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실학자 박지원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주창했다. 이 말의 의미는 여러 옛것을 미루어 참고여 새로운 것을 창제하라는 것이다.
이 말을 상기하며 고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의「백제의 고도 부여지역 문화유적지 답사」에 동행하였다. 지난해 10월 28일. 새벽 5시경에 일어나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집결 장소인 고성 1호광장에 갔다. 일행 37명은 예정대로 6시 30분에 출발했다.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타고 목적지인 부여를 향해 달려 10시 30분경에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에 있는 송국리 선사유적지 전시관에 도착했다.
도중에 고성문화원향토사 연구소 하기호 소장님께서 손수 작성하신「百濟의 古都 扶餘文化遺蹟址 踏査資料」란 자료에 의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일정을 설명하셨다.
▣부여 송국리 선사취락지(松菊里 先史聚落址)에서 벼농사 확인
전시관은 최근에 건립한 콘크리트 단층 건물로 전시실과 영상관람실 등이 구비되어 있었고, 이곳 부여향토사학자인 심강 윤홍식 님과 인국환 충남문화관광해설사께서 반갑게 맞이하며 전시관의 영상관람실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약 10여분 동안 송국리 선사취락지현황과 출토된 유물, 발굴과정 및 계획 등을 영상으로 관람하고 선사취락지 발굴 현장을 답방했다. 전시관에서 길 양편에 띄엄띄엄 늙은 소나무들이 늘어선 언덕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약 20여 분 정도 걸어 낮은 산마루를 넘어서니 발굴현장이 보였다.
송국리 선사취락지는 기름진 금강유역에 표고 약 40m의 낮고 완만한 경사의 야산으로 동쪽과 서편에 남북으로 흐르고 주변에 넓은 경작지가 펼쳐진 자연환경을 갖춘 곳이다. 그리고 동행한 인국환 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행정구역상의 위치는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와 소사리에 걸쳐져 있고, 유적지 발굴 지정면적은 53만5천746㎡이라고 한다.
송국리선사취락지는 1974년 4월 9일에 석관묘에서 요령식 동검(銅劍)이 처음 발견 되어 국내외에 커다란 반응을 불러옴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청동기시대의 옹관묘(甕棺墓), 석기시대의 가마터, 고려시대의 토광묘(土壙墓) 등 각 시대별 다양한 유적들을 확인한 것이다.
지금까지 발굴 성과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불에 탄 다량의 탄화미(炭化米)가 출토되어 농경문화를 대표하는 벼농사가 수천년 전인 이 시대에도 지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당시 송국리마을 형태가 외부 침입자를 방비하기 위해 마을 외각을 나무울장(목책, 木柵)으로 둘러 세운 보기 드문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송국리 선사시대인들이 거주한 집터들은 원형과 타원형의 움막집 형태라서 땅을 고른 평지의 가운데는 길고 둥근 튼튼한 기둥을 세우고 주변에는 작은 기둥들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비바람을 막기 위해 갈대나 억새풀을 엮어 지붕과 벽을 만든 집안에는 화덕을 만들어 취사와 난방을 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적지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반달돌칼, 돌검, 돌도끼, 숫돌, 화살촉 등의 석기와 이곳의 지명을 딴『송국리식』이라고 불리는 민무늬토기, 붉은 간토기 및 청동기 등이고 또 청동도끼의 거푸집과 다량의 탄화미가 대표적이고, 이들의 추정 연대는 대략 기원전 5~4세기경이라고 한다.
유적지 발굴현장에는 6~7명의『한국전통문화학교』학생들이 밀짚모자를 눌러 쓴 채 한 점의 유물이라도 다치지 않고 원형대로 발굴하다겠다는 굳은 의지를 엿보이면서 조심스럽게 흙을 파내고 있었다.
또 유물이 발견된 곳에는 흰색으로, 움막집 기둥이 세워졌던 곳에는 둥글게, 탄화미가 나온 곳은 타원형으로, 부엌과 화덕자리는 표주박모양으로, 발굴한 가지가지 유물과 유적의 형태대로 표시하며 발굴에 임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니 역사의식에 감개가 무량했다. 학생들에게 몇 마디 격려의 말을 남기고 머릿속에 선사시대의 선조들의 생활상을 그리며 능산리 고분군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부여 능산리고분군에서 백제인의 묘제를 알아보다
부여 능산리고분군은 경주에 있는 신라왕들의 큰 무덤과는 대조적으로 작은 7기의 무덤들이 올망졸망 어깨동무하며 정답게 늘어서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인세민 충남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부여 근방에는 백제의 고분(古墳) 수십 기가 흩어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속에 풍우에 씻기고 허물어져서 형체가 제대로 남아있는 것은 드물고 또 일찍부터 도굴되어 온전한 것도 많지 않다고 한다.
