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항포대첩과 공룡엑스포②
/황수경기자 기자 / 입력 : 2005년 01월 29일
|  | | ⓒ 고성신문 | | 왜병은 부산에 상륙 후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
임진왜란(1592년 임진년, 선조 25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에 따라 과대망상으로 시작되고 히데시의 죽음으로 7년 전쟁이 끝난다.
왜병은 보병 15만8천명, 수군 9천명이 대마도를 거쳐 부산에 상륙 4월 14일 부산진성, 동래성이 함락되고, 1군대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4월 20일에 대구를, 2군대장 가토기요마사는 21일에는 경주, 22일에는 영천을 함락시켰다.
고니시는 부산, 동래,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상주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고, 가토는 4월 17일에 부산에 상륙 경주, 영천을 거쳐 죽령을 넘어 한양으로 향해 올라갔다.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는 4월 19일 안골포에 상륙 김해, 창원, 영산, 창녕, 현풍을 거쳐 4월 27일에는 성주를 함락시키고 추풍령을 넘어 한양으로 향했다.
충주에서 선봉을 다투던 고니시와 가토는 4월 29일에 한양을 향하여 두 길로 쳐들어 오는데, 고니시는 여주를 거쳐 동대문으로 가토는 죽산, 용인을 거쳐 한강을 건너 남대문으로 쳐들어왔다.
고니시가 가토보다 먼저 동대문을 거쳐 싸움 한번 하지 않고 도성안으로 들어와 보니, 선조임금이 도망을 가자 난민들이 불을 질러 경복궁과 창덕궁은 아직도 불이 붙는 중이고, 사람하나 없는 텅빈 한양이었다. 이날이 5월 3일 아침이었으니 왜병이 부산에 상륙 후 만 20일만에 서울이 완전 점령 당하였던 것이다.
당파 싸움만 하다가 나라가 결단 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율곡 이 이 선생, 송강 정 철 선생과 같은 연갑인 병신생이다.
율곡 선생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 선조임금에게 군사 10만을 길러 왜적들을 방어하자고 주장하다가 태평세월에 양병을 해서 무엇 하느냐고 서애 유성룡이 반대를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흔 아홉에 세상을 떠난 율곡 선생과 조선 침략의 장본인인 히데요시가 같은 해에 태어난 것은 기이한 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선조 23년 경인년에 일본 가는 통신사로 정사에 황윤길 부사에 김성일 서장관에 허성이 히데요시를 만나고 1년만에 돌아와서 하는 보고가 황윤길과 허성은 “왜국의 조선에 대한 정세는 반드시 병화를 일으킬 것 같사옵니다”라고 하였고, 김성일은 “아니옵니다. 황윤길과 허성의 말은 틀리옵니다. 히데요시는 하잘 것은 용속한 인물입니다. 왜적은 절대로 조선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옵니다”라고 정반대의 복명을 하였다.
임금 선조는 어이가 없어 조정에 명을 내려 의논을 붙이니 동인들은 김성일이 옳다하고, 서인들은 황윤길이 옳다하여 서로 싸우다가 마침내 김성일의 “아무일도 없으리라”하는 데로 기울어졌다.
유성룡이 가만히 김성일을 불러 물었다.
“자네는 난리가 안난다고 주장하다가 만일 왜병이 쳐들어 오면 어찌하려나?”하고 묻자 “아닐세. 왜병이 아니 온다는 것이 아니야> 황정사 말이 하도 호들갑스러워서 안팎을 놀라게 하니까잠깐 늦추어 두자는 거지”하고 책임없는 어리벙벙한 소리를 하였다.
유성룡과 김성일은 같은 무리였다. 이렇게 당파 싸움만 하다가 왜적이 쳐 들어 오는 줄도 모르고 백성들을 죽음과 전란의 고통속으로 몰아 넣은 것이다.
그 후 400여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한가?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 지고 내년에는 금년보다 더 어려워 진다고 하는데 우리 정치인들은 밤낮으로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다.
기나긴 겨울밤 역사 소설 한 권이라도 읽고 당파 싸움의 병폐가 어떠하였는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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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경기자 기자 /  입력 : 2005년 0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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