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니면 누가 소농사 합니까”
자랑스러운 농어업인상 이부열 고성군낙우회장
60마리쯤 되는 얼룩소들이 음머 긴 울음을 빼고 있다. 이제 갓 태어난, 사냥개만한 송아지 두 마리는 새로운 사람이 마냥 신기한 듯 코를 씰룩거리고, 핥아댄다.
고성군낙우회 이부열 회장은 사료값은 천정부지로 솟고, 일은 중노동이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낙농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다. 다들 도시로 향하던 시절에도 젖소를 키우는 이 일만큼 보람있는 일은 찾지를 못했다.
농사에만 매달리다 보니 내 고향을 지키는 일에 소홀했다 싶어 80년대부터는 봉사활동에도 여념이 없다. 성내파출소 방범활동을 시작으로 고성경찰서 BBS활동을 86년부터 20년이 넘게 하고 있다.
지금 맡고 있는 직책만도 고성낙우회장, 군농업농촌 및 산업정책심의회 위원, 부산경남우유협동조합 대의원, 육우협회 경남도지회 대의원 등 다섯 손가락이 모자란다. 덕분에 농업기술자협회 공로표창, 경남경찰청장 표창, 농림부장관 표창, 고성경찰서장 표창 4번에 모범가정 표창까지 상을 받은 경력도 직책만큼이나 화려하다.
이부열씨는 소와 함께 있어야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인터뷰동안에는 내내 긴장한 얼굴이더니, 한 달 전에 태어났다는 송아지를 안은 그의 표정은 마치 자식의 재롱을 보는 부모의 표정이다.
젖소 숫송아지가 10만원 한단다. 정액앰플만도 하나에 7만원, 8만원인데 숫송아지가 태어나면 앰플값도 안나온다. 육우로 키운다 해도 사료값이 걱정이지만, 생명을 내다버릴 수 없으니 내 자식 키우듯 정성들여 키운다.
그 이야기를 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도 소 잔등을 썩썩 긁는 이씨는 슬며시 웃는다. 이씨는 달러 강세가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오른 상태라, 낙농업이 다시 어려운 국면에 직면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부열씨는 사명감을 갖고 일한다.
“제가 아니면 이 고된 일을 누가 하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농사는 천하지대본 아닙니까. 축산업 역시도 생명농사입니다. 나라의 근간이지요. 누군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이니 제 힘이 남아있을 때까지는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소 60마리가 제 손에 달렸는데요”란다.
이씨에게 또 하나의 소망은, ‘높으신 분들’이 축산업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서가 아니라, 실제로 축사에 나와서 일을 하며 느껴야할 일이다. 농사를 살리고, 고성의 근간을 살리기 위해서는 군의 지원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말한다.
이부열씨는 “실은 제가 이런 상을 받을만큼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안하려고 몇 번이나 발뺌했지만 이렇게 큰 영광을 안게 됐습니다. 앞으로도 군민들께 좋은 이미지를 남길 수 있는 날이 많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
삼산면 병산리 맥가이버로 불려
봉사대상 박영수 삼산면적십자봉사회장
병산리 할매들이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 없으모 우리는 우찌 살랑가 모르긋다”한다.
2001년 군수표창에 이어 2006년 한 해에만 군수 감사패 두 번, 2004년과 2006년 경남도지사 표창, 2007년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 표창까지, 박영수씨는 봉사활동의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박씨에 대해 “지역사회를 위해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박영수씨는 병산리 맥가이버다. 80년대, 면사무소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농기계도 고치고 했더니 면사무소 직원들이 맥가이버라 하더란다. 마을의 크고 작은 일에 전부 발 벗고 나서고, 농기계며 가전제품이며, 박씨 손이 스치면 안고쳐지는 것이 없다.
박씨는 대한적십자봉사회 고성군지구협의회 홍보부장이자, 삼산면적십자봉사회장이다. 농장을 경영하다가 그만두고 이제 봉사에만 전념하고 있다는 박씨는 21년 전, 고성경찰서에 근무하던 형님을 방문했다가 고성에 반해, 그 길로 수십년을 살던 서울을 떠나 고성으로 이사왔다.
