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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정의 주부이자 엄마이며, 또 농사를 짓는 농군으로 살고 있는 사람.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고, 농민의 삶이 나아지길 바라며,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람. 김덕윤 씨는 30년째 그런 여장부로 살아오고 있다.
두 아들들이 그랬단다. “어머니께서 끓여놓고 간 국솥을 보면 아버지는 어머니 집에 언제 오시는지 안다.” 그런 소릴 들으면 마음이야 아프지만, 자신의 농민운동은 우리 가족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한국의 모든 농민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며 허허 웃고 만다. “농사를 지으면 든 것만큼 받아야하는데, 한국은 그게 아니에요. 우리나라는 농업정책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농민이 살 수 있어야 나라가 살죠. 농자천하지대본이라잖아요. 이건 농촌 죽이기죠. 농기계 몇 대만 있어도 억대 빚이 있죠, 기름 값도 감당하기 힘들죠. 그게 우리 농촌이에요.” 그녀는 가톨릭농민회부터 시작해 농민운동을 한지 얼추 30년이 다 돼간다. 그동안 농민운동 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여러 번. 방패에 찍히는 것은 예사고, 갈비뼈 부러지고, 척추 다치고, 머리까지 다쳤다. 그때는 정말 죽는구나 생각했을 만큼.
“광우병 소가 들어온다는 논란이 일 때 100만 명이 모여서 촛불집회를 했어요. 그땐 정말 모든 면이 힘들었습니다. 농민운동을 하는 제 입장에서는 정부가 농촌경제를 살리는데 힘을 “광우병 소가 들어온다는 논란이 일 때 100만 명이 모여서 촛불집회를 했어요. 그땐 정말 모든 면이 힘들었습니다. 농민운동을 하는 제 입 썼으면 좋겠어요. 지금 정부는 1%의 부자를 위한 정치를 하고 있어요. 농민들은 죽어나는 거죠. 없는 사람편인 대통령이 필요한 때예요. 8개도의 복지정책, 농민을 위한 정책을 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평생 단 한 번도 상위 1%의 부자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매년 농사를 지을 때마다 허리가 휜다. 그래서 김덕윤 씨는 농촌의 복지정책을 위해 정부와 싸우는 것이다. “농민운동 하느라 전국을 돌아다니지만, 제일 행복한 때는 역시 농사지을 때예요. 시집와서 6개월을 내가 왜 농사를 짓나 생각했는데, 그때가 지나니 마음이 열리더라고요. 지금은 농사가 천직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그랬으니 요즘 젊은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요? 농촌 복지정책만 잘 된다면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돌아오겠죠. 저는 그러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겁니다.”
그녀는 복지정책만 잘 된다면, 젊은 사람들도 다시 농촌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나라를 끌어가 는 ‘윗분들’이 농촌에 조금 더 신경써주길 당부했다. 김 씨의 남편은 집안일이며 농사일을 잘 돕다가도 그런다. “이거 안하모 안되긋나.” 하지만 김씨는 언제나 “내가 좋은 걸 어쩌겠어요. 농민운동은 여러 사람을 위해서 하는 거지, 나 하나만 위해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나는 운동할 때 뿌듯하고 떳떳해요. 후회되지 않죠. 그러니까 저는 이 일을 할매가 돼도 할 겁니다”하고 허허 웃어버린다. 지금 우리 농촌은 빚으로 살고 있다. 비료 값도 배가 되고, 곡물값이 배가 되니 사료값도 올랐다. 그런데도 쌀값은 동결이다. 그러니 김씨 말대로 빚을 내지 않고는 생활이 힘들다.
김씨는 말한다. “지금 이건 완전히 농촌 죽이기죠. 나중에 식량이 무기인 시대가 오면, 우리나라는 약소국이 될 지로 모릅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 했다. 농사를 짓는 이가 천하에서 제일 가는 일을 하는 것이라 했다. 김덕윤씨는, 농자천하지대본이 되는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며, 오늘도 전국여성농민회장 으로 농군의 선두에 나서 목청껏 소리 지를 것이다. “농사가 사람 사는일에 근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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