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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 대흥초에 장학금 전달, 재경향우들의 정신적 대부
신용제일주의·원칙주의자·달마대사 같은 분으로 통해
올해 일흔일곱인 이정옥(李正玉·성산 이씨) 제일사진인쇄주식회사 회장은 첫 인상이 달마대사 같다.
보통 키에 적당한 살집, 눈빛이 밝고 부드러우며 둥근 얼굴에 약간의 홍조를 띤 동안으로, 상대방에게 금방 편안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아침마다 30분씩 집안에서 러닝머신을 하고 앉은자리에서 소주 두병을 마시는 술 실력에다 골프는 프로급으로 대단한 건강 체질이다.
이정옥 회장은 1932년 경남 고성군 대가면 암전리(대가저수지 동쪽 마을)에서 이현백(李鉉白)씨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대흥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을 맞이했다. 논 다섯 마지기밖에 안 되는 빈농에서 태어난 이 회장은 어릴 때 회충 배를 자주 앓아 다른 아이들보다 1년 늦게 학교에 들어갔다.
그래서 이상진(전 외무부 대사), 최위승(전 무학소주 대표)씨 등 동급생들보다 한 살 위였고 힘도 좋아서 골목대장이었다. 이 회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통영군 욕지도에 있는 서당에 가서 한문 공부를 2년 동안 하게 된다.
- 왜 욕지도로 갔지요?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한 아버지 친구 한 분이 한문공부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농토도 없고 가난해서 욕지도로 이사를 갔습니다. 당시 고성사람들 중 살기 어려운 사람들은 욕지도로 이사를 많이 갔습니다. 욕지도에 가면 고구마도 많고 해산물도 풍부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에 좋았습니다. 그 분은 그곳에서 서당을 열었고 저도 그곳에 가서 한문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 1948년 열일곱 살 때 결혼을 하셨군요.
“통영군 도산면 김해김씨 처녀(金水國씨·이 회장보다 한 살 위)와 결혼했지요. 장인어른이 도산면에서 어장을 하시다가 실패하고 역시 욕지도로 이사를 왔지요. 그래서 인연이 엮인 것이지요”
- 2년 후 1950년에 장남 수용(水用)군이 태어났군요.
“그렇지요. 6.25 전쟁이 터진 그 해 12월 수용이가 태어났지요. 전쟁이 터졌지만 우리는 욕지도에서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고 편하게 지냈지요.”
다음해인 1951년 4월에 일본으로 밀항하셨는데 수용이가 태어난 지 4개월밖에 안 됐을 때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라는 전쟁터가 되어 버렸고 청년들은 전쟁터로 나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었지요. 그래서 고모님 두 분이 계시는 일본으로 밀항하기로 결심했지요.”
이 회장은 당시 나이 20세. 한 살 아래인 고종사촌의 이름으로 오사카 한신(阪神)공고에 입학하여 1954년 졸업장을 받았고 곧바로 교토의 다마이(玉井)건설회사 영업사원으로 입사한다. 이 회장은 그러나 배움에 계속 목이 말랐다. 1955년 단골 술집에서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토목학과 교수를 사귀게 되고 이 교수의 도움으로 이 대학 토목과 청강생으로 대학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이 회장의 대학공부는 3년 수료로 끝났지만 이 때 인연을 맺은 그 교수 덕분으로 교토 일대의 주요 건축토목공사를 수주하는 데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 입사 4년 만에 전무이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그 교수를 회사 고문으로까지 영입하게 된다.
이 회장은 1959년(28세 때) 8년 만에 일시 귀국하여 부인과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아들 수용 군을 상봉한다. 그리고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1965년(34세 때) 일본 도쿄에서 플라스틱사출업체인 성화화성(星和化成)주식회사를 설립한다.
- 영구귀국은 언제 하셨지요?
“1971년, 그러니까 내 나이 마흔 때 수용이가 서울대 의대에 입학하게 되고 가족도 서울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 영구귀국하게 되었지요.”
-제일사진인쇄주식회사는 어떻게 설립하게 되셨나요?
“일족 동생인 이을숙(李乙淑·마암면 두호리·전 교육공무원)이 서울 성수동에서 제일사진인쇄공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내가 자금과 원료자재 등을 공급하다가 서로 마음이 맞아 1973년부터 정식 동업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지요. 근 40여년을 내것네것없이 친 형제처럼 서로 믿고 지냅니다.”
