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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평균 나이는 15살에서 18살. 거류면 신은마을 허계 씨 집 소는 올해로 27살이란다. 소가 27살이면 사람나이로 85살쯤. 세계에서 제일 오래 산 소가 49 살 생일을 세 달 앞두고 죽었다는데, 허씨네 집 소도 그 정도 살지 않을까.
외양간을 들어서니 똥그란 눈을 하고 외양간을 휘젓고 다니는 송아지 한 마리와 족히 500㎏는 넘어 보이는 누렁소 4마리, 송아지에서 500㎏로 크다 말고 망아지만할 때 멈춘 듯한 누렁소 한 마리가 음메음메 꼬리를 길게 뺀다. 허 씨에게 어느 소가 그 27살 된 소냐 물으니 망아지만한 소를 가리킨다.
# 내 자식 같아서, 정 많이 들었지
“1982년도에 사온 소 아이요. 올해 보자...27살 묵었다. 사람으로 치모 한 80살, 85살? 원래는 윽수로 컸는데 나이가 들드마는 저리 쪼그라졌다. 그래도 아직도 송아지만 잘 낳는다. 저 배에 또 하나 들어있다.”
허 씨는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 금송아지 있다 자랑하는 그 눈빛을 해서는, 1045번을 달고 있는 소 자랑에 여념이 없다.
이제 막 송아지티를 벗기 시작할 무렵 데려와서 13년을 키우고, 새집 지어 이사한 때가 14년 전이라니, 다 더하면 27살. 그런데도 아직 송아지를 매년 한 마리씩 낳는단다. 허 씨 손으로 받아낸 송아지만 25마리, 이제 9월이면 26마리째가 기다리고 있다.
27살, 올해 28살째라는 소는 시골마을에서 어느 집이나 불쑥 들어가도 할머니들이 밥상을 내주며 쉬다 가라는 것처럼, 낯선 사람을 봐도 경계하는 법이 없다. 저도 할머니라고.
“우리 둘째 며느리가 1980년생 잔나비띠 아인가베. 그런데 저 소가 우리 며느리보다 두 살 작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영 자식 같아서 마음이 더 쓰이더라고.”
1994년 새집을 짓고, 이 소를 데려오려는데 곧 죽어도 안가겠다 버텼다. 팔려가는 줄 알고. 그래서 경운기에 묶고 마을 장정 넷이 달려들어 겨우 옮겨왔다.
사실 팔아버리려 소장수를 부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소장수가 말하기를, 이렇게 나이가 들었으니 팔기보다는 잘 보살피다가 죽으면 묻어주는 게 어떻겠냐 하더란다. 그래서 곰곰 생각하니, 정이 얼마나 들었는데 이놈을 팔까 싶었단다.
# 대강 먹일 수 있나, 홀몸도 아닌데
아침 댓바람부터 소가 운다. 7시 30분이면 밥 내놓으라 냅다 소리를 지른단다. 아침나절 한 번, 정오에 점심 달라 한 번, 오후 5시 30분쯤 저녁 달라 또 한 번 음메 긴 울음을 뺀다. 줄 때까지 음메 음메 울어대니 아무리 바빠도 소밥부터 챙겨야 한다. 그놈 참. 사람만큼 살다보니 이제 사람 흉내도 내나 보다.
배 안에 송아지 한 마리가 들어앉아 그런가, 아까부터 소는 빈 여물통을 썩썩 소리까지 내며 핥아댄다. 홀몸도 아니라니 배가 고파 그러나 해서 지푸라기 한 줌을 들이미니, 아뿔싸, 지푸라기 몇 점 주려다 손까지 줄 뻔 했다. 힘이 장사다.
사료를 털털 뿌려주는 허씨 얼굴에 살짝 근심이 스친다. “소값은 내렸어도 사료값이 올라가, 이 소들을 다 우찌 키우낀가 모르긋소. 다들 내 새끼 같으니 먹는 거를 대강 줄 수가 없다 아이요. 그라고 이 소는 내보다 늙었다는데, 홀몸도 아인 이놈한테 막 줄 수는 없지.” 허씨는 한숨을 쉰다. 매일 뉴스마다 신문마다 소값이 폭락했다고 난리니, 이 소야 그렇다 쳐도, 다른 소들은 어떻게 키울까 걱정이 태산이란다. 소값은 내리는데 사료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니, 지푸라기만 줄 수 없고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허 씨 이마의 주름살처럼 걱정이 깊어진다.
# 소띠해 세 번, 우리집 역사지
“이 소가 태어나서 3년째에 소띠해였고, 12년 지나 두 번째 소띠해, 올해로 세 번째 소띠해를 맞아요. 이런 소가 세상에 또 있긋나.”
