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동마을 봉치고개 안개가 죽골을 덮어 계곡 물을 먹고 사라지면 3일 이내로 비가 온다 대산골 동쪽 산봉우리 넓은 바위 벼락맞아 두 쪽으로 갈라져… 지금은 벼락산으로 불러
4. 저연리(苧蓮里) 저연리는 본래 고성군 구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저동(苧洞)과 연동(蓮洞)을 병합하여 저연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연동과 저동의 2개 마을이 있다.
▣ 연동 연동마을은 마을 뒤의 우뚝 솟은 필두봉과 용암산(해발 399.5m) 산록에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연소(淵沼 가 있었는데 옛날에 도사가 이곳에 연종(蓮種-연근뿌리 씨앗)을 뿌려 연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연소’를 ‘연지(蓮池)’라 부르게 되다. 이곳에 풍치림을 조성하여 ‘서무골’이라 칭하고 지금도 여름철이면 동민이 피서를 하는 곳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리하여 마을명도 연지명을 따서 연동이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연지는 지금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약 400여년 전에 작답이란 곳에서 주민 300여호가 집단으로 거주하다가 연동마을로 이거하였다. 이거한지 약 200여년 전에 최초로 함안이씨가 거주하게 되었고, 그 뒤에 경주김씨와 김녕김씨가 입촌하여 약 100여호가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함안이씨의 집성촌으로 48호가 살고 있다.
◎ 정(亭)과 재실(齋室) ◇ 필산재(筆山齋)-마을 뒤에 있는 재실로 임란공신 송암공(松庵公-함안이씨)의 충효사상을 숭앙상전(崇仰相傳)하고 있다. ◇ 연파정(蓮坡亭)-마을 앞에 있는 정으로 함안이씨 문중의 정자이다. ◎ 귀목과 동청 마을 앞에 있는 수령 약 400년 된 느티나무(귀목)로 지금도 보호되고 있어 속칭 동청이라고도 한다.
◎ 마을 숲과 동제 마을 앞 뒤에 조성되어 있는 풍치림은 옛부터 동신제를 음력 섣달 그믐날에 지내고 왔으나 세속변천으로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으며, 풍치림에 있는 귀목을 옛날 통영세병관을 건축할 때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벌채하려는 소문을 듣고 야간에 숲 주변 2m 높이의 원형 석축을 쌓아 보호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 저동 저동 마을은 옛날에 마을에서 모시가 많이 생산되었다고 하여 ‘모시골’이라 호칭하였으며, 1984년 고성군의 리동 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저연리의 저동(모시 저자 苧洞)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쪽골’에 약 300여호가 거주하다가 저동마을로 이거하여 왔다. 이거하기 전 약 200여년 전에 최초로 함안이씨가 거주하였고 그 뒤에 곡부공(孔)씨, 김해허(許)씨, 수원백(白)씨 등 100여호가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38호가 3개의 자연취락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전설 ◇ 귀목나무의 전설 마을에 있는 귀목나무를 옛날 통영 세병관 건축시 자재로 사용키 위하여 벌채한 후에 마을이 망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마을이 망하자 동민이 그 자리에 다시 귀목을 심은 나무가 지금 수령 250여년을 추정하고 있다. ◇ 봉치고개의 안개 봉치고개의 안개가 죽골을 덮어 계곡의 물을 먹고 사라지면 3일 내로 비가 온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도 그런 현상이 있다.
5. 용와리(龍臥里) 용와리는 본래 고성군 구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용당(龍塘)과 와룡을 병합하여 두 마을의 용자와 와자를 따서 용와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와룡과 용당의 2개 마을이 있다.
▣ 와룡(臥龍) 와룡마을은 마을 뒷산(용두산)의 형세가 마치 용이 누워있는 형상과 같다하여 마을명을 와룡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생긴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맨 먼저 입촌한 달성서씨와 그 뒤에 입촌한 함안이씨 문중의 기록에 의하면 약 400여년 전인 서기 1600년 경에 양성씨가 입촌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정(亭)과 재실(齋室) 및 보호수 ◇ 청계정(廳溪亭) : 마을 입구에 있으며 함안이씨 와룡선생이 1586년(조선조 선조 19년)에 창건하였다. ◇ 모선재(慕先齋) : 함안이씨 문중의 재실로 마을내에 있으며 1481년에 건립하였다. ◇ 군나무(느티나무) : 마을 개울가에 있는 노거수로 와룡선생(함안이씨)이 청계정을 짓고 느티나무 2그루를 심었는데 수령 약 408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군나무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전설 ◇ 중바위 : 마을 서북쪽 가는등 중간에 튀어나온 높이 15m, 넓이 10평정도의 큰 바위로 옛날 태고때 천지가 개벽하여 물이 바위 위에 중 한 사람이 서 있을 정도만 남기고 모두 잠겼다고 하여 ‘중바위’라 부르고 있으며 바위밑에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특히 바위에 공룡발자국이 새겨져 있어 신기하다.
