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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개벽으로 해일일자 신리 뒷산까지 물바다 나룻배 한 척 나타나 주민 구해…‘배타재’ 천석부자, 흉년에 걸인들 끊이지 않자 귀찮게 여겨 앞산 바위 귀 떼자 패가망신
7. 성전리(聖田里)
▣ 성전(聖田)
◎ 전설
◇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에 얽힌 이야기 : 옛날 성전리 발산마을에 최부자란 노인이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가솔들을 거느리며 살고 있었다. 이 최부자에게 현옥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찌나 영리한지 일곱살 때에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나이가 들게 되자 악기에도 조예가 있어 마을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한 과수댁이 있었는데 과수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 딸은 최도령을 남모르게 짝사랑하게 되어 밤이면 홀로 그리워하다가 어느날 밤 최도령이 부는 퉁소 소리에 참을 수가 없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최도령 앞에 나아가 애끓는 심정을 고백하였지만 거절당했다. 처녀는 너무도 분한 나머지 뒷산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을 하였는데 그날 밤부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최도령이 한창 글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자정이 되자 글방 앞에서 퉁소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자 최도령은 갑자기 문을 열고 퉁소 소리나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돌아오는데 몸은 파김치가 되어서 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깨고나면 아무것도 몰랐고 이것이 되풀이되자 최도령은 점점 몸이 쇠약해져 갔다.
최부자가 이러한 사유를 캐기 위해 하루는 숨어서 기다렸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자 담장 밖에서 퉁소 소리가 나고 이어 아들이 문을 열고 나서는게 아닌가. 담장을 넘더니 숲속길로 접어들어 멀리 떨어진 골짜기로 들어가더니 천하여장군이란 팻말 밑에 엎드려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새벽에 닭이 울자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몸은 지칠대로 지쳐 깨고나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히 여긴 최부자는 용한 점쟁이에게 물었다. 최도령을 사모하다 죽은 처녀의 혼이 천하여장군에 붙어 밤마다 최도령을 불러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점쟁이가 일러주는 대로 천하여장군 앞에 크게 제사를 지내고 튼튼하게 천하대장군을 만들어 최도령의 옷을 입히고 돌아오자 그날부터 최도령의 병은 씻은듯 나았고, 퉁소 소리도 다시는 들려오지 않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8. 신리(新里)
신리마을은 본래 고성군 서마면의 지역으로써 어은동(漁隱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마암면으로 개칭되면서 새로 마을이 이루어졌다 하여 신리로 명칭하였으며, 현재 양촌과 음촌의 2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신리 은행나무 : 함안이씨 행헌(杏軒) 이의형(李義亨)공이 심었다고 하며, 수령이 약 500년 정도인 나무로 높이 약 30m, 둘레가 5m 이상이나 된다.
당시 이 나무가 무척이나 무성하여 신리마을의 뒷산에 닿을 듯 했으나 임진왜란 때 수군 통제부에서 세병관을 짓기 위해 베어 간 후 그 뿌리에서 다시 움이 돋아나 지금에 이른 것인데, 지상 약 1.8m 높이에서 2개가 똑같은 가지로 자라 수형을 형성하고 있다. 이 은행나무에 얽힌 은행골 전설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어 주민들은 이 나무를 잘 보호하고 있다.
◎ 신리 배탄에 얽힌 전설 : 오랜 옛날 천지가 개벽하여 해일이 일어나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을 적에 이곳 산 골짜기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뒷산으로 피신을 하였다.
물이 계속 불어나서 재를 넘어 흘러가게 되었는데 해일과 함께 어디서 밀려온 나룻배 한 척이 재를 유유히 건너지르고 있었다. 이 때 산위에 있던 사람들은 이 배를 타기 위해 서로 밀고 당기고 하다가 그만 대부분 물에 빠져 죽고 몇 사람만 타고 건너 갔는데 그때 그 배가 지나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의 입으로 입으로 전해오는 것이 지금까지도 ‘배타재’로 그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 신지(新池) : 신리의 법정리에 속하여 본래 고성군 서마면의 지역으로써, 어은동이라 하다가 그 뒤에 죽현동(竹顯洞)으로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마암면에 편입되어 오다가 1967년에 신리에서 분동되면서 마을 뒤에 못이 있다하여 신리의 신(新)자와 지(池)자를 따서 신리(新池)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 마을의 형성연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리마을의 형성연대와 같은 시기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거주민은 함안이씨, 광산김씨, 합천이씨, 여주이씨, 단양우씨 등 여러 성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예수의 작은마을 : 신지 어은골의 산수가 수려한 아늑한 곳에 1981년도에 천주교 마산교구에서 ‘예수 작은마을’의 사회복지시설을 설치하여 지체장애자와 결핵환자 등을 수용, 보호하고 있다.
