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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 우국충절 되새겨…백마강 푸른 물은 그대로

최영부 고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회원의 백제의 고도 부여지역 문화유적지 답사기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9년 02월 13일












▲ 최영부


고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회원


▣정림사지와 5층 석탑을 배관(拜觀)하면서



부여 시내에서 중심길인 중앙로에서 동편

로 조금 가니 평지보다 약간 높은 축대를 쌓은 장방형 대지위에 세월의 무게를 실은 듯한 고색창연(古色蒼然)하고 장중한 석탑 한기가 의젓한 모습으로 서있다. 이 탑이 바로 우리가 답사할 정림사지 5층석탑이었다.


 


답사자료에 의하면, 현재 백제 때의 유구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부여에서 제자리를 지키는 것은 이 정림사지 탑 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이 탑은 백제시대의 부여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고문헌(古文獻)인 중국의 역사서인 「복사」의 백제편에는 ‘寺塔甚多’라 하여 백제에는 탑이 많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백제의 수도이던 부여에는 오직 정림사 터의 5층석탑만 남아 있는 역사적 사실이기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불변하는 것은 없고 모두다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는 부처님 말씀이 거짓이 아님을 일깨워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탑을 조각한 사람은 사라져 이름도 알 수 없지만 정성과 혼이 담긴 석탑은 옛 모습 그대로 인지라,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는 명언도 무정설법(無情說法)으로 말없이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한 정림사지 5층석탑의 특징을 말하면 백제가 멸망해간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채 1천400여년을 버티어 왔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보다도 불교가 융성했을 백제의 불교문화 가운데 자리로만 남아 있는 목탑은 다 허물어지고 없지만, 지금 남아 있는 석탑은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5층석탑 2기 뿐이란다.



특히 학자들은 이 정림사지 5층석탑은 백제 석탑의 완성된 형태로 손꼽는다.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건물을 모방한 듯이 작은 탑돌을 아기자기하게 엮어 쌓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반해, 이 탑은 부재들이 단순하고 정돈되어 비로소 석탑의 완성미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 탑의 특징은 기단을 단층으로 하였고, 1층 기둥돌의 비례면적에 견주어 좁게 보이면서도 면석 모서리의 기둥돌들은 갈수록 좁아져 목조건물의 배흘림 모습을 약간 보여주고 있다. 탑의 처마돌은 판석으로 세 모서리를 상승감(上昇感)있게 위로 올려 둥글게 처리하여 중후하면서도 경쾌한 눈맛을 주는 백제인의 예술적 혼이 담긴 석탑이라 하겠다.



하지만 매우 애석하고 안타까운 것은 1층 탑신부에 새겨져 있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전승을 기념하는 듯한 「大唐平濟國碑銘」이란 명문(銘文) 때문에 소정방이 이 탑을 세웠다는 논란이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이미 세워진 탑에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의 3충신과 삼천궁녀의 넋이 잠든 부소산성과 백마강



부소산성은 부여시의 북쪽인 쌍북리에 있는 백마강을 마주한 부여의 진산(鎭山) 부소산에 있는 산성으로 북으로는 백마강을 두르고 절벽으로 된 산이 바로 막아선 형상이다. 때문에 북으로부터 내려오는 고구려 군사를 방비하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부소산성의 역사는 백제 성왕이 538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긴 뒤 왕궁과 시가를 보호하기 위해 최후의 보루로 쌓은 것으로 후대 무왕이 다시 고쳐 쌓은 성이라 한다. 성곽 축조방식은 산정에 테뫼식(머리띠 모양)으로 산성을 쌓고, 그 주위에 다시 포곡식(성내부에 낮은 분지가 있는 형식)으로 둘렀기에 흙과 돌을 섞어 쌓은 토석혼축(土石混築) 형식이다.



▣삼충사를 참배하며 백제의 멸망사를 회고하다



부소산성으로 가는 길 초입(初入)에는 백제의 삼충신(三忠臣))인 좌평성충, 흥수, 달솔이었던 계백 장군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기리기 위한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한 삼충사(三忠祠)가 서 있다. 돌담으로 쌓은 원장(垣墻)으로 둘러진 대문인 충절을 표상(表象)하는 의열문(義烈門)이란 현액이 걸린 붉은 색의 정려문(旌閭門)을 통과하면 외삼문(外三門)이 나오고 이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내삼문(內三門)이 있고 내삼문을 지나면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봉안각(奉安閣)이 있는 삼충사가 발걸음을 이끌었다.


 


잠시 동안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자세로 불타는 우국충정 호국애(憂國衷情 護國愛)를 추모하는 묵념을 드리고 세분이 함께한 다음과 같은 백제의 멸망사(滅亡史)를 잠시 회상하였다.