▣ 용당(龍塘) 용당 마을은 매화산 밑을 흐르는 매림천에 용소(龍沼)가 있었는데 용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는 누워있는 형상(용두산)과 같다하여 와룡리라 하였고, 윗마을을 와룡, 아랫마을을 용당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임란후에 마을에 주민이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거주민은 함안이씨를 위시하여 재령이씨, 인동장씨, 김녕김씨 등 여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 망경대 마을 입구의 매림공원(梅林公園)안에 있으며 노거수두 그루와 구만12경(九萬12景)의 시비가 있고 함안이씨 문중의 부인 전주최씨의 행정비가 있다.
6. 광덕리(廣德里) 광덕리는 본래 고성군 구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광암(廣岩)과 덕(德岩), 회화면의 녹명 일부를 병합하여 광암과 덕암의 명칭을 따서 광덕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광암, 중암, 덕암의 3개 마을이 있다.
▣ 광암 광암마을은 곤계산(崑季山) 아래 사당산(祠堂山) 산록에 심사봉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인 큰 바위에 금빛이 있었다고 하여 ‘광암’이라는 동명을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1600년경 임진란 전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맨 먼저 입촌한 성씨는 전주최씨이고 그 뒤 임란후에 남평문씨, 창녕성씨, 김해김씨 등 제씨가 입촌하여 한 동안(1950~1970년대) 100여호를 육박하는 큰 마을이었으나 인구의 도시집중과 이농현상으로 지금은 65호가 거주하는 마을로 변하였다.
◎ 광덕리 지석묘 구만면 광덕리에 소재하여 도로 능선 말단부에 기반식 지석묘 9기가 분포하고 있다. 지금은 경작지에 포함되어 있으며 대부분 하부 구조가 훼손된 상태이며, 일부 석조물이 남아있는 곳도 있다. 상석은 3.5m 크기로 대형에 속하는 것도 있고 소형들도 있는데 대부분 군집을 이루나 일부는 다소 떨어져 있는 것도 있다.
◎ 신도비(神道碑) 마을 입구에 의민공(義敏公) 소호 선생과 의숙공(義肅公) 소계 선생의 신도비가 건치되어 있다.
◎ 쌍 열부비(雙 烈婦碑) 마을 내에는 전주최씨 문중의 쌍 열부비가 있다.
▣ 중암(中岩) 마을은 옛날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 고성, 배둔시장에서 금곡, 진주 등지를 왕래하던 보부상들이 밤늦게 마을 앞을 지날갈 때 다른 곳은 달이 밝아 있어도 이곳만은 구름이 가려져 어두웠으므로 흑월(黑月)이라 하여 마을명은 ‘흑달’이라 부르고 왔으며 1949년 광암마을에서 분동하면서 광덕리의 중간마을이라 하여 중암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1803년경에 밀양박씨, 경주이씨가 처음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면서 그 뒤에 전주이씨, 경주최씨, 초계변씨, 남원양씨 등 제씨가 입촌하여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 효행정려비 마을 뒤 도로변에 밀양박씨 문중의 ‘장효각 정려비’가 있다.
◎ 지명 일화 ◇ 흥복골(興福谷) : 중암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 골에 밀양박씨가 입주한 후 김해허씨, 함안이씨 등 여러 성씨가 이주하여 살면서 마을이 빠른 속도로 형성되어 면내에서도 큰 마을이 되면서 복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흥복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가장골(假葬谷) : 옛날에 시신을 가매장한 골로 흥복골 사람들이 죽었을 때 가매장을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 쇠핀산 : 삼국시대부터 쇠를 캐었다고 하여 ‘쇠핀산’이었으나 지금은 ‘쇠판산’으로 부르고 있다.
▣ 덕암(德岩) 덕암마을은 1018년 이전에는 마을에 안씨와 박씨가 먼저 입촌하여 살았다 하여 안박동(安朴洞)이라 부르다가 1984년 이동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뒷산의 큰 암석명을 따서 덕암이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018년 이전에는 안씨와 박씨가 맨 먼저 입촌하여 살았다고 전하고 있다. 안씨와 박씨가 떠난 뒤 1500년경에 강씨와 김씨가 들어와서 현재까지 살고 있다. 그 후 1800년경에 달성배씨와 진양정씨 등 제씨가 입촌하여 살고 있다.
◎ 쌍효각 : 마을 입구에 김해김씨 문중의 쌍효각이 있다. ◎ 정자나무와 지명 일화
◇ 정자나무(느티나무) : 마을 입구에 수령 약 300여년을 추정하는 정자나무가 있다. ◇ 벽록산 : 대산골 동쪽에 있는 산으로 산봉우리의 넓은 바위가 벼락에 맞아 두 쪽으로 갈라져 있으며 지금은 벼락산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 독서석실 : 대산골에 있으며, 옛날 선조들이 독서를 한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