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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고등학교 하경숙 교사는 1979년, 대학을 갓 졸업한 햇병아리 교사로 고성고 교단에 첫발을 내딛었다. 32년을 꼬박 교단에 섰으니 모든 청춘을 학교에 바친 셈이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교사가 꿈이었습니다. 통역장교였던 아버지 덕분에 자연스럽게 외국어와 접했고, 일본어 교사를 꿈꾸게 됐지요.” 하경숙 교사의 아버지는 “너희가 살아가야할 세대에서는 제2외국어를 모르면 앞서갈 수가 없다. 또 한국인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살아가려면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을 이해해야한다”고 말해왔다. 일찍이 글로벌 마인드를 심어준 아버지 덕에 그녀가 일본어 교사를 업으로 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도시의 큰물에서 놀고 싶은 것은 어느 젊은이나 마찬가지 아니던가. 처음 고성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았을 때는 실망도 했다. 고성고등학교를 들어서는 순간, 그 실망감은 봄볕에 눈 녹듯 사르르 사라졌다. 아담한 학교를 병풍처럼 둘러친 나무들이 아늑하고 평화롭게만 보여 그만 반하고 말았다. “고성고등학교에 근무하면서도 도시의 학교로 나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선생님을 부모님과 똑같이 생각하고, 저를 따르는 게 느껴지는데, 그 아이들을 떼어놓고 어떻게 떠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던 것이 3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동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마산으로 근무지를 옮길 기회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학교와 사랑스런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돌아설 수가 없어 번번이 거절해왔던 그녀다.
그간의 세월동안 그녀만의 교육철학도 생겨났다. ‘교사의 진심을 알면 아이들도 변한다’는, 진리와도 같은 그 말이 그녀의 교육관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제자들은 담임을 맡지 않았어도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그녀를 찾는다.
“첫부임했던 해 크리스마스였어요. 아이들과 함께 마산까지 가서 크리스마스 카드며 선물들을 사고, 그걸 학교에서 바자회를 열어 얻은 수익금으로 고성애육원과 독거노인들을 찾아 선물도 전하고 말벗도 되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참 재미있었던 시절이지요.” 제자들과의 일화들을 떠올리며 그녀는 헛살지 않았구나, 교단에 선 것이 새삼스럽게도 감사하다.
올해 29살인 큰아이가 10살 무렵, 남편이 대학원에 다니느라 바쁘던 시절의 일이다. 고성고등학교 개교 이래 처음으로 여교사인 그녀에게 부장이라는 직함이 주어졌다. 그러나 아이들만 둘 수가 없어 고심하다가 퇴근 후 아이들을 앉혀놓고 상황을 차분히 얘길 했다.
“엄마, 부장선생님 하세요. 제가 동생 챙기면 되니까 엄마는 걱정하지 마세요. 부장선생님 안하면 학교에서 다른 선생님들한테 미움 받잖아요. 동생은 내가 돌볼 수 있어요. 나는 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10살 된 딸아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는 하경숙 교사. 그녀는 교사이기 이전에 엄마였는데, 정작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큰 짐을 지우나 싶어 눈물이 쏟아지더란다. 그 아이가 이제 곧 서른을 목전에 놓고 있으니 세월도 무상하고, 감개도 무량하다.
“개인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우리 고성고등학교의 옛 명성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고성을 대표하는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고성고등학교, 예전의 고성고등학교가 되길 바랍니다.” 자신보다 먼저 학교를 위하는 그녀의 32년 교단생활은 언제나 봄꽃처럼 화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