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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면 녹명 신천 월계 남진 자소 동천 어선 석전 산북 9개리 관할, 현재 6개리 52개 마을 형성 고려 현종 때 회현면과 화양면으로 나눠 행정구역 관리 배둔 산 54번지 배둔성터 200m 흔적 남아
10. 회화면(會華面)
회화면은 소가야 때 녹명향(鹿鳴響)으로, 고려현종 9년(서기 1018년)에 고성현으로 개칭되면서 회현면(會賢面)과 화양면(華陽面)으로 나뉘어져 회현면은 녹명, 신천, 월계, 남진, 자소, 동촌, 어선, 석전, 산북의 9개 동리를 관할하였으며, 회양면은 배둔, 당항을 관할하였다.
1914년 3월 1일자 조선총독부 경상남도령 제2호로 면을 병합할 때 회현면과 화양면의 배둔, 당항의 2개동과 구만면의 덕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회화면으로 개칭 녹명(鹿鳴), 삼덕(三德), 봉동(鳳東), 어선(語善), 배둔(背屯), 당항(當項)의 6개리로 개편하였다.
회화면은 1913년 3월 31일자로 면이 설치되어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로 배둔리, 당항리, 봉동리, 어신리, 삼덕리, 녹명리 등 종전대로 6개 법정리 16개 행정마을 52개 반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회화면은 고성읍에서 13.2㎞, 동북쪽에 위치하여 북쪽은 마산시 진전면, 서쪽은 마암면과 구만면, 동남쪽은 당항만을 경계로 동해면과 접하고 있다.
면사무소의 소재지는 배둔리 825번지에서 1969년에 배둔리 334-7번지로 이전하였으며, 총 면적은 29.47㎢이고 가구는 1천522가구에 인구 5천458명(남자 2천702명, 여자 2천756명)으로 고성군 총 가구의 7.1%, 총 인구의 7.2%가 거주하며 임야가 1천890㏊이고, 경지면적은 774㏊에 농가수는 884호에 비농가가 19호이고, 어가가 55호로 인구밀도는 229인/㎢이며, 해안선은 9.4㎞이다.
면내의 공공기관과 교육기관은 면사무소를 위시하여 파출소, 우체국, 농협 및 축협출장소 등이 있고, 초등학교 3개교에 회화중학교, 고성고등학교가 면소재지에 있다.
면내의 문화재 등 사적은 배둔리 성터와 봉동리 선사유적, 금봉산 고분군이 있고 당항리에 당항포 관광지가 개발되어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현재 확장개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삼덕리 옥수골이 1990년 1월 15일에 온천지구로 고시되어 개발을 추진하고 있으며 배둔리에 회화농공단지가 조성되어 각 기업체가 입주하여 가동 중이고 국도 14호선이 면 소재지를 통과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하고 있다.
1. 배둔리
배둔리는 본래 고성군 화양면(華陽面)의 지역으로써 지형이 배가 멈춘 형국과 같다하여 배둔이라 하였다고 하며, 또한 각지의 보부상들이 모여들어 정착한 마을이라 하여 배둔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배둔리는 1948년에 배둔 1·2구의 행정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4년 2월 25일자로 1·2구를 동서남북 순위에 따라 사회생활의 근본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붙여 행정동명을 관인(寬仁), 안의(安義), 가례(嘉禮), 양지(良智) 등의 4개 행정 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관인(寬仁)
관인마을은 배둔리의 동쪽에 위치하여 옛날부터 각지의 행상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1974년 4개의 행정동으로 분동하면서 주민들의 성품이 어질다하여 사회적인 도덕을 근본삼아 ‘관인’마을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고려현종 9년(1018년)에 고성현으로 개칭될 당시 화양면의 배둔으로 존치한 바 있으며 맨 먼저 입촌한 성씨는 칠원제(諸)씨이고 다음에 창원구(具)씨, 밀양박(朴)씨 등 제씨가 입촌하여 살고 있다. 관인 마을은 면소재지 마을로써 회화초등학교가 본 마을에 있다.
▣ 가례(嘉禮)
가례마을은 배둔의 중심지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부터 행상들이 모여서 동리가 형성되었으며 동명은 배둔리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예(禮)자를 붙여 가례동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고려현종 9년(1018년)에 고성현으로 개칭될 당시 화양면의 배둔으로 존치하였으며, 주민이 입촌한 기록으로는 1590년경에 창원구씨, 김해김씨, 밀양박씨, 칠원제씨, 창원황씨 등 제성씨가 입촌하여 지금은 3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거주하고 있고 배둔우체국이 마을 내에 있다.
