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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갈아먹으면 옥동자 낳아… 친구의 넋 달래려 칠곡암 지어 자신도 스님되어
6. 장산리(章山里)
장산리는 본래 고성군 서마면의 지역으로써 형이 노루처럼 생겼다 하여 장산(獐山) 또는 녹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서장산, 동장산, 선미동 일부를 병합하여 장산리로 해서 마암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마을로 장산(章山)과 서장산(西章山)의 2개 마을이 있다.
▣ 장산(章山)
장산마을은 원래 장산(獐山)이라 불러 왔는데, 이는 마을 뒤쪽 산의 형상이 노루가 누워있는 형태와 같다고 하여 이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조 중엽 때에 천산재 허선생(天山齋 許先生)의 문장이 나라안에 널리 알려지면서 지명도 글 장(章)자의 장산으로 자구가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장산마을은 김해허씨 문중의 집성촌으로 고려말 충신 정절공 호은 허기(貞節公 湖隱 許麒) 선생이 적승(賊僧) 신돈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곳 고성의 대섬(竹島-현 수남리)으로 유배 당하였는데 그 후에 왕이 신돈을 처벌하고 선생을 조정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지금의 장산마을에 터를 잡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장산리 허씨고가
마암면 장산리 184번지에 있는 허태래(許泰來)씨 고가는 1865년에 건립되고 사당 구조는 구화목조로써 건평 10평에 4대 선조의 위패(位牌)를 모셨고 대문 양쪽에 방이 있어 과객을 접대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활용하지 않고 있다. 평거(平居)는 1912년에 건립된 화석목조로 건평 30평으로 귀빈접대와 서재로 사용하였고 2층 건물은 1912년에 건립하여 평거와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 고가의 구조는 사당(祠堂), 내삼문(內三門), 집무실, 서재, 본채, 대문으로 구조되어 있다. 1985년 1월 14일에 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115호로 지정되어 있다.
◎ 사적 및 기타
◇ 장산숲
장산 마을의 집단 거목림은 약 200여년전에 심은 울창한 5천934㎡의 숲으로 이를 장산숲이라 한다. 이 숲은 조선조 성종 때 이퇴계 선생의 제자였던 천산재 허천수(天山齋 許千壽) 선생이 노산정을 지어 연못을 파고 주위에 나무를 심어 고기잡이나 산놀이를 즐기던 곳이다.
당시에는 연못에 조대가 있었으나 세월의 흐름에 유실된 것을 후손들이 연못과 조대를 다시 복원하여 1천여평의 연못과 숲을 조성하여 매년 봄이면 후손인 참사 허선(許宣)공과 아들 홍도(弘道)공이 지방 유지들을 초청하여 고기를 낚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1987년 5월 19일에 지방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어 있다.(자료:고성군지)
◇ 정절공 유허비(貞節公 遺墟碑) : 1843년에 세워진 비로 정절공 허기(許麒) 선생의 유허비이다.
◇ 노산정(鷺山亭) : 증(贈) 형조참의 천산재 허천수 선생의 강학지소(講學之所)이다.
◇ 경모재(敬募齋) : 장사랑(將仕郞)공 허광한(許光翰) 선생의 묘각이다.
◇ 지산재(旨山齋) : 눌헌공(訥軒公) 허명(許蓂)의 묘각이다.
◇ 이로재(履露齋) : 경암공(敬庵公) 허신(許身)의 묘각이다.
◇ 죽사정(竹史亭) : 비서원 승지 허재찬(許在瓚)의 부모지소이다.
◇ 열효각(烈孝閣) : 허묵(許默)의 처, 안동권씨(權氏)와 현손 부호군 허경문(許慶文)의 열부 효자 정여비각이다.
◇ 감루비(感淚碑) : 비서원 승지 허재찬의 송덕 감루비가 있으며 그 외에 종사랑행숭선전참봉허선불망비(從仕郞行崇善殿參奉許宣不忘碑)와 송덕비(頌德碑)가 있고 참봉 허종엽(參奉 許宗燁), 참봉 허종탁(許宗鐸), 송덕비가 있다.