◎ 피바위에 얽힌 전설 : 옛날 신지마을에 노씨 성을 가진 천석부자가 살았는데 이 시절에는 매년 흉년이 들던 때라 노부자 집에는 매일같이 노객이 끊이지 않아 이들에게 먹일 밥을 짓기 위하여 쌀을 씻은 뜨물이 흘러 20여리 아래에 있는 원진마을 앞 개울까지 흘러도 그 흰빛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노부자는 이를 귀찮게 여기고 아깝게 여기던 차에 하루는 노승이 노부자집에 시주를 왔기에 노부자 부인이 노승에게 말하기를 “노객들이 집에 찾아오지 못하게 해 주면 시주는 얼마든지 하겠노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노승은 몹시 괴이하게 생각하여 말하기를 “앞산에 있는 바위의 귀를 떼어버리면 노객들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노부자 부인은 머슴을 시켜서 앞산에 있는 바위의 귀를 떼었더니 귀를 떼낸 바위자국에 피가 흘러내리면서 산 아래로 흘러 내렸다.
그 후로 노부자 집은 점점 가세가 기울어 망하고 찾아오는 노객이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바위를 피바위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그 피바위는 마을 앞에 있는 대밭속에 있다.
9. 석마리(石馬里)
석마리는 본래 고성군 서마면의 지역으로써, 마을에 석마상이 있었으므로 석마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감동 일부를 병합하여 석마리라 해서 마암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마을로 석마와 감동(甘洞)의 2개 마을이 있다.
▣ 석마(石馬) : 석마리 석마마을은 입구의 정자나무 아래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마(돌말)상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보존되고 있어 석마상의 이름을 따서 마을명을 석마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마암면의 명칭 또한 이 석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마을의 형성 : 석마마을의 형성연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입구의 석마상이 고려시대의 유물로 추정하고 있어 마을의 형성연대를 이 시대로 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왔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여주이씨, 함안이씨, 전주최씨, 밀양박씨 등 제 성씨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사적 및 기타
◇ 석마와 동제 : 마암면 석마리에 있는 2개의 석마상(石馬像)은 그 유래에 대하여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고려시대의 유물로 추정하고 있으며, 마암면의 명칭도 이 석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날에 이 마을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인명 및 가축피해를 자주 입게 되자 주민들은 호랑이를 쫓을 궁리를 하였으나 묘책이 없어 그냥 당하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백발노인이 이 마을에 들러 주민들의 애소를 듣고 묘한 방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노인이 시키는 대로 마을 입구에 한 쌍의 돌말을 만들어 세우고 마을의 안가태평을 비는 큰 제를 지낸 후 부터는 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무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마을의 수호신으로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돌말 앞에서 마을의 태평을 비는 동제를 지내고 있으며, 1974년 2월 6일자로 지방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보존하고 있다.
◇ 석마리 지석묘군
석마리에 있는 지석묘군으로 남방식 지석묘 10여기가 논 가운데 분포되어 있으며, 편편한 계석을 이용한 지석묘군으로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 서원과 재실
◇ 위계서원(葦溪書院) : 석마리에 있는 위계서원은 1884년(현종 10년)에 창건되었으며, 매헌(梅軒) 이인형(李仁亨), 행헌(杏軒) 이의형(李義亨), 성제(省齊) 이령(李翎), 와룡(臥龍) 이현(李顯)을 재향하였고, 후에 전경제(展敬齊) 이후(李厚), 신천제(新川齊) 이응성(李應星)을 제향하였다.
1963년 복원 시 경암(警庵) 이제(李齊), 상파(箱坡) 이규(耳窺)를 제향하였으며, 그 후 오헌(梧軒) 이예형(李禮亨)과 국헌(國軒) 이지형(李智亨)을 제향하고 있으며 도지정문화재 자료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 혼천재(混泉齋) 마암면 석마리에 있는 재실로 이씨 집안 자제들의 강학소였다.
▣ 감동(甘洞)
◎ 동명의 유래
석마리 감동마을은 본래 서마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마암면의 석마리에 편입되어 마을에 감나무가 많아 약 100여년 전에는 시동(枾洞)이라 하였는데, 일제시대에 마을회관을 건립하여 감동회관이라 칭한 뒤로부터 계속 감동이라 동명을 사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지금도 진주방면에서는 시동이라 부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의 형성연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주 오랜 옛날에 안씨가 많이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한 집도 거주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전에 양천허씨와 진양강씨가 진주로부터 이주하여 왔으며, 뒤에 전주최씨가 입촌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