◎ 지명일화
◇ 마구들
가례마을 남쪽에 있는 들판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바다로 싸움터가 되었으며, 일제때 일본인이 간척사업으로 조성한 들판을 당시 주민들은 소작으로 농사를 짓게 하여 수확한 농산물을 마구 거두어 갔다고 하여 ‘마구들’이라 부르고 있으며 방조제를 ‘송강둑’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 잡안개
배둔리 남쪽에 있는 해안지로 임진왜란때 왜병의 도망병을 잡은 곳이라 하여 ‘잡안개’라 하였으며, 잡은개가 바뀌어서 ‘잡안개’라 부르고 있다. 이 갯가는 속시개로 이어져 있고, 지금은 해안을 매립하여 각종 시설부지를 조성하고 있다.
◇ 황장군 산성(黃將軍 山城)과 노장군 묘역(盧將軍 墓域)
가례마을 동쪽에 있는 호산(好山)으로 일설에 명산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노장군 묘와 황장군 묘소가 있어 황장군 산성, 또는 노장군 묘역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노장군 묘와 황장군 묘소가 있어 황장군 산성, 또는 노장군 묘역이라고도 하는데 두 장수가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려고 싸우는 말 발굽소리와 칼과, 창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는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 양지(良智)
양지마을은 관인, 가례마을과 같이 행상들이 마을에 모여 살면서 형성된 마을로 배둔리의 북쪽에 있다하여 인·의·예·지의 순서에 의거 양지마을로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배둔리의 다른 마을과 같이 고려현종 9년(1018년)에 고성현으로 개칭될 당시 화양면의 배둔으로 존치한 바 있어 그 시기로 추정하고 있으며 입촌한 성씨는 1590년경에 창원구씨가 신기(新基)마을에 맨 먼저 입촌하였고 다음으로 1890년경에 달성배씨, 전주이씨, 김녕김씨, 안동권씨 등 여러 성씨가 입촌하여 지금은 16여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 산제곡과 산신제
방화산 계곡에서 옛날부터 음력 정월 보름달 자시에 산신제(동신제)를 모시고 왔으며, 지금은(1992년) 배둔리 산 55-5번지에 배둔리 4개 동민이 합의하여 ‘방화산 산신각’을 건립하여 이곳에서 산신제를 모시고 있으며 제후 행사로 농악놀이와 달집놀이 등 행사를 하고 있다.
◎ 배둔리 성터
회화면 배둔리 산 54번지(배둔리 북방 400m지점)에 위치한 주위 약 200m의 토성이나 대부분 붕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 안의(安義)
안의마을은 배둔리의 관인, 가례, 양지동 마을과 같이 행상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1974년 4개의 행정동으로 분동되면서 배둔의 서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의(義)자를 붙여 안의마을로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배둔리의 다른 마을과 같이 고려현종 9년(1018년)에 고성현으로 개칭될 당시 화양면의 배둔으로 존치하였으며, 주민이 입촌한 연대는 1590년경에 창녕성(成)씨가 입촌하고, 1790년경에 창원구씨가, 그리고 1800년경에 달성배(裵)씨, 진양강(姜)씨, 창원황(黃)씨 등 제씨가 입촌하여 지금은 20여 성씨가 마을에 살고 있다.
마을입구는 국도 14호선(고성~마산)과 지방도(배둔~구만)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 내 공공기관과 교육기관으로는 파출소, 회화농협, 축협회화지소와 고성고등학교, 회화중학교가 있고, 마을 중앙에는 배둔시장(市場 5일장)이 위치하고 있다.
◎ 3.1운동 창의탑
기미년 3월 20일에 국천광장(구만면)에서 수천 군중이 모여 3.1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배둔시장으로 행진하여 맨 주먹으로 일제에 항거한 애국투사들의 위훈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1년 6월에 3.1운동 창의탑을 이곳에 세웠다.
그 뒤 1986년에 배둔~구만간의 도로 확포장 공사로 인하여 현 위치로 옮겨 탑이 낮고 낡아서 다시 탑을 다듬어 높은 탑을 건립한 것이다.
◎ 군진(軍鎭)마을
군진은 선조 25년(1592년) 임란 때 5천여 명의 아군이 주둔하여 당항포로부터 상륙하는 왜병을 모조리 섬멸시킨 아군의 진지로 군진이라 부르고 있으며, 지금도 당시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