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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승첩지인 ‘적진포’가 기존 통영시 광도면 적덕도라는 학설을 뒤엎고 거류면이라는 주장 제기돼 학계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지난 10일 고성문화원 부설 고성향토사연구소 이옥진(얼굴 사진)씨는 향토사연구소 연수회를 통해 ‘적진포’는 ‘거류면 화당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여지도서’에 기록된 ‘광해 6년 현의 남쪽에 있는 도선촌(남촌포)에 진을 설치하였다가 광해 11년에 적진포에 옮겨 소모진을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적진포를 남촌이라 하였다’는 문헌을 근거로 적진포가 화당리라고 설명했다.
남촌은 화당리의 옛 이름으로 지금도 화당리 입구에는 당시 관리로 파견됐던 별장(別將·종9품의 무장)의 비석 3개가 서 있는 것을 미루어 이곳이 적진포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김일용 통영향토역사관장은 지난 2006년 ‘임진왜란 적진포해전’이란 논문에서 적진포가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라고 발표해 사실상 적진포가 거류면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들추어 냈다. 김일용 관장은 그동안 사학계에서 적진포의 위치를 놓고 설왕설래하던 것을 자신의 논문을 통해 ‘지금의 당동마을은 옛 적지향이었으며 조선초기 향의 소멸로 인해 자연적으로 적진포라 불리게 됐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일용 관장의 논문에 이어 고성향토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적진포의 위치에 관한 연구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유홍렬씨는 2006년 7월 본지를 통해 적진포가 ‘거류면 신용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적진포가 마산시 구산면 돝섬을 지나 고성현(읍)과 맞닿는 가까운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위치상으로 통영시 광도면 적덕마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각종 문헌에서 고성군 당동만으로 확인됐다고 주장한 바 있다. 더욱이 그는 赤珍浦도 積珍浦(적진포)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積珍浦의 한자어 의미가 거류면 신용리 상원, 하원의 옛지명 ‘新里’의 어원과 같다는 것이다.
김성수씨는 “임진왜란 당시의 해전인 적진포해전은 그 지역이 오리무중이었다. 이희승, 조성도 선생이 밝힌 위치는 통영시 광도면 적덕리였지만 2006년경 고성지역의 향토사학자를 중심으로 당동리 또는 신용리로 발표를 하였다. 하지만 기존 사학계에선 동해면 적포만이 적진포를 포함한 해역이라고 공표하고 있었고, 땅이름 대사전에서도 동해면 내산리 일대라고 표기 하고 있었다”며 적진포는 곧 동해면 내산리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향토사학자들 사이 적진포가 구체적인 위치에는 다소 이견이 있지만 넓은 의미로 볼 때 고성군 거류면 당동만 일대라는데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향토사연구소 연수회를 기점으로 사학자들은 물론 고성문화원, 고성군 등이 뜻을 모아 적진포의 위치를 바로잡아 학계의 정설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일 대다수 군민들의 여론이다. 하기호 고성향토사연구소장은 “사학자들이 각종 문헌을 근거로 적진포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어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이순신 관련 전문가, 역사학자 등을 초청해 학술세미나를 열어 적진포가 고성군 거류면이라는 인정을 받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적진포가 거류면으로 인정받을 때 고성은 당항포대첩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승첩지로 더욱 위상이 높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적진포해전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고성땅(당시 통영시도 고성이었음)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모조리 격침시킨 해전을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