작했다. 
권고문은 구만면사무소 정문에 나붙었다. 그리고 다음날 이 권고문을 전국의 관공서로 발송했다. 다음날 전국 팔도와 군의 관공서로 보낸 최 선생의 동지들은 결국 일제에 검거됐다.최낙종 선생은 피신해 서울로 향했다. 이듬해, 29세였던 그는 조선일보의 기자로 함흥에서 활약했다. 그때의 조선일보는 친일경제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기관지로 허가받아 창간됐음에도 불구하고 반일적 논조를 보였다. 잠시 기자생활이 이어졌다.당시 도쿄에는 친일파 박춘금을 중심으로 한 상애회가 횡포를 일삼았다. 3.1운동 전후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몰려들자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총독부가 사주해 조직한 것이 바로 상애회다.최낙종 선생은 또 하나의 큰 뜻을 품었다. 일본 도쿄로 가기로 했다. 적의 심장부였다. 그의 움직임은 조용했다.

# 재일조선인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하여
도쿄로 건너간 최낙종 선생은 은거하면서 주말이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인유학생들과 교류했다. 그러다 1924년, 최낙종 선생은 조선인 위생인부들을 대상으로 조선동흥노동동맹을 조직하고,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해 활동했다. 조선동흥노동동맹은 1920년대 초반 당시 재일조선인노동단체 중에서는 가장 큰 단체였다.최낙종 선생은 김승팔, 이동순 등과 함께 재일노총의 중앙집권주의에 대해 비판했다.
1927년 9월 열린 제3회 정기총회에서 최낙종 선생은 조선동흥노동동맹은 자유연합주의단체로 전환할 것임을 결의했다. 이때부터 해체되는 1937년까지 동맹은 조선자유노조와 함께 아나키즘 계열의 대표 노동운동단체로 활동했다.최낙종 선생은 또한 흑우회에서 활동했다. 
검은 색으로 상징되는 아나키스트 즉 무정부주의. 흑우회는 한인 아나키스트 사상단체였다. 최근 영화를 통해 알려진 박열 선생과 활동시기가 겹친다. 그들은 동지였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조선인이오
와세다대 정문 근처 
한글 인쇄소 삼문사 경영
옥고 치른 후에도
노동자 권익보호 앞장
광복 2개월 전 눈 감아
해방 후 도쿄서 추도식
ⓒ (주)고성신문사
ⓒ (주)고성신문사