◎백제 멸망사와 그것이 남긴 교훈



무왕의 맏아들로서 용맹하고 효성과 우애심이 깊어 해동증자로 불리었고, 642(의자왕2년)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키고 대야성(합천), 당항성, 요거성 등 요지를 공격하여 신라를 곤궁에 처하게 하여 국위 선양에 힘썼다. 하지만 만년(晩年)에 정사(政事)는 등한시하고 애첩 은고의 치마폭에서 놀아나며 사치와 방탕에 빠졌다.


 


그런 의자왕에게 「육로는 탄현(지금의 대전 근방)을 넘지 말게 하고, 해로(海路)는 덕물도(지금의 적덕도)에서 적병을 맞으라」고 한, 옥에 갇힌 장군 성충의 예언과 귀양가서도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충언을 올린 흥수의 말을 듣지 않고 간신들의 모함(謀陷)을 들은 의자왕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백제군은 나당연합군의 진격을 막아야할 적절한 시기와 장소를 이미 놓쳐버렸다.


 


그 때 달솔의 벼슬에 있던 계백 장군은 성안을 다니며 목숨을 나라의 운명과 같이할 결사대 5천명을 뽑았다. 최후의 저지선인 황산벌(지금의 연산)로 나아가기 전에 이미 나라의 운명을 예감하고, 적병들이 몰아 닥쳤을 때에 욕을 당하거나 노예가 되게 하느니 자신의 손으로 처자(妻子)를 베고 그 시신마저 적병의 손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집에 불을 놓고 전장에 나갔다.



황산벌 너른 들에서 정면으로 신라 5만 군사를 대적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병사들을 3군으로 나누어 장군 자신은 중군으로 산적리 산성에 머물고 좌군은 황령산을, 우군은 모촌리 산성을 지키게 하여 신라군이 산마루 좁은 관문을 타넘을 때 일시에 협공함으로써 기세를 누르는 계략을 세웠다.


 


그리하여 공방이 붙기를 네 차례, 백제군은 10분의 1밖에 안되는 적은 수로써 신라군에 대적하여도 오히려 사기가 충천하였다. 그러나 전세는 역전되었다. 계백이 사로잡은 신라의  어린 화랑 관창을 그 기개(氣槪)를 높이 사서 돌려보내지만, 임전무퇴(臨戰無退)라는 계율이 있는 화랑도(花郞道) 정신으로 심신을 단련한 관창이 다시 돌아와 싸우기에 다시 잡아 목을 베어 되돌려 보냈다.


 


그것이 무참히 짓밟혀 꺾여 있던 신라군의 전투욕(戰鬪慾)을 불살라 마침내 백제군이 산산이 멸되는 계기가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계백과 5천의 결사대는 황산벌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게 되었다. 그 후 이 전투에서 승리한 나당연합군은 협공으로 사비성을 함락, 불태우자 의자왕은 왕자와 함께 공산성으로 피신, 항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항복하고  말았다.



이렇게하여 백제는 제31대 678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용맹하고 효성과 우애심이 깊어 한때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리던 의자왕은 4명의 왕자와 신하와 장군 그리고 1만2천800여 명의 장정과 함께 포로가 되어 이곳 백마강에서 뗏목 배를 타고 황해를 지나 당나라 수도 낙양으로 끌려갔다.


 


남은 처자식과 친지들이 이름을 부르고 통곡하며 검푸른 백마강물이 허옇게 물 들도록, 수 없이 던져 주는 피눈물로 범벅된 주먹밥으로 굶주린 허기를 달래면서 끌려간 이들은 대부분 종과 노예가 되어 한(恨) 많은 삶을 살다갔다. 뿐만 아니라 절개 지킨 낙화암 삼천궁녀들은 비바람 속 한 떨기 백합처럼 검푸른 백마강에 몸을 날렸고, 나라 잃은 백성들은 나당여합군의 말발굽 아래서 마구 유린당하는 질곡(桎梏)의 삶을 살게 되는 망국(亡國)의 쓰라린 비운을 맛보게 되었다.



▣부여인의 일상과 풍류를 엿 볼수 있는 영일루와 사비루 송월대에서



부소산 동쪽 영마루에는 어두운 무명(無明)을 물리치고 온 누리에 찬란한 광명(光明)의 빛을 선사하며 떠오르는 붉은 아침 해를 맞이하는 헌출한 영일루(迎日樓)가 반기는 듯 서 있다.
영일루는 부소산의 동쪽 봉우리에 있어 해 뜨는 광경을 잘 볼 수 있는 멋진 누각(樓閣)이기에 이런 엄숙한 이름을 지어 붙인 것이다.  



