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고성신문 | |
60주년 6.25 특집
6.25전쟁, 그때를 생각하면 노병의 눈빛은 되살아 난다. 김경용(81·개천면 북평리 원동마을)옹은 “비록 촌부로 늙어가지 젊은시절 조국을 위해 목숨바쳤던 것이 헛되지 않도록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투철한 국가관을 가지고 내나라 내조국을 소중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로 입을 뗀다.
팔순의 나이라 믿기지 않는 외모의 김 옹은 장대한 기골만큼이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도 누구보다 크다. 일본 오다케국민학교에서 8년 동안 공부하다 16살 때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21살나던해 6.25가 발발하자 군에 자원입대했다.
입대 당일 김 옹은 고성초등학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50명씩 나눠 화물차를 타고 통영(옛 충무)에서 배를 타고 부산훈련소에서 2주 동안 훈련을 받고 공병으로 배치 받았다. 공병으로 입소해 김해공병학교에서 보직을 받은 것은 1101호 야전공병단 중대본부 중대장 호위병, 문서통신연락병으로 배치 받았다. 군에 자원하자 당시 개천면 고향에서는 “하필 전쟁통에 자원하느냐.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자원을 취소하라”는 등 주변의 만류가 극심했다.
그러나 김 옹은 “조국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남아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피끓는 젊은 청춘이 무엇이 두렵겠느냐. 반드시 조국을 수호하겠다”며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자원입대했다. 자원과 동시 공병으로 입소해 최전방 강화도 화천에서 문서통신연락병으로 근무한 그는 이순신 장군의 ‘생즉사, 사즉생’ 즉,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조국수호에 앞장섰다. 그 말이 맞아 떨어졌을까. 그는 총탄이 오가는 전장을 수없이 누볐지만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심지어 행군중 바로앞 전우와 바로뒤 전우가 적의 총탄에 쓰러지는 경우에도 김 옹은 오뚝이 처럼 살아 남은 것이다. 특히 김 옹이 자원입대하기 며칠전에 입대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보병으로 배치받아 전사하는 일까지 생겼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안도보다 적의 총탄에 스러져가는 동료나 친구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김 옹은 “올해가 6.25전쟁 60주년이다. 그러나 젊은이들로부터 점점 잊혀져가는 전쟁이 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국가가 없으면 내가 없듯이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모든 국민의 국가관이 투철해야만 나라가 부강해지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김 옹은 당시 전공으로 많은 공로표창장을 받았다. 그러나 공로표창장은 그날의 아픔을 치유해 주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모든 국민이 정신무장을 새롭게 할 때”라고 강조하는 김 옹은 “60년이 지나도 그 때 일은 결코 잊을 수 없다. 국토분단의 비극은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