그 후로 지금껏 병산을 고향이라 생각하며, 마을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지난 10여년 동안 박씨는 매달 밑반찬을 만들어 삼산면의 어려운 가정들에 전달하고, 회원들끼리 자체적으로 경비를 마련해서 어르신들의 영정사진을 찍고 있다. 박씨는 삼산면의 정보화선도위원을 맡으면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터넷을 비롯한 컴퓨터교육도 담당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람사르총회 때는 홍보위원으로 위촉됐고, 2006년과 올해 공룡엑스포에는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전국을 다니며 고성을 홍보했다. 또 2004년부터는 고성우체국 포스트맨으로 활동하면서 우체국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참여한다. 박영수씨, 고성홍보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래서 인터넷 이름도, 홈페이지 이름도 ‘고성맨’이다.
박영수씨는 “다들 열심히 하시는데 한 것도 없는 제가 이렇게 큰 상을 받아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랑스러운 건지 부끄러운 건지도 모르겠네요”라는 겸손의 말을 전한다. “봉사를 봉사로 생각해서는 참의미를 찾을 수 없지 않을까요.
봉사는 생활이 돼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영수씨는 63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동네 노인정에서는 ‘박군’이다. 어르신들이 워낙 많은 탓도 있겠지만, 이제 박영수씨는 병산리 어르신 모두의 아들이라 그렇다 하며 허허 웃는다.
“함께 노력해준 팀원들께 감사드립니다”
모범공직자상 고성경찰서 수사과 박재홍 경사
2007년부터 올해까지 검거공적만 461명. 이쯤 되면 형사 콜롬보다. 박재홍씨는 한 번 잡은 범인은 절대 놓치지 않기로 유명하다. 성격이 원체 꼼꼼하다 보니 수사할 때도 치밀하고 끈질기다.
박재홍씨는 1989년, 순경으로 경찰생활을 시작해 2007년 2월부터 고성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원칙대로 했을 뿐”인데, 그 원칙이 통했다.
고성에서 발생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박씨의 손에서 해결됐다. 박재홍씨는 고성에서만 살인 1건, 강도 등 9건, 마약 19건, 폭력 326건, 절도 106건을 해결했다. 그 덕분에 지난해 후반기에는 경상남도 형사우수팀으로, 올해 1/4분기에는 도내 70개 형사팀 중 3급지 1위 우수팀으로 선정됐다.
올해 5월, 경남지방청의 민생침해범죄소탕 기간에는 게임장 업주를 협박해 상품환전권을 강제로 인수하려한 혐의로, 고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조직폭력배 9명을 검거해, 조직폭력수사 1위를 차지했다. 박재홍씨는 2007년 마약사범과 중요범인 검거유공으로 경찰청장상과 경남청장상을, 2008년 1/4분기 형사활동우수로 경찰청장상에 이어 주요범인검거와 형사활동 우수 공적으로 경찰청장상만 25번, 경남청장상과 경찰서장상 등 화려한 상훈을 보유하고 있다.
경찰, 그것도 강력수사팀 형사로 일하고 있는 박씨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아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외박도 잦고, 주말도 공휴일도 반납해야 하는 이 일을 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박씨는, 경찰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가족과 함께 주말을 보낸 기억이 없다.
그는 “서울경찰이나 부산경찰이나 고성경찰이나 경찰생활은 다 똑같지만, 한 팀의 인원이 적다보니 힘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손에 고성의 치안이 달려있다 생각하면, 제 생활을 포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라 말한다. 수사 과정에서 위험한 상황들을 맞닥뜨려야하는 강력반 형사니, 목숨 내걸고 범인을 잡아야한다. 그동안 박씨도 숱한 위험에 빠졌다.
범인들이 형사들에게 쫓길 때는 심리적인 불안감이 극도에 달하기 때문에 도주는 기본이고, 자해까지 할 수도 있다. 형사의 목숨을 위협하는 범인도 여럿이니, 사명감 없이는 절대 못하는 일이란다.
그래도 강력사건이 빨리 해결될 때면 내가 이 일을 제대로 택했구나, 또 내가 해냈구나, 뿌듯한 순간이다. 그는 “형사라는 직업은 절대 혼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형사로서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팀워크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상을 받기까지 노력해준 선후배들께 감사하고 있습니다”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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