# 활자 하나에 항일정신을 담다
1920년대 중반, 최낙종 선생은 한글 인쇄소인 삼문사를 인수했다. 17세 아래인 막냇동생 최낙봉(봉도) 선생의 도움이 컸다. 당시 동생의 거처는 와세다대학 근처였다. 최낙종 선생이 22살, 막냇동생이 5살이었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은 12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향했다. 
온갖 궂은 일들을 해가며 한 푼 두 푼 모아 고물상과 자전거방 등을 운영했다. 그렇게 모은 자금으로 인쇄소를 인수했던 것이다.최 선생은 김택, 이혁, 서상한, 변영우 등 동지들과 손을 잡고 월간 동흥노동을 발행했다. 
재일한인사회의 유일한 지하언론이었다. 그는 항일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흑색신문을 발간하기도 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최낙종 선생은 아나키스트였고,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색은 검은색이었다. 
그 외에도 재일본기독교회지, 천주교잡지와 개벽 등 우리말 잡지를 발간하는 것은 물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인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 시인 이용악의 제1시집 분수령과 이후 낡은집 등의 시집, 항일 저항사상을 담은 여러 출판물들을 찍어냈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조선유학생과 독립운동자금으로 내놨다.1925년, 최낙종 선생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출판법 위반으로 벌금 40원을, 1926년에는 국가총동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과 벌금 30원을 언도받았다. 
수 차례 피체돼 옥고를 치르면서도 그의 우국애족 정신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출소해서도 여전히 그는 삼문사를 경영했고, 재일한인노동자들과 노동운동을 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 광복 직전, 후쿠시마에서 눈감다
1928년에는 나가노현 산중의 수력발전소 공사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무자 200여 명이 정당한 이유 없이 노임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최낙종 선생은 트럭 3대에 동맹단원들과 나눠타고 경찰서를 찾아가 부당함을 따지고 추궁해 결국 노임을 받아내기도 했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낙종 선생은 일제에겐 눈엣가시였고 요시찰인물이었다. 
인쇄소에는 늘 일본경찰이 상주하며 감시하는 형편이었다. 일제는 선생을 협박하고 회유하며 굴복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는 뜻을 결코 굽히지 않았다.일제강점기 말, 일제는 더욱 악랄해졌다. 최낙종 선생의 삼문사는 결국 폐쇄됐다. 
편집자였던 김택 선생은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일본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최낙종 선생 역시 피체돼 재판에 회부, 1년 6개월의 형을 언도받고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의 고쓰기형무소에 수감됐다. 옥살이가 거듭되면서 병이 쌓여갔다. 사경을 헤매는 형편이 되자 형은 집행정지됐다. 출옥했어도 그는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출옥 후 한 달 만인 1945년 6월 8일 오후 2시. 그는 후쿠시마에서 광복을 2개월 앞두고 그는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해방 후인 1945년 12월 26일. 도쿄에서는 추도회가 열린다. 재일조선인연맹, 조선건국촉진회, 조선민중신문사 등 동포단체가 최낙종 선생의 위업을 찬모하는 자리였다. 추도식에서는 우익교포단체인 재일조선인연맹과 조선민중신문사장 이윤우가 추도사를 낭독했고, 조선건국촉진회 소속 박열 선생이 친필 추도사를 헌정했다. 
박열 선생은 최낙종 선생의 막냇동생이 추도식에 참가할 수 있도록 주선했고, 막냇동생은 추도식 후 형님의 유해를 고향으로 모셔왔다. 최낙종 선생의 아버지 최원모 옹은 아들이 조국독립을 위해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등사하던 구만면사무소에 직접 아들의 사망신고를 해야 했다. 선생은 1980년 제1279호로 건국포장을 추서받았고, 1987년에는 창의비를 건립, 10년 후인 1990년에는 다시 제2737호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 일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된 독립지사
일본행을 결정짓기 전 고성의 독립지사들을 한 분 한 분 살펴봤다. 수많은 분들이 이 땅의 잃은 빛을 되찾기 위해 삶을 바쳤다. 어느 한 분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기록들이었다.
하지만 최낙종 선생은 고성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지만 정작 고성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대로 묻어두기에는 너무 많은 일들을 했고 우리는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자 최연도 씨와의 인터뷰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기도 한 터였다. 마지막 투옥 당시 감옥 안에서 최낙종 선생은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 후에 알고 보니 주사는 약이 아닌, 바닷물이었다. 바닷물이 인체에 투입됐을 때 어떤 작용을 하는지에 대한 생체실험이었다. 일명 마루타였다. 
그리고 그 실험은 최낙종 선생만이 아니라 민족시인인 윤동주도 맞았다고 했다. 참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다. 아는 단어가 모자라 말로는 표현할 수도 없는 기분이었다.일본에서 노동자들을 규합하고, 항일운동을 펼쳤으며 무정부주의자로 살았던 그의 삶이 궁금했다.