그 중 능산리고분군은 고분들 중에도 부여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봉분이 비교적 잘 남아 있고 규모면에서도 큰 축에 속하는 무덤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한다.
사적으로 지정된 고분은 7기로써 사적 제1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특히 고분군 입구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계곡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금동용봉봉래산대향로』인데, 이러한 근거들은 이곳을 사비시대 백제 왕릉으로 추정하게 하고 있다.
백제는 역사적으로 백제의 지배층이 고구려처럼 북부여에서 온 부여족인 까닭에 기본적 묘제양식은 돌방(石室)흙무덤이었으며 초기인 한성(서울)시대에는 계단식돌무지무덤(積石塚)을 평지에 만들었다.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란 돌로 정사각형 기단을 계단식으로 3층이나 5층 쌓아 올리고 뒷부분 쪽에 정사각형 돌방을 만들어 시신을 모시고 남쪽으로 길과 입구를 내고 흙을 쌓아 올린 것을 말하는데 이는 중국 집안에 있는 고구려 장군총이나 태왕릉과 흡사해서 고구려와 백제의 친밀한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웅진(공주)시대 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벽돌무덤을 만든 것이다.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과 6호분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무덤은 우리나라에는 기원전에 만들어진 평양근처의 낙랑무덤 이외는 다른 예가 없다고 한다.
사비(부여)시대에는 대부분 돌방무덤을 만들었다. 특이한 점은 이곳 부여 지방에만 화장묘(火葬墓)가 있다는데 이는 백제 후기에 불교가 토착화되어 불교식 장법을 쓴 것으로 보고 있다.
능산리1호고분은 돌방무덤으로 현실(玄室)과 연도가 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쌍영총처럼 현실의 벽면과 천정은 넓은 판석(板石)으로 만들어 천정에는 흐르는 구름과 연꽃을, 동서남북 사방 벽면에는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의 사신도(四神圖)를 그렸는데 탈색되어 희미하게 보인다.
이는 도교사상에 나오는 사방신이 묘실의 시신을 보호하며 지켜주는 것이고, 연꽃이 그려진 천장은 불교의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 된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놀라울 정도로 탁월한 금속공예술을 체감하다
능산리고분군을 관람하고 부여읍 동남에 있는 국립 부여박물관을 관람했다. 일제시대 개관한 국립부여박물관은 1993년에 부여 금성산 남쪽의 현 위치에 신축하였고, 8천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상설전시실인 선사실, 역사실, 불교미술관실과 야외전시실에는 주로 백제 유물을 중심으로 1천점이 넘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각 전시실별 대표 유물은 다음과 같다.
선사실에는 부여지방을 중심으로 충청남도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유물들을 전시하였으며, 송국리선사취락지 발굴 결과를 토대로 청동기시대의 마을 모형을 꾸며놓아 입체적인 이해가 쉽도록 했다.
역사실에는 주로 사비시대의 백제유물인 벼루, 손잡이 달린 잔 등의 백제 토기류, 능산리 무덤에서 발견된 금동제관장식, 금귀고리 등의 금속공예품, 부소산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사람얼굴이 새겨진 토기와 등을 중심으로 전시했다.
1993년 10월에 부여능산리 계곡 절터에서 이 유물이 출토됨에 백제 금속공예사(金屬工藝史)는 물론 나아가서는 삼국과 우리나라의 금속공예사까지도 다시 쓰게 했다는, 백제예술의 금자탑이라고 불리는 제287호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가 있었다.
키가 64㎝나 되는 이 거대한 향로의 전체적인 모습은 머리를 들어올린 용을 받침으로 삼아 피어나는 연꽃위에 봉래산이 솟아나고 그 꼭대기에는 봉황새 한 마리가 여의주를 턱 밑에 낀 채 살포시 날개를 접으며 앉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몸체에는 72개나 되는 우뚝우뚝한 봉래산 봉우리가 있는데 그런 산봉우리 사이사이에는 온갖 기화요초와 호랑이, 코끼리, 원숭이, 천상계의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와 낚시를 하거나 사냥을 하는 신선들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래서 이 진귀하고 화려하고 정교한 이 향로를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란 길고도 화려장엄(華麗莊嚴)한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부여박물관에는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가 담겨있는 칠지도(七支刀) 모형, 백제 건축 연구에 중요한 청동소탑, 산경문, 귀형문, 봉황문, 연화문 등이 새겨진 백제의 기와전돌, 금동여래좌상, 금동보살입상과 정지원이라는 사람이 죽은 부인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위해 만들었다는 뜻으로 3행 16자가 새겨진 정지원명 금동삼존불상(鄭智遠銘 金銅三尊佛像) 등이 설명서와 함께 잘 전시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놀랍도록 탁월한 기술을 가진 백제인들이 만든 걸작 예술품이라서 이곳에서 직접 두 눈으로 보고 감상할 때 맛본 깊은 감명들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렵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