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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명수 원임전교
1895년 10월에 서울의 하늘 아래서 일본의 지휘관 하세기와의 도 아래 일본의 보병과 기병이 무력 모의를 하고 있었다.
하세기와의 기병 활동을 보고 조선인들은 모두 떨면서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많은 조선 병사들은 군복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한양 전역이 공포와 불안 속에 처해 있는데 일본의 이토히로부미는 하세기와를 인솔하여 고종황제를 배알하였다.
하세기와는 군복을 입고 고종황제 앞에서 무례한 폭언을 서슴지 않고 감행하여 조선이 망한 을사조약은 이렇게 하여 10년 후에 체결되었다.
이때 하세기와는 술수와 위협으로 조선을 복종 시켜야 했다.
고종황제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1895년 10월 8일 밤 왜군 제 10연대가 경북궁을 기습하여 왜군의 걸림돌이었던 명성황후 를 제거코자 흉칙한 계략과 술수로써 함정에 빠져있는 조선군 경호부 대장이 전사하니 병사들은 도망치고 순식간에 방어선은 무너지고 일본의 낭인(사무라이)이 고종의 침실로 들어서니 고종황제는 소리치면서 일어나려하자 낭인 1명이 손으로 주저 앉게 하였다.
다른 낭인 1명이 옆에 있던 세자를 칼로써 위협하여 기절시키자 고종황제는 당황하여 창백한 용안으로 눈앞이 캄캄하였다.
왜국의 낭인들은 황후와 궁녀들이 거처하는 방으로 무자비하게 침입하니 궁내부 대신이 힘을 다하여 이와 같은 무도한 무례배에 맞서 대항하였으나 낭인의 칼날이 궁내부대신의 한쪽 팔을 잘랐다.
그러나 대신은 비켜 서지 않고 대항하니 남은 팔마저 잘라버리고 문을 열고 들어간 낭인들은 조선별기군 제2훈련대장 우 모(고종실록 참조)의 방조(幇助)로 아주 빠르고 손쉽게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반항(反抗)하는 궁녀들을 모두 사살하였으니 아비규환(阿鼻叫喚)의 곡성(哭聲)이 진동하고 지긋지긋한 피비린내의 경황 속에서 황후의 시신을 끌어내어 불 태워 버렸으니 서울 장안에는 공포와 좌절감에 앞서 분노와 보복심의 울분을 견디어 내지 못하였다.
궁인들과 수비군들은 아연 실색하여 구명도생(救命圖生)으로 도망치니 그 처절한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이 같은 망국(亡國)의 책임을 일본에게 돌리면 마음이 편할까.
실패의 역사에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의 몫부터 찾는 것이 순서가 아닐런지.
의리(義理)를 태산같이 무겁게 생각하고 목숨을 홍모처럼 가벼이 여기는 충신(忠臣)이 없었기 때문이며 국난(國難)을 극복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선비와 살신구국(殺身救國)의 영웅(英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양(漢陽)의 사대문(四大門) 밖을 나서면 권문세가(權門勢家)의 땅을 밟지 않으면 한양을 벗어날 수 없었고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서는 권력가(權力家)의 종살이 하는 사람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국가를 경영하는 세금은 힘없는 백성들만이 부담 하였다고 당시 기록들이 전하고 있다.
그 민족과 국가의 성쇠(盛衰)는 오로지 그 민족 속에 선비와 의인이 있고 없는 데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그 당시 조정에서는 감투싸움에 치중하였고 국가의 위기는 강 건너 불구경처럼 하다가 나라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망국의 한을 호소하지 못하고 시련의 36년을 고통 속에서 지내왔다.
여야 국회의원님 100년 전에 나라 뺏긴 설움, 나라 없는 국민의 슬픔을 알고 있는지요?
싸움질 하지 말고 싸움할 수 있는 그 힘과 능력을 국력신장 과 민생고에 투여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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