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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야(民冶) 천두상(千斗上) 선생과 항일독립운동

하기호 고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의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0년 02월 01일
ⓒ 고성신문

참고자료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고등경찰관계적록(경상남도경찰부))
•경남항일독립운동 참여자록(마산보훈지청편)
•신간회연구 이균영, 역비 한국학연구총서 3
•고성의 독립운동사(고성향토사료연구회 조현식 편저)


 


 














민야(民冶)


천두상(千斗上) 선생

고성청년운동 주도, 민속놀이 계승, 물산장려운동 등 일제에 항거


 


1. 고성청년단과 청년학원



민야(民冶) 천두상(千斗上) 공은 1903년 11월 4일 고성읍 서외동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고 의협심이 강하고 총명하였다.
공은 일찌기 좌해(左海) 허재기(許在其) 공으로부터 감화를 받아 16세때 기미(己未)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고성읍의거때는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는 일을 맡아 참여식을 발휘하였다.
독학으로 새 지식을 익히고 19세때 배둔금융조합 이사(理事)시험에 합격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였으나 취임을 거부하고 민족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1920년 12월 2일 조선청년연합회 제1회 창립총회가 경성 종로 중앙기독교 회관에서 개최하였을 때 고성의 대표로 참가하고 돌아온 권정현(權正鉉) 등에 의하여 청년운동이 태동되었으며 조직적인 청년운동을 이끌고 나간 주역들은 김종주(金鍾注)를 단장으로 임진돈(林鎭敦), 김진만(金鎭萬), 황곰도(黃熊度), 안태원(安太元), 손상인(孫常麟), 김백세(金百世), 하윤환(河潤煥), 정치인(鄭致寅), 황덕순(黃德順), 신병진(申秉珍), 이원영(李元榮) 등이 주축이 되어 고성청년단을 조직하여 대중을 이 운동에 참여토록 유도하여 나갔다.



청년운동의 후반기에는 천두상, 전갑봉(全甲奉) 등이 주축이 되어 새 동지들이 청년단을 다시 계승하여 폭넓은 대중운동으로 활성화하여 나아갔으며, 이 새 진영에 참여한 인사들은 오만수(吳萬壽), 구종근(具鍾根), 이효율(李孝律), 문욱열(文郁烈), 이진하(李鎭河), 황곰도(黃熊度), 김철동(金鐵同), 황판석(黃板石), 천두필(千斗必), 박맹도(朴孟道), 이만우(李萬雨), 임형규(林亨圭), 천상봉(千翔鳳), 김상욱(金相煜), 김종원(金宗元), 엄상수(嚴尙守), 박화수(朴華洙) 등으로 이들은 직접 간접으로 청년운동에 활약하고 있었다.



1921년에는 고성읍 서외동에 김종주, 이한수(李漢洙), 오덕근(吳德根)과 여러 지방유지들의 협찬으로 청년회관을 건립하고 1922년에는 김종주가 설립자로, 황곰도를 선생으로 인가를 받아 ‘청년학원(靑年學院)’이라는 배움의 자리를 마련하여 문맹자(文盲者)에게 글을 깨우쳐 주기 위해 학동들과 일반인을 모아 천두상 공은 구종근, 황곰도, 전갑봉 등과 함께 우리글을 가르치고 군내의 마을마다 야학교(夜學校)를 차려서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민중을 계도하는데 앞장섰다.



한편 민속놀이인 ‘줄다리기’를 마을과 읍면마다 연중행사로 전승케하여 용두(龍頭)위에 ‘전필승(戰必勝)’이라 쓴 깃발을 높이 세우고 동서(東西)로 갈라져 천병만마(千兵萬馬)의 진으로 힘을 겨누면서 ‘청청 하늘에는 별도 많다 치지랑 칭칭나네’라고 노래부르며 일제(日帝)의 끊임없는 시달림에도 우리민족의 훌륭한 민속놀이인 고유의 행사를 지키려하자 일경(日警)은 이를 못마땅히 여겨 군중집회를 금지시켰으며, 이를 강행할때는 일경과 맞서 싸웠으며 일경이 그를 주모자로 연행 조사를 할때 직업을 물으면 사회교화(社會敎化)가 나의 직업이라고 대담한 대답으로 묵비권으로 항거하였다.


 


2. 신간회운동 참가와 경남청년연맹



항일(抗日) 민족운동을 대립과 분열에서 오는 부작용을 없애고 힘을 한데 뭉쳐 단일화된 항일민족운동의 통합체로써 신간회(新幹會)가 중앙에서부터 조직되어 1927년 12월 31일 신간회 고성지회를 설립하였다.
주역으로는 천두상을 회장으로 박맹용(朴孟龍), 황곰도, 황판석, 엄상수, 이재홍(李在洪), 김상문(金尙文), 김갑봉(金甲奉), 김철동, 이상갑(李相甲), 이덕수(李德洙), 전갑봉, 천두필, 천상봉, 박기홍(朴基弘), 오광수(吳光壽), 김종원, 최태기(崔泰琪), 임형규, 구종근, 심자원(沈子元) 등이다.<신간회 연구, 이균영, 부록 지회부서 및 간부, 경상남도 고성>
1928년 1월 2일에는 긴급 간사회를 열고 본부대회의 대표 회원으로 천두상과 전갑봉이 선출되어 이를 기회로 그는 신간회 청년부 중앙간부로 활약하게 되었다.



