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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으로 당대 최고 이름 떨쳐
한국 최초 시조동인회 ‘율’ 동인에서 활동 해
고성문학 태동시킨 영번지 동인 출신
만년 술에 취한채 고향 그리며 66세 나이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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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서벌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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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시조 동인회인 ‘율’동인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서벌선생의 활동상이 1966년 3월 29일자 중앙일보에 소개됐다.
지난 8월 6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한국 시조문단의 큰 별 故 서벌 선생.
그의 대단한 문학성은 그가 열살 남짓한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몇몇 문인들 사이에서는 문재의 가능성이 점쳐졌다.
1939년 10월 17일 영현면 봉발리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님의 읍내 이사로 고성읍 수남리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시조시인 김춘랑 선생(72)과는 나이를 넘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너무도 각별한 문우였다.
김춘랑 선생은 “어느해 여름 유난히 달 밝은 밤 수남리 갈밭 부근 그의 외갓집 마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연극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모두 그 연극에 심취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가 들고 다니던 대금을 연주하여 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게 됐다”며 “그 때 극본을 쓴 사람을 알아보니 다름아닌 서벌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서벌의 나이 12~13세 되던 해였다고 한다. 그 때 김춘랑 선생은 서벌의 작가적 역량을 짐작했다.
유난히 김춘랑 선생을 따랐던 서벌은 이후 언개웃골(삼산면 병산리 골짜기, 너무 추워 바닷물이 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땅골재(삼산면에서 고성읍을 넘어오는 경계) 등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면서 문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시기가 서벌에게 있어서는 장차 문인으로서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 시초 가 된 듯하다.
그 후 서벌의 나이 이십도 채 되기 전 17~18세때 고성에서는 김춘랑 선생을 비롯, 이문형, 선정주, 최진기, 최우림, 남정민 선생 등이 모여 고성문학의 태동인 ‘영번지 동인’ 활동을 시작했다.
세상에 고성 문학을 드러내는 시점이었다.
이 때 서벌의 문학성을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했던 김춘랑 선생은 그를 ‘영번지 동인’으로 추천했으나 너무 어린 그의 나이 때문에 준회원으로 활동했다.
영번지 동인들은 매월 2~3번씩 만나 작품 발표회를 하고 서로에 대한 작품 평을 하면서 문학의 세계를 넓혀나갔다.
김춘랑 선생은 “당시 영번지 동인들은 모두 고성 뿐만 아니라 경남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지만 솔직히 서벌이 나이는 어렸지만 그의 작품성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출중했다”고 한다.
이에 서벌은 영번지 동인 활동 서너달 만에 정회원으로 발탁됐다.
이렇게 고성지역에서 문학활동에 열정을 쏟고 있을 즈음, 1965년도에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동인회인 ‘율’동인이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결성, 본격적인 문학활동에 들어가게 됐다.
이 ‘율’ 동인은 김교한(마산), 이근갑(진해), 김호길(사천), 박재두(통영)선생을 비롯, 고성에서는 ‘영번지’ 동인이었던 김춘랑선생과 서벌이 나란히 추천되기도 했다.
이같이 고성에서 2명이 동인활동을 하게 되자 ‘율’동인 창간호와 제2호가 고성에서 발행됐다.
당시는 시대적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라 지방에서 동인활동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따라서 자연 ‘율’동인은 문인들과 언론의 관심을 받기에 이르렀다. ‘율’동인 탄생 이듬해인 1966년 중앙일보사에서 동인들의 문학활동을 취재, 당시 농사를 지으면서 문학에 심취해 온 서벌에 포커스가 맞추어졌다.
이미 그는 1965년 문화공보부 주최, 문학부문 신인 예술상에 당선되는 등 문단에 화려한 이름을 등극시켜 놓고 있었다.
이 때 심사위원은 노산 이은상 선생이 맡았다. 노산은 수많은 신인상 후보 가운데 유난히 서벌의 작품성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그만큼 서벌은 신인답지 않은 높은 작품성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농군 시인 서벌의 문학세계와 정신 세계가 언론에 소개되자 이를 본 수많은 문학 소녀들이 편지를 보내왔다.
이 중 지금의 부인 김민자여사도 서벌의 문학세계에 반해 펜팔을 하게 됐다. 이후 둘 사이는 사랑으로 발전해 이듬해 안정사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면서 백년가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시조가 맺어준 아름다운 인연은 수남리의 한 오두막집에서 둥지를 틀면서 신접살림이 시작됐다. 그러나 달콤한 신혼생활도 잠시, 1967년 서벌은 군대를 가게 됐고 1970년 제대 후 서울로 가게 된다.
수많은 세월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와 생선 함지박을 이고 다니며 행상을 하는 어머니를 고성에 남겨 둔 채 ‘먹고 살 길’을 찾기 위해 서울로 향한 것이다.
서벌은 서울서 몇몇 친구들을 찾아 ‘기댈 곳’을 찾아 보지만 외면당하고 만다.
이때 지금도 한국 시조 문단에서 ‘과연 서벌이다’ ‘서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등등의 찬사를 받고 있는 서벌의 시조 <서울 1>이 탄생된다.
이후 노산의 도움으로 독립사 편찬위원회 편집 간사로 일하면서 차츰 서울에 정착, 문학 세계를 넓혀갔다.
서벌은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에 선정되는가 하면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시조만큼이나 술도 좋아했던 탓에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가끔 실수를 하기도 했으나 그의 문학세계만큼은 분명 한국 문학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내가 본 서벌 선생은?
그의 시조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시간 가졌으면…
“서벌은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가 한국 시조계에 큰 이름을 우뚝 새긴 것은 고성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한국 시조사에도 길이 남을 만큼 훌륭한 시조 시인이었다.”고 말하는 김춘랑 선생.
서벌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이해해 왔던 김춘랑 선생은 그의 죽음을 받아 들이기 조차 힘겹다.
김춘랑 선생은 “서벌의 유년시절은 가난이라는 굴레 속에서 참으로 힘겨운 나날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도 뜨겁고 강했기에 모든 시련은 그의 문학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며 “오히려 그러한 어려움을 당당히 받아들여 시조로 승화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문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서벌을 이해하는 데 결코 나이는 장애가 될 수 없었다”며 “그의 작품을 접하다 보면 그 작품성에 절로 감탄을 하게 되고 후배지만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울 때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특히 그는 서벌의 작품 <서울 1>에 표현된 초장의 ‘만평 적막을 사다’와 중장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흩고 막 뿌릴까 보다’라는 표현은 쓸쓸한 자신의 심경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그야말로 한국 시조사에 큰 획을 긋는 획기적인 표현력이라고 강조하면서 서벌의 많은 시조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작품 중 하나라고 말했다.
“시조 밖에 모르는 그였기에 수많은 작품들을 쏟아 내면서도 모두 하나같이 그 작품성을 인정받는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고 말하는 그는 “한국 시조계뿐만 아니라 고향인 고성인들도 그의 작품성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서벌이 세상을 뜨기 몇년 전부터 술을 가까이하면서 많은 지인들과 고성인들에게 실수를 하는 바람에 거리감이 생기기도 했으나 결코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쌓아 올린 문학적 발자취를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춘랑 선생은 “서벌의 한 생애를 알고 나면 그의 만년에 술이 취하면 부리던 그런 주사까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한 생애 뜨겁게 시조를 사랑하다 하직한 그의 예술혼을 다시 한 번 기린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