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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서구문물에 길들여진 요즘의 사람이라 해도, 원초적인 흥을 이끌어내는 농악소리만큼은 한국사 의 뼛속에 녹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휘몰아치듯 숨 가쁘게 빠른 휘모리장단부터 소가 그 우직한 걸음을 걷는 듯한 자진모리장단까지, 작달막한 체구에서 나오는 장단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힘이 넘친다.
구순을 바라보는, 올해 여든여덟의 배기석(상조) 옹. 그는 자그마치 64년이나 상쇠노릇을 했다. 그는 전국에서 최고령의 상쇠다.
# 반세기가 훌쩍 넘은 상쇠 인생
20대 초반의 배 옹은 막 장가를 들어, 처음 꽹과리를 만났다. 오촌 고모의 시동생이 두드리던 쇠 두 짝에 오금이 저릴 만큼 신이 나더란다.
소달구지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할아버지가 당신이 가르쳐줄테니 상쇠를 해보라 하더란다. 그렇게 그의 상쇠인생이 시작됐다.
스물셋까지 농사가 천직이라고만 생각해온 배기석 옹에게 꽹과리는 문화적 충격이었을 게다.
그렇게 잡은 꽹과리는 울긋불긋한 띠를 두르고, 고성읍내를 돌아다니며 군청에서 술을 얻어 마시고, 또 한 잔 얻어 마시려 경찰서에 들렀다가 농악대 악기를 몽땅 뺏긴 적 외에는 그의 손을 떠난 적이 없다.
# 고성장단 가진 마지막 상쇠
그는 고성의 장단을 보유한 마지막 상쇠다. 스승은 없었다. 두들기면 사당패라고 혼나던 시절이었으니, 가르쳐줄만한 스승이라고는 할아버지뿐. 그러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독학이었다.
그저 신나는 장단을 찾아 쳐대는 것 외에 딱히 방법이 없었다. 독학이지만, 그의 장단은 고성군내서 최고다. 가장 오래돼서 최고이고, 가장 잘 해서 또 최고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창일 적에는 꽹과리 서너 번 두드리면 가을 감나무에 감이 열리듯 돈이 주렁주렁 열렸단다. 진주 한량들이 장단을 맞춰보자고 송도 양철집을 찾아왔다가 “배 선생이 상쇠하소”하고 물러났다니, 그 소문이 어디까지 흘러갔을지는 알 수 없다.
# 제자 없으니 맥 끊길 고성장단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골짝까지 오려는 열정이 없다며, 조금은 호통처럼 또 조금은 탄식처럼 말을 뱉는다. 몇 년 전까지는 고성의 장단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간간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
하지만 3~4년 전부터는 그 발길이 아예 끊겼다. 넋두리처럼 한숨을 섞어가며 말을 잇는다. “내가 내일모레 구십이니, 언제 갈지 모르는데 물려주지 않고 가면 고성 장단은 맥이 끊기는 것”이라며, 옆에서 익어가는 막걸리를 한 잔 들이켠다.
민초들의 시름을 시원한 장단으로 풀어내던 배기석 옹의 꽹과리는 보물처럼 아래채에 모셔졌다. 구순의 상쇠는 꽹과리를 들고 마음만큼 놀지 못한 것이 아쉽고, 젊은이들이 하는 농악이 고성의 장단이 아니라, 타지에서 들어온 장단이라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며 아련한 눈을 한다.
그 눈 안에는 꽹과리를 처음 잡은 젊은 시절도 들어있고, 칠채며, 휘모리, 자진모리 등등의 장단도 그 안에서 놀고 있는 듯하다. 고성 고유의 장단이 사라져가는 지금, 그는 아마도 최고의 광대요, 이 시대의 마지막 상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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