한편 이날 회의에서는 고성심상소학교(固城尋常小學校- 당시 일본인 학교) 일인생도(日人生徒)가 작당하여 고성공립보통학교(固城公立普通學校) 학생 이용진(李龍振)을 구타한 사건에 대하여 학교측에 항의하고 민족문제로 부각시켰으며, 이용진이 사망하자 신간회가 주도하여 장례를 치루면서 관(棺)위에 ‘왜인(倭人)에게 타살된 한령(恨靈)’이라 쓴 조기를 덮고 광목(廣木)을 달아 학생과 시민들이 붙잡고 뒤따르니 시가의 점포들도 완전 철시하고 장지인 ‘말티(馬峙)고개’까지 행렬이 이어져 일본인들의 만행에 항의하는 시위로 발전하게 까지 하였다.<고등경찰관계적록 1928년(昭和3년) 55쪽>



1927년 9월 2일에는 고성청년회와 고성청년연맹(固城靑年聯盟)에 가맹한 삼산(三山), 거류(巨流), 회화(會華), 여자(女子) 4개 단체를 통합하고 고성청년동맹(固城靑年同盟)이라 개칭, 임시집행위원으로 천두상(千斗上), 전갑봉 외 3명을 선출하여 청년단체를 단일화하여 힘을 집결한 고성청년동맹에서는 그들이 주동이 되어 1928년 2월 25일 경남청년연맹(慶南靑年聯盟)을 결성키로 하였다. 그때 천두상 공은 신간회 중앙본부의 지시에 따라 급히 상경하게 되자 전갑봉이 청년연맹결성을 결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남청년연맹을 조직한 주역들인 전갑봉을 위시한 각 시군의 대표들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공 1928년 6월 28일 진주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언도를 받아 옥고를 겪었으나 천두상 공은 무죄를 받고 이 화난에서 모면하였다.


 


3. 대중운동(大衆運動)의 전개와 참가



1928년에는 미증유(未曾有)의 가뭄으로 기아(饑餓)선상에서 연명하는 농민을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기 위하여 고성농민조합을 조직하고 이진하, 이효율 등이 주도하여 지방 한해대책에 대한 순회 강연회에 참가 하였으며, 순회강사로 구종근, 임형규, 전갑봉, 김철동, 천두상, 오만수, 황곰도, 천상봉, 김상욱, 김종원 등이 참가하였다. 또한 일화(日貨)를 배척하고 민족자본의 형성을 위한 국산품애용의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이 한창 일고 있을때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출신의 정세권(鄭世權-조선물산장려회 중앙위원)과 제휴하여 기독교인 배기돈(裵琦敦), 김철기(金鐵基), 이상인(李相仁) 등과 함께 일화(日貨)배척, 국산면제(國産綿製), 한복(韓服) 학생들의 국산지복 착용, 일용품의 국산품 사용을 항구적 운동으로 전개케 하였다.



1931년에 접어들어 동아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기관에서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자금조달 행사를 하고 있을 무렵, 당시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安在鴻)의 참석 아래 영호남 지방 기자대회를 개최하려고 그는 동료 기자들과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뒤산의 아자방(亞字房)이라는 암자에 모였다가 일경에 발각되자 다시 장소를 옮겨서 섬진강에서 ‘선유놀이’를 가장하여 대회를 치루기로 하였으나 좌절당하고 말았다.
천두상 공은 그 길로 상경하여 중앙일보 기자로 활약하면서 종합계몽월간지 조광(朝光)지에 천민야(千民冶)라는 필명으로 기고하여 민족애를 고취시켜 왔다.


 


4. 고향 고성으로 돌아오다



3대 언론지의 필화(筆禍)사건과 경영난으로 휴간하게 되자 중앙일보의 사인(社印)을 몸에 지니고 동래(東萊)로 피신, 구포 등지에서 은신생활을 하고 있던 중 일경은 그를 찾지 못해 고성에 있는 가족들에게 심한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가족들은 생계길 마저 잃어버려 가산은 탕진되고 노부모와 가족은 집까지 잃어 서외동의 변두리에 움막을 짓고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참다 못하여1932년 고성으로 돌아와 이갑용(李甲用)이 경영하던 고성산업조합에 근무하였으나 그것도 여의치 못하였다.


 


5. 전북 임실경찰서에 구금되다.



그러나 그 뒤 얼마가지 않아 전북도(全北道) 경찰부(警察部)에서 밀파된 일경 형사에게 검거되어 임실경찰서(任實警察署)에 6개월간이나 구금되어 갖은 고문으로 손톱, 발톱 다 빼이고 온몸은 인두로 지져 화상투성이의 반신불수로 석방되었으나 일경은 다시 잡아드리려고 하자 몸을 피하여 수남동(水南洞) 모 여인집에 은신하고 있었으며 그 뒤 1940년경에 멀리 목포로 피신하였으나 1944년경에는 또다시 목포경찰서에 붙잡혀 긴 세월에 걸쳐 예비 검속생활의 옥고를 치루었다.


 


6. 8.15해방으로 석방되다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천두상 공은 석방되었으며 그는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 일제의 탄압속에도 일경의 체포를 피하여 항상 쫒기는 몸이 되고 한때는 일경에 체포되어 손톱, 발톱을 다 빼이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그의 항일투지(抗日鬪志)는 불꽃처럼 타 올랐으며, 또한 청년운동과 더불어 민족을 위한 대중운동으로 문맹퇴치, 농촌계몽, 국산품의 애용과 과학지식보급, 인습타파, 생활개선 등 폭넓은 애국운동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그의 슬하에 11남매를 두었으며, 1970년 1월 11일 68세로 부산시 광안리 자택에서 오랜 항일투쟁의 역정을 겪으면서 타계하셨다.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0년 02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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