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화산리(禾山里)
▣ 법진(法津)
법진마을의 동명은 조선조 말엽에 마을 입구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마을을 수호하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장승을 세워 이를 법수라 불렀으며, 마을명도 ‘법수동’이라 하였다.
그런데 해방 후에 마을 주민 전체가 준법정신으로 선양하기 위하여 스스로 법을 다스리는 마을이라 하여 법수동을 법진으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법진 마을의 형성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대략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옛날부터 창원정씨와 김해허씨, 성산이씨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은 위 성씨외에 김해김씨, 칠원제씨 등 여러 성씨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지명일화
◇ 군징이 고개
법수동에서 회화면 배둔리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인데 임진왜란 때 아군의 진이 있었다고 한다.
◇ 성산(城山)
법수동 동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 87m 정도로 성터가 있었다.
◎ 화산리 삼진(三津)에 얽힌 전설
옛날 이 고을에 한 노부부가 고기잡이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이들 부부는 나이 50이 다 되어도 자식이 없어 애를 태우다가 바다 용왕님께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기를 수없이 했지만 자식하나 얻지 못했다.
그런 어느날 영감이 나룻배를 저어 바다에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낚시대가 휘청하더니 배를 끌고 가는게 아니겠는가. 영감은 힘껏 잡아 채어보니 한 길이나 되는 금빛이 나는 잉어였다. 노인은 이게 웬 떡이냐고 잡으려고 하니까 이상하게도 잉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노인은 이를 불쌍히 여겨 그 잉어를 바다에 도로 놓아주었다.
그날 밤 그 노인이 잠자리에 들어 꿈을 꾸게 되었는데 금빛 찬란한 옷을 입은 귀공자가 나타나 노인에게 절을 하며 말하기를 “저는 이 바다를 지키는 용왕의 아들입니다. 세상 구경을 하기 위해 잉어로 변하여 바다에 올라왔으나 다행히 노인의 후덕한 마음씨에 제 목숨이 구해졌습니다. 노인이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소원을 들어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노인은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였으나 “제겐 아내가 있고 먹을 것이 많으나 더 이상 바랄게 없고 단지 환갑이 다 되도록 자식이 없는 것이 한입니다.” “그럼 그 부탁을 들어드리지요. 내일 아침 일찍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제일 먼저 떠 내려오는 것을 가지시요”하고는 사라졌다.
아내에게 이 꿈 얘기를 한 노인은 다음날 아침 일찍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보니 상류로부터 작은 상자 하나가 떠 내려왔다. 그 상자를 집으로 가져와 뚜껑을 열어보니 구슬 세 개가 각기 다른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게 아닌가. 웬 구슬이냐고 손을 대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옥동자 셋이 나란히 서서 절을 하면서 “아버님” “어머님”으로 불렀다.
이 노부부는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이 삼형제는 자라서 영특하게 되어 성인이 되자 각각 한 고을씩 맡아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 고을이 원진, 법진, 군진으로 삼진이라 하였고 오늘도 그 지명은 변하지 않고 있다.
▣ 화산(禾山)
화산 마을은 동화(東禾), 서화(西禾), 항정(項亭)의 3개 취락으로 형성된 마을로 옛날에는 수실(繡谷), 또는 한자로 화곡(禾穀)이라 칭하였으나 마을이 아담한 화자형(禾字型)의 산 아래에 형성되어 있다하여 화산으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의 형성연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거주민은 달성배씨, 전주최씨, 함안이씨, 여주이씨, 창원정씨, 삭녕최씨, 남평문씨 등 여러 성씨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
화산 마을은 마암면 소재지로부터 약 1㎞ 이내의 거리에 위치하여 서화, 동화, 항정의 3개 취락으로 화산마을을 이루고 있다.
시루봉이 뻗어 내려오면서 도통산(道統山), 돌잔산(석잔산-石棧山), 진등(장등-長嶝), 화산(禾山), 방아등(용등), 각정산(角亭山) 등을 이루면서 동정골(銅庭谷), 잔당골(백곡-栢谷) 등의 작은 계곡이 많아 각기 이름을 가진 샘이 많고 물이 맑기로 이름이 나 있다.
그리고 마을의 계곡과 마을 앞에 조성된 들판은 비옥한 토질로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한 지대이다.
◎ 사적 및 기타
◇ 수림서원(繡林書院)
마암면 화산리에 있는 서원으로 1856년(철종 7년)에 창건하였으며, 무열공(武烈公) 배현경(裵玄慶), 밀직(密直) 배연지(裵延芝), 고부군(古阜君) 배인경(裵仁敬)을 제향하였고 후에 악포(樂圃) 배맹관(裵孟寬), 성제(省齊) 배상곤(裵尙崑) 배경을 봉안하여 사람이 제향하였으나 지금은 후손이 제향하고 있다.(도지정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 누정(樓亭)과 재실
마을에는 산해정(山海亭), 양정재(養正齋), 화양재(禾陽齋), 대명재(戴明齋) 등의 정자와 각 문중의 재실이 있다.