# 나라와 백성의 자유를 꿈꾼 그 곳
최낙종 선생이 경영한 삼문사인쇄소의 주소는 東京市 淀橋區 戶塚町 一丁目 253. 하지만 이 주소는 이미 1947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삼문사는 일본경찰의 경비와 압박으로 주소가 자주 바뀌었다.
서너 개의 주소들 중 두 군데가 유력한 후보였다. 다카노바바와 토츠카. 다카노바바는 전철역도 있으니 찾기 수월해보였다. 하지만 토츠카는 오래된 지명이었다. 우선 부딪혀보기로 했다. 와세다대학의 정문이 더 가까운 쪽이 삼문사 터일 것이란 막연한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다카노바바는 대학 몇 곳이 근처에 있어 술집과 식당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와세다대학의 서쪽이었고 정문 바로 앞이라기엔 1㎞ 이상 떨어져 있으니 거리가 꽤 멀었다.토츠카는 잘 쓰지 않는 지명이었다. 지나는 학생들과 주민들에게 물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반갑게도 한국어가 들려왔다. 
마침 그 근처에 산다는 교포 아주머니였다. 독립운동가가 경영했던 인쇄소가 토츠카에 있는데 못찾겠다고, 혹시 못들어봤냐고 물었다. 한국어로 된 지도를 보여주며 아마도 이 근처인 것 같다고도 했다.교포 아주머니는 일본 지도 사이트까지 뒤져가며 토츠카를 찾았다. 토츠카는, 바로 우리 등 뒤에 있었다.삼문사는 와세다대학의 정문에 바로 접해 있었다. 지금은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고,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나는 이들에게 다시 물었다. 이 자리에 인쇄소가 있었던 것을 혹시 아느냐고.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삼문사가 사라지고 없으니 조선동흥노동동맹 사무실을 찾는 것 역시 그다지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동맹 사무실도 마찬가지로 1920년대 당시 주소 달랑 한 줄뿐이었다. 東京市 小石川區 言取訪町 54. 아무리 들여다봐도 읽을 수조차 없는 주소였다.
택시를 타고, 말도 통하지 않는 노기사에게 주소를 내밀었다. 도통 모르겠다며 일단 근처에 내려주겠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답답한 마음에 포털사이트에 질문을 올렸다. 지금 주소가 대강 어딘지 알려달라고 했더니 오랜 시간 일본에 살았던 이의 답글이 달렸다. 대강의 위치가 나왔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마치 최낙종 선생을 눈앞에서 대면한 것처럼.하지만 희망이 절망이 되는 건 순간이었다. 
겨우 찾아낸 주소지는 이미 유료주차장으로 바뀌어있었다. 자그마한 사무실 하나쯤은 될 법한 공간이긴 했다. 이 곳에서 최낙종 선생은 나라의 독립과 조선인의 자유를 꿈꿨겠구나, 생각하니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그 자리에서 가슴 속에 뜨거운 뭔가가 울컥 솟아올랐다.일본행의 성과는 표면적으로는 분명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흔적 없이 사라진 그 곳에 100년 전에는 고성사람들의 당당한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뿌듯함과 또한 지금은 이 땅에서 사라지고 없는 그들에 대한 존경심, 경외심을 또 한 번 새김질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생각했다. 이 나라의 자유는 100년 전 그들이 그렇게 꿈꿨고 또 그들이 없었다면 이 자유를 누리지 못했을 것임에 감사해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그들의 삶과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고. 그래야 이국땅에서 사라진 그들의 영을 위로할 수 있을 일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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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에 찬 재일한국인의 삶은 근대 역사의거울입니다”

이성시 재일한인역사자료관장

“재외한국인이 700만 명에 이릅니다. 그 중에서도 재일교포는 역사적으로도 조금 특별한 의미가 있지요. 우리는 디아스포라(이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재일한국인의 역사는 조부모시대의 이야기고, 기성세대에게는 부모 혹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입니다. 재일한국인의 삶은 근대 역사의 거울입니다.
”이성시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제2대 관장은 재일한국인의 역사와 삶은 현재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재일한국인들이 1987년경 처음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본다면 올해는 120년을 맞는 해다. 그리 머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인 것이다.조선총독부의 토지수탈이 본격화되고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일본 내 노동력이 증가했다. 1910년대만 해도 일본에 살고 있던 한국인은 유학생과 단기노동자들로, 2천500명 정도에 그쳤다. 
노동자들은 주로 노임이 좋았지만 전문적인 지식은 필요하지 않은 탄광이나 철도부설 현장에서 일했다. 일본에서 일자리를 얻은 후 자리잡히면 조선의 가족을 불러들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까지는 매년 8~15만 명의 조선인들이 일본에 도항했다. 또한 30년대 말부터는 국가총동원령 등으로 강제징용되는 조선인이 급증했다.“지난 100여 년 동안 우리 한국인들은 을사늑약과 식민지 지배 과정 등을 거치며 수많은 고난과 고초를 겪었습니다. 
일부 성공한 인물도 있지만 식민지배를 받는 나라 출신의 민초들이 편한 삶을 살기란 어려웠지요. 임금을 제대로 받는 것조차 힘든 시기도 있었어요. 말 그대로 고난의 역사입니다.”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의 수락으로 일본은 항복하고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 광복 당시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200만 명을 넘었다. 
그들은 지난한 일본에서의 삶 대신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그러나 남북의 분단과 대립, 콜레라 등 질병의 발생과 인플레이션에 의한 불안정한 조선의 정세 등의 정보가 흘러들어오면서 당분간 일본에 잔류하기로 결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60~70만 명의 조선인들은 일본에 남았다.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은 의식주에서부터 교육까지 모든 것을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규직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1952년의 통계에서는 61%가 백수였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일본 내에서 한국인의 위치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아졌어요. 자긍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외친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7년 0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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