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노무현 전 대통령 국장(國葬) 때 가장 많이 불린 노래는 대중 가수 양희은이 부른 ‘상록수’이다. 비장하면서도 강인한 뜻을 담고 있는 이 노래는 1977년에 만들어져 노동자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불렸던 노래다.
그러나 군사독재 정권의 귀에 거슬린 탓으로 금지곡이 되었다가 1987년의 6·10 민주항쟁과 더불어 해금되었다. 그리고 2002년 3.1절 기념식 때는 국가 공식 행사에서 축가로 불렸고 마침내 국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합창하는 국가적인 노래가 되었다.
우리 가요사(歌謠史)에 ‘상록수’에 버금갈 만큼 음악적으로 뛰어난 노래가 많지만 유독 ‘상록수’가 돋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냥 유행에 묻혀 갈 한낱 대중가요 한 편을 역사에 남긴 사람은 누굴까? 그것은 양희은의 가창력도 아니고, 평소 그 노래를 즐겨 불렀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그 노래를 못 부르게 한 군사 정권이었다. 금지곡으로 탄압한 게 그 곡의 가치를 더 높인 것이 되어 버렸다.
‘상록수’ 노래에 묻혀 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불행한 서거 이후로 우리나라 각계각층에서 유행처럼 시국선언(時局宣言)이 이어지고 있다. ‘시국선언’이란 나라에 정치적이나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나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때, 교수들과 재야인사들 같은 지식인들이나 종교계 인사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들의 의견을 표명(表明)하는 것을 말한다. 칼을 가지지 않은 지식인에게는 시국선언이 무폭력의 저항이요 집권자에 대한 훈수(訓手)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전의 군사 정권 시절에 이런 시국선언이 자주 있었다. 지식인들의 이런 행동은 여론의 향배(向背)에 큰 영향을 끼쳐 집권 세력에게 상당한 부담감으로 작용하였다. 4.19 혁명 때, 독재와 부정 선거에 휘말린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下野)하게 한 가장 큰 힘은 대학 교수들의 시국선언이었다.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 시절에도 종종 시국선언이 이어졌다. 그런 시국선언이 작금(昨今)에 다시 부활한 것이다.
시국선언은 국가에 대한 충정(忠情)에서 나온다. 나라의 안위(安危)를 걱정하고 국민의 평안(平安)을 바라는 마음에서 시국선언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은 같지가 않은가 보다. 그 충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악(惡)의 무리일 뿐이다. 그들은 사회를 혼란시키는 일탈행위라며 시국선언을 비난하고 있다. 심지어 백색테러까지 감행하고 있어 두 집단의 충돌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가슴은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이렇게 연이어지는 시국선언의 불씨는 서울대 교수들이 가장 먼저 피웠다. 지난 6월 3일, 서울대 교수들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방관할 수 없다며, 현재의 위기상황을 국민화합의 계기로 삼아 일방적인 독주를 중단하고 국민의 의견을 존중하라’며 시국선언을 했다.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이어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 이어졌다.
내용은 대부분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MB 정권이 들어선 후의 민주주의의 진퇴(進退) 문제는 좀더 시간이 흘러야 알 수 있겠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밀어붙이기 식의 행태는 충분히 그런 목소리를 나오게 할 만했다. 그리고 보수와 진보로 양극화되는 국민의 여론을 하나로 모으라는 것도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국민의 의견을 존중하라는 소리는 민주주의 국가의 이념을 좇는 나라라면 당연한 요구가 아니던가.
계속 이어지는 시국선언이 현 정권으로 봐서는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급기야 정부는 시국선언에 참가한 교사들의 징계와 더불어 공무원노조에서도 시국선언을 할 경우 징계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국가공무원법을 핑계로 가장 만만한 공무원부터 재갈을 물리겠다는 것이다. 결국 잘못된 국정(國政)에 대한 충고가 담긴 시국선언의 본뜻은 실종(失踪)되어 버리고, 징계와 탄압이라는 끔찍한 방법으로 국민들의 입을 막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냥 ‘이런 목소리도 있구나’ 하며 자신들의 집권 1년을 되짚어보고 잘못된 것은 고치면 될 일이었다. 사실 일부 정책은 MB 스스로 시행착오를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국선언을 백안시(白眼視)하고 관계된 사람들을 징계하고 탄압한다면 정말 속 좁은 정권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특히 전교조 교사들의 징계는 이미 실패한 전례(前例)까지 있다. 정부는 1989년 전교조 창립을 주도한 1천500여명의 교사를 파면·해임했지만 결국 그들은 다시 교단으로 다시 돌아왔다. 작금의 사태는 전교조 창립에 비하면 찻잔 속의 태풍일 뿐이다. 그걸 징계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언젠가는 다시 더 큰 목소리를 가지고 교단에 복귀하게 될 것이다.
탄압은 더 큰 저항을 받게 마련이다. 전교조 교사에 대한 탄압은 공무원노조의 시국선언을 불렀다. 공무원노조까지 탄압할 경우 그 가족을 비롯한 더 많은 사람들의 원성과 저항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국선언에 대한 더 이상의 탄압이나 징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탄압을 한다면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후퇴가 아니겠는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당신을 흔든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그 자리에 서서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라. 금지곡이었기에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진 노래 ‘상록수’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 그래서 지금의 탄압이 도리어 그들을 더 푸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언젠가는 상록수처럼 우뚝 설 그들 앞에 초라해질 자신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바람은 휘저을수록 커지는 법이다. 귀를 열고 뭇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라. 마음을 열고 뭇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라. 귀와 마음을 막으면 막을수록 회오리는 더 커지지만, 귀와 마음을 여는 순간 미풍(微風)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