▣ 서장산(西章山)
서장산 마을은 본래 서마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마암면의 장산리에 편입되었다가 1984년 8월 22일자로 고성군의 행정구역 조정 시 장산리의 서장산(행정마을) 마을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에 있는 서산재(西山齋)의 기문(記文)에 의하면 서장산 마을의 형성연대도 장산마을과 같은 시기에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마을 주민은 전주최씨가 대성을 이루고 밀양박씨, 함안이씨, 광산김씨 외 여러 성씨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재실과 효행비
◇ 서산재(西山齋) : 서산재는 서산(西山) 최처회( 崔處會)공의 후손들 교학처로써 영조때에 건립하였다.
◇ 서림재(西林齋) : 서림재는 통덕 삼평당 밀양박공 동유(通德 三平堂 密陽朴公 東裕)의 유허재(遺墟齋)로 1958년 5월에 건립되었다.
◇ 효행비 : 의금부 도사필주(義禁府 都事必周-全州崔氏)의 부친 최동식(崔東軾)의 부인 김해허씨의 열녀비가 있고, 고사인(故士人) 전주 최상락(崔祥樂)의 부인 칠원제씨의 열행비가 마을에 있다.
◇ 서장산림(西章山林) : 마암면 서장산마을에 있는 숲으로 1935년에 마을주민이 조성하여 지금은 숲이 울창하여 마을의 풍치림으로 경관이 수려한 명승지이다.
6. 성전리(聖田里)
성전마을은 본래 고성군 서마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에 성전리로 하여 마암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후에 행정리로 성전과 발산(發山)으로 분동되었다가 1982년 읍면의 이동 행정구역 개편으로 성전리(법정리)로 병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성전(聖田)
성전마을은 단일 법정리로 본래 고성군 서마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마암면에 편입되면서 마을에 성암사가 있었으므로 마을명을 성전이라 하였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의 형성연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현재 거주하는 달성배씨와 창원황씨의 입촌연대를 추정하여 살펴보면 약 300~400여년전에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으며, 현재 거주민은 위 성씨 외에 전주최씨, 함안이씨, 창원정씨 등 여러 성씨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성전리 성터
성전리 성터는 마암면 성전리와 구만면 와룡리를 연결하는 석축성으로 대부분 허물어져 멸실되고 흔적만 남아있으며, 주위 약 250m 성내에는 유물자리가 1개소 남아있다.
◎ 전설
◇ 성전 칠곡암(七谷庵)에 얽힌 이야기
옛날 성전마을에 부자집 이 도령이 살고 있었다. 이 도령은 글방에서 김 도령을 친구로 사귀었는데 두 사이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친형제 이상으로 정이 들었다. 김 도령은 외동아들이라 일찍 장가를 들게 되었으나 장가간 지 10년이 지나도록 부인이 애기를 갖지 못하자 김 도령은 점점 난폭해지면서 부인과 싸움이 잦던 중 그만 부인이 자결하고 말았다. 이에 상심한 김 도령은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친구를 잃은 이 도령은 열심히 공부를 하여 과거에 급제, 사또자리에 앉게 되었다. 하루는 사또가 동헌에서 깜박 졸았는데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그대 친구는 애기가 없어 부인의 죽음에 상심한 나머지 세상을 방황하다 일곱재 너머 깊은 산골에서 바위로 변해 버렸는데 김 도령이 변한 바위를 애기없는 부인들에게 갈아 먹이면 옥동자를 갖게 되리라”하고는 사라졌다.
사또는 하도 이상한 꿈이라서 노인이 말한 장소를 찾아가 보았더니 정말 김도령은 바위로 변해 있는 게 아닌가. 원님은 슬픔에 목이 메었지만 노인이 가르쳐 준대로 고을의 애기없는 부인들에게 돌을 갈아 먹도록 하여 애기를 갖게 되었다 한다.
하지만 부인들이 너도나도 떼어가니 바위는 순식간에 없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이도령 사또는 그 자리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칠곡암이라 하였고 사또 이 도령은 스님이 되어 친구의 명복을 빌었다고 하며, 그 자리에 지금도 암자터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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