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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녹자우. 남편 하나 믿고 혈혈단신 베트남에서 3년2개월 전 한국으로 건너와,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가족이 없었다면, 마을 어른들의 따스 관심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 레티녹자우씨는 이제 한국, 경상남도, 고성 하일면 용태리 중촌마을에서의 네 번째 추석을 앞두고 있다.
# 47살 남편, 29살 아내
김무환씨는 이런 저런 일들을 하다 보니 혼기를 놓쳤다. 혼기가 지난 농촌총각에게 결혼은 먼 이야기인 것만 같았더란다. 국제결혼에 대해 한창 부정적인 시선들이 가득할 때라 한사코 거절을 했다가 3년쯤 전, 보기나 하자 싶어 베트남으로 떠났다.
예쁜 여자보다 선하고 순수한 여자를 좋아하는 순박한 청년이었던 김무환씨에게 한 눈에 들어오는 처녀가 있었다. 순진해 보이는 얼굴과 활달하고 밝은 성격의 그 아가씨가 김씨는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나 따라서 한국 갈라요”하고 물었더니 그 아가씨가 그러자 하더란다.
스물여섯 레티녹자우씨는 회사에 다니다가 얼떨결에 선을 봤다. 친언니가 먼저 한국남자와 결혼을 해서 진주에 둥지를 틀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호감을 가졌던 찰나 만났던 선한 눈매의 한국남자는, 썩 미더워보이는 얼굴에 단박 호감이 갔다. 한창 무덥던 2006년 7월, 레티녹자우씨는 18살이나 연상인 남편 김무환씨를 따라 고성에 왔고, 귀화신청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아줌마’다.
김무환씨와 홀어머니 문외점씨, 둘만 살던 적적한 집안에 아이 기저귀가 펄럭이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문외점 할머니는 “이 먼 나라에 우리 아들 하나 믿고 와준 메누리가 안고맙긋나. 이래 예쁜 손자까지 낳았으니 나는 아무 걱정 음따”하며, 효민이의 웃음에 따라 웃는다.
# 내 가족이 있어 행복합니다
레티녹자우씨, 처음에는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말도 통하지 않으니 마실도 못나가고, 또래가 없으니 관심거리도 없고, 고향음식에 고향집이 마냥 그리웠다. 무뚝뚝하게 “집에 가고싶은 걸 참느라 혼났지, 뭐”하는 남편의 눈에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스친다.
베트남의 향신료들이 그리우면 시어머니와 남편은 밥을 차리고, 자신은 베트남 음식을 해먹으며 향수를 달랬다.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던 자우씨는, 시어머니가 밭에 가 고추 따오라 하면 산으로 가고, 논에 가라 하면 밭에 가는 좌충우돌의 생활을 했다. 그나마 상담소에서 베트남친구들도 만나고, 한국말도 배우다 보니 숨통이 트이더란다.
몇 번의 명절과 몇 번의 제사를 지내다 보니 바빠서인지, 적응을 해서인지 고향집이 그립긴 해도 눈물바람은 하지 않게 됐다. 남편은 여전히 믿음직했고, 시어머니는 고향의 엄마처럼 살가웠고, 아이는 쑥쑥 자라 재롱을 부린다.
# 추석, 한국 문화 공부하는 날
베트남은 한국처럼 성대한 추석을 치르지 않는다. 밤 열두시면 불상 앞에서 향을 피워놓고 절을 하는 것이 베트남의 추석이다. 한국처럼 손님들이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니 식구들끼리 단출하게 밥을 먹었다.
한국에 오니 설과 추석이 동네 잔칫날 같았더란다. 전에, 생선에, 고기에,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 한숨부터 나왔다. 근처에 사는 형님이 없으면, 시어머니가 없었다면, 그 일들을 어떻게 했을까 싶다.
지금은 곧잘 따라 한다. 전도 척척 부쳐내고, 생선을 찌고, 과일도 야무지게 깎아 차례에 올린다. 올해는 서울 사는 형님이 못 내려 온다니, 그 일을 혼자서 다 해야 하는데도 자우씨는 벌써 신이 난 얼굴이다.
자우씨에게 추석은, 한국의 문화를 또 하나 배우는 공부이기 때문에 즐겁기만 하다. 장을 보러 가면 이것도 사야하고, 저것도 사야한다 한국말로 제수용품 명단을 읊는 자우씨, 올 추석은 자우씨의 그 넉넉한 웃음만큼 풍성한 한가위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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