광명한 일출을 영접(迎接)하는 영일루 명소를 지나자, 그곳에는 잔디가 잘 심어진, 지금도 땅속을 파면 불에 검게 탄 쌀이나 보리, 콩이 나온다고 하는 군창(軍倉)터가 있다. 나당연합군이 쳐들어 올 때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백제군이 이곳에 저장한 군량(軍糧)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그때의 전투가 매우 절박(切迫)했음을 무언으로 알려주는 군창터에서 백마강 쪽으로 난 구불구불한 서쪽 능선길을 따라 조금 발길을 옮기니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이른다.
그곳에는 고색이 묻어나는 사비루라는 누각이 넓은 구룡평야를 굽어보며 외연(巍然)이 서 있다. 이것은 백제 때에는 해를 맞는 영일루와는 반대로 달뜨는 저녁이면 밤새도록 달빛을 즐기다가 기우는 달을 보내는 송월루(送月樓)였다고 한다.



▣백화정百花亭) 그리고 삼천궁녀의 넋이 잠든 낙화암과 백마강   


 
휘영청 밝은 달을 즐기다 보낸다는 멋있고 운치있는 화려한 정자각 사비루에 올라 황금빛 저녁노을에 잠겨가는 구룡평야의 아름다운 풍광을 조망하는 즐거움을 누린 뒤 발걸음을 옮겨 가니, 천년송(老巨樹千年松)이라 부르는 등굽은 낙락장송(落落長松) 한 그루가 위병(衛兵)처럼 호위(護衛)하는 청기와 육모지붕에 고아(古雅)한 모습의 백화정(白花亭)이 마중했다.



한 송이 역사의 꽃으로 산화한 삼천궁녀의 넋을 위해 후세 사람들이 건립한 백화정은 푸른 물결 감도는 절경인 백마강과 삼국유사 백제 무왕 37년(636)년의 기록에는 「3월에 왕은 좌우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백마강) 북포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이 포구의 양쪽 언덕에 기암과 괴석을 세우고 그 사이에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을 심었는데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왕은 술을 마시고 흥이 극도에 이르러 북을 치고 거문고를 뜯으며 스스로 노래를 부르고 신하들은 번갈아 춤을 추니 이때 사람들은 대왕포라고 말했다」라고 되어 있는 대왕포(大王浦) 절경을 한 눈에 굽어보는 절벽 위에 있어, 부소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대개 그곳에서 사진을 찍는 명소로 변해있고, 계백장군이 이끈 5천명의 결사대가 장렬히 전사하고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의 발 아래 유린될 때 삼천궁녀가 소복치마를 뒤집어쓰고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자 부여하면 연상되는 낙화암(落花巖)은 그런 백화정(百花亭) 바로 밑 절벽에 연해 있다.


 


이러한 전설로 낙화암이란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원래 이름이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여 곧 (사람이)떨어져 죽은 바위라고 한 것을, 그런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미화되어 조선 숙종 때 석벽 홍경춘이란 문사(文士)가 이곳에 와서 백제의 스러짐을 안타까워하며 이런 시를 지었기에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험하고 가파른 벼랑 사이로 난 계단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조심 내려서니 낙화암 절벽을 배경으로 삼천궁녀의 영정을 모신 궁녀사와 그 유명한 고란정(皐蘭井)이 있는 고란사(皐蘭寺)가 반기었다.



고란정은 약수(藥水)로 유명한데 부여에 도읍한 백제의 왕들은 이곳 고란수만 떠오게 하여 마셨다고 하며 또 고란수임을 확인하고자 고란수를 떠올 때는 반드시 이곳 바위틈에서 자생하는 고란초 잎을 그릇에 띄워 오도록 했다고 하여 고란정(皐蘭井)이라 한단다. 고란사란 사명(寺名)도 여기서 연유(緣由)된 것이란다.



▣배호의 「꿈꾸는 백마강」 노래를 부르며 백마강 멋진 풍류를 즐기다



답사의 마지막 일정으로 고란정 앞에 있는 고란사 향연(香煙) 그윽한 대웅전(大雄殿)에서 수미단 연화좌대((須彌壇 蓮華坐臺) 위에 좌정하신 3존불 앞에 일심향(一心香) 하나 불살라 올리며 이 땅에서 살다간 무주유주(無主有主)의 혼령들의 명복(冥福)과 모든 살아 있는 이의 행복을 기원하는 삼배(三拜)를 올리고 대웅전을 나와 아래쪽에 있는 백마강변 유람선 선착장에 갔다.


 


유람선을 기다리면서 부소산에 온 기념으로 그 곳 매점에서 향나무로 조각한 웃음 띤 앙증맞은 모습의 복돼지 암수 한 쌍을 샀다. 그뒤 일행과 함께 부여제7호란 선명을 가진 유람선에 승선하니, 작고한 가수 배호의 꿈꾸는 백마강이 애절하게 흘러나와 심금을 울렸다.



백마강은 지도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강인데, 이곳 부여 사람들은 호남의 젖줄인 금강의 한 부분인 낙화암이 있는 곳을 기점으로 대왕포와 구드래공원까지 약 4㎞의 금강 줄기를 별도 지칭하여 백마강이라 부른다는 것이다.<끝>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9년 0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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