엊그제 개봉한 워낭소리. 최원균이라는 여든 노인이 부리는 소가 40살이라 했다. 최노인은 귀도 잘 안들리지만 마흔살 소가 짤랑거리는 워낭소리는 귀신같이 알아듣는다나. 그 소는 최노인의 최고의 농기구요, 유일한 자가용이라 했다. 마흔살 소는 최노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서서히 눈을 감았다. 팔순 노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그 장면에서 허씨의 표정이 묘하게 오버랩 된다.
1045번 소는 농사일도, 자가용 역할도 안하지만, 허씨에게는 자식이나 다름없다. 소는 허씨와 같이 늙었다. 허씨가 마흔살 쯤 되던 무렵, 1982년이었을 게다. 5개월쯤 된 암송아지를 허씨의 아버지가 사왔는데, 이듬해부터인가 송아지를 쑥쑥 낳기 시작해서는 밥도 잘 먹고, 밥 내놓으라 호령도 하는 소가 됐다. 그 소가 27년이나 살고 있다. 소는 허씨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는 것도, 허씨의 아들이 장가가는 것도 전부 지켜봤다.
“이놈이 우리집 역사를 다 알지요. 우리 살림 밑천이요. 해마다 송아지를 한 마리씩 낳으니 그걸로 다른 소도 사고, 아들 장가도 보내고...이놈 없었으모 그리 몬하지. 이놈이 우리집 살림을 일으킨 거 아이요. 그러니 사료값 몇 푼 때문에 팔모 그거는 도리가 아이지.”
그러면서 소의 그 웅숭깊은 눈을 들여다 보는 허씨의 얼굴이 이내 밝아진다. 마치 그 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담긴 듯, 허씨네 집안일이 그 안에 다 있는 듯.
다른 소는 두 번, 세 번씩 실패한다는 인공수정도 이 소는 한 번에 척척 성공한다. 1045번 소가 살림밑천이라더니, 살림 축내는 일은 절대 안하나 보다.
# 촌 살림, 일으킨 게 이놈이지
“이놈 없었으모 내가 우찌 살았을까 싶소. 해마다 송아지를 낳아주니 그 돈만 해도 얼마요. 촌 살림이 다 그러구러 사는 긴데, 이놈 덕분에 이리 사는 거 아이요.”
허씨가 소 잔등을 슥슥 긁으며 말하는 동안, 소는 마치 해탈한 스님처럼 인자하기도 하고, 막 장난거리를 생각해낸 개구쟁이 같기도 한 얼굴로 푸푸 숨을 뱉다가, 혀로 코를 핥았다가 한다.
그러고 보니 소는 한쪽 뿔은 휘었고, 발톱은 거짓말 조금 보태 한 자쯤 되겠다. 짧은 뿔 자리는 긴 뿔이 빠지고 다시 나기 시작한 뿔이고, 긴 발톱은 이미 두 번이나 빠지고 다시 나서 한 자다. 허씨 말처럼 쪼그라지긴 했어도, 뭐라 해야 하나...너무 거창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위엄 같은 것이 얼굴에 붙어있다. 80 넘은 할머니소의 포스, 장난 아니다.
기축년이 소의 해니까 뭔가 거창한 사진을 찍어보려 했다. 논두렁을 허씨가 앞장서면 소는 거구를 이끌고 슬렁슬렁 따라가는 평화로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워낭소리에서 최노인이 마흔살 소 뒤 달구지를 타고 가던 사진처럼 찍으려 했다.
웬걸. 1045번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팔려가는 줄 알고, 한 발짝도 떼려하지 않는다. 허씨는, “마을 청년 몇 명을 부를까”하고 묻지만, 어쩐지 이 할머니소한테 그러면 실례일 것만 같아 포기.
문득, 어릴 적에 밥 먹고 바로 누워 뒹굴뒹굴 게으름을 부리면 할머니가 엉덩이를 툭 치며 하던 말씀이 생각났다. “밥 묵고 바로 누모 소 된다.” 그럼, 1045번 소는 전생에 밥 먹고 바로 누워 뒹굴거리던 게으름뱅이였는지도 모른다.
아니지, 소 평균수명보다 근 두 배를 살고 있으니 천수를 누릴 운을 타고 났을테고, 그러면 아마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든지, 뭔가 큰 공을 세워 복 받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다 보니 소들의 점심시간. 1045번은 밥 내놓으라고 또 소리를 냅다 지른다.
음메 음메 울어대는 1045번 소의 이마를 쓸며 마치 사람할머니께 하듯 “할머니, 오래오래 사세요. 기네스북에도 오르게 오래오래 사세요”하고 중얼거리니 그 말을 알아듯는 듯 꼬리를 살랑거린다. 어쩐지 눈이 웃는 듯한 기분이다. 마치 “너도 건강하게 새해 복 많이 받거라, 아가야”하는 것처럼. 돌아서는데 음메~하는 소리가 꼭 “새해 복 많이 받으소~”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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