◇ 비(碑)
▷ 경암 배정학 사적비(敬菴 裴正學 事蹟碑) ▷ 매담 배도홍 사적비(梅潭 裴道弘 事蹟碑) ▷ 각정 배공 유허비(覺亭 裴公 遺墟碑) ▷ 여주 이씨 선생 제단비(驪州 李氏 先生 祭壇碑) ▷ 국회의원 최석림 기적비(國會議員 崔奭林 紀蹟碑)가 각각 있다.
◎ 중국 낙양(洛陽)과 유사한 화산마을
중국 지리전에 낙양은 천하의 중앙지라 하였고 또한 천하의 문화가 모두 낙양에서 나왔다.(천하문물개출어낙양-天下文物皆出於洛陽) 하였으며, 마암면 또한 지리적으로 고성군의 14개 읍면의 중간에 위치하여 마을이 생긴 이래로 유교를 숭상하여 왔다.
그런 까닭으로 화산은 마암면의 낙양이라 일컬어 왔으며, 본 마을에서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여 왔는데 그 대표적인 유학자는 용강 최동태(용岡 崔東泰), 화강 김현운(禾岡 金鉉運), 매담 배도홍(梅潭 裵道弘), 삼소당 이병두(三素堂 李秉斗), 춘호 최정모(春湖 崔禎模), 실암 배상흘(悉菴 裵相吃), 수당 이찬규(修堂 李讚奎), 화봉 이태규(禾峯 李泰奎)와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이러한 유학자들이 많다 보니 크고 작은 서당을 지어서 수 백년 동안 향토의 자제들을 모아서 도덕, 윤리, 예학을 가르쳐 왔으며 이로써 마암의 낙양이라 하여 마을 앞에 낙양대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 전설
◇ 화산리 개장골
지금부터 약 400여년전 서화 입구 좌측 산쪽에 개장골이라 부르는 산이 있었다.
여기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3년을 계속하여 마을에 흉년이 들어 대문 밖에는 걸인들이 줄을 이어 동냥을 하러 왔다. 이 부자는 걸인들이 하도 많이 오기에 꾀를 하나 내어 대문간에 큰 통을 만들어 주먹 하나만 들락날락하게 해 놓고 통속에 곡식을 채우고는 걸인들이 한 줌씩 가져가게 했다.
이렇게 하기를 몇 달, 소문을 듣고 각지의 걸인들이 모여드니 부잣집 마님은 골치를 앓았다.
하루는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탁발을 나왔다. 주인 마님은 스님을 불러 어떻게 하면 걸인들이 오지 않겠느냐 하였더니 사람들이 많이 오면 좋지 않습니까 하였다. 마님은 이제 진절머리가 나니 제발 처방을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스님은 꼭 그러시다면 집 뒤에 있는 5대조 묘의 좌향을 조금만 바꾸어 놓으면 걸인들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는 스님은 떠나갔다.
주인 마님은 곧 인부들을 시켜서 5대조 묘의 좌향을 바꾸어 놓으니 그만 수천석을 하던 부자는 한 달이 채 못되어 망해 버렸다. 그러나 이런 소식도 모르는 각지의 걸인들이 찾아와 대문 앞에서 굶어 죽으니 수천 명의 걸인 시체가 쌓였다. 이에 인근 마을 사람들이 걸인 시체를 개 묶듯이 묶어 장사를 지냈는데 이 골을 지금도 개장골이라 부르고 있다.
5. 도전리(道田里)
마암면 도전리는 본래 고성군 서마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시 용전(龍田), 선미(船尾) 등 일부와 동마면의 도동(道洞) 일부를 병합하여 도동과 용전의 이름을 따서 도전리로 하여 마암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마을로 명송(明松), 도전(道田), 기전(基田), 용전(龍田), 초선(草船)의 5개 마을이 있다.
▣ 명송
명송마을이 동명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200여년전에 정윤명(鄭允明)이란 선비가 한양에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조용히 은거할 곳을 찾던 중 마침 이곳에 생활할 터전을 마련하고 정각을 세워 이를 명송정(明松亭)이라 이름하였는데 명송마을의 마을명도 이 명송정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 마을의 형성
사람이 살게 된 것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오래된 문중의 선산을 참고하여 살펴보면 약 200여년전에 성산이씨, 광산김씨, 김해허씨, 전주이씨 등 여러 성씨가 입촌하여 살면서 지금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지명일화
◇ 숯통골
명송마을은 문자 그대로 소나무가 우거져 명송(明松)이라 하였으며, 옛날에 이곳에 명송정을 세워 정각 앞에 샘을 파 주위에 숯을 묻어 물을 정화시켜 항상 맑고 깨끗한 물을 마실수 있게 하여 지나는 길손들이 물을 마셨다. 이 길손들에 의해 전해지는 지명이 ‘숯통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