- 그러면 35년간을 계속 사진인쇄사업을 하시는 셈인데 회사 내역을 좀 소개해 주시지요.
“대지 1000여 평, 건평 800여 평에 3층 건물로 시설수준은 특급이며 첨단입니다. 한때는 직원 150여명에 국내 앨범물량의 40%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문화공보부 장관상·육군사관학교 교장상 등 상도 많이 받았지요.”
- 노사관계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한때 우리 공장은 성동구 일대의 인쇄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센터였습니다. 나는 노조설립도 파업도 다 묵인했습니다. 심지어 농성장에 맥주와 소주도 보내주었지요. 그러나 나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은 철저히 지켰지요. 회사경영실적도 공개했습니다. 그랬더니 노조도 자진해체 되더군요.”
- 경영철학을 좀 소개해 주시지요.
“나는 약속과 신용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앨범 납품날짜는 꼭 지켰습니다. 그랬더니 일거리가 저절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원료 납품업자들에 대한 대금결제일도 매월 10일로 정해놓고 그 약속을 꼭 지켰고, 어떤 때는 납품업체에 먼저 전화를 해서 돈을 받아가라고도 했습니다. 매월 5일 월급날도 철저히 지켰습니다.”
이 회장의 책상 뒤 벽에는 ‘직장인의 신조’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지혜를 발휘하라. 지혜가 없는 사람은 힘을 발휘하라. 지혜도 힘도 없는 사람은 땀을 흘려라. 지혜도 힘도 땀도 없는 사람은 조용히 물러가라.’
이 회장의 조상숭배와 고향사랑은 유별나다. 고향의 선산관리는 오래 전부터 칭송의 대상이 되었고 성산이씨 종중사업에도 정성이 지극하다. 고성군 마암면 두호리의 덕산서원 중건사업, 세종대왕때 병조판서를 지낸 이호성(李好誠) 할아버지와 선조 때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간(李侃) 할아버지 신도비 건립사업, 그리고 경북 성주군 암포서당 중건사업에도 큰돈을 희사하였다. 친족자녀들을 위해 ‘대성장학회’를 설립(최근까지 이사장 역임), 5~6억 원의 기금도 운영하고 있다.
고성군내 불우 청소년들을 위하여 교육발전기금 1억 원을 내놓았고 모교인 대흥초등학교에는 40여 년간 장학금과 장학 상품을 보내고 있다. 낡은 고성향교 건물을 대대적으로 중수복원하기 위해(소요예산 약 30억 원) 관계당국자들을 열심히 설득하고 있으며, 또 고향에 민족사관학교와 같은 사립학교를 건립하려는 꿈을 키우고 있다.
- 회장님의 교육철학을 듣고 싶군요.
“교육철학이라고 말하기는 그렇고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국과 일본 양국을 비교할 수 있는 입장에서 말한다면, 먼저 초중고 교육은 인륜도덕교육이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은 모두 시험을 쳐서 뽑아야 합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철저한 재평가를 받아야 하고 전교조는 점차 해체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회장의 자녀 교육 원칙은 철저한 자립자율주의다. 장남 수용씨(59세)는 대흥초등·고성중학·부산고교·서울대 의대 학사·석사·박사과정을 거쳤지만 과외공부 한 번 시키지 않았다. 수용씨는 1985년 원자력병원 정형외과 과장, 2004년 원자력병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매년 고성향인 암환자 50여 명씩을 특별진료하는 등 고향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하고 있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차남 상호(相澔)씨는 올해 32세로 캐나다에 유학 중이다. 손자가 1명, 손녀가 2명인데 특히 큰 손녀인 혜승(31세)양은 고교 1년 때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코넬대·존스홉킨스대 생명공학박사를 거쳐 지금은 조지워싱턴대 로스쿨에서 국제변호사의 꿈을 키우고 있는 억척이다. 조카딸 이영숙(47세·동생 이정호씨의 딸)씨도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박사)이다.
- 고향에는 자주 가십니까?
“해외여행 나갈 때, 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고향 선산에 가서 먼저 성묘를 하지요. 고향집도 새로 고쳐 놓았고 언젠가는 내려가서 살 작정인데 아들들이 반대해서 내려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 고성군 발전방향에 대해서 좋은 의견이…….
“관광레저와 같은 친환경 산업에 집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예컨대 삼산~하이면 사이의 해안지역은 관광풍경지역으로 잘만 개발하면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는 경북 경주시처럼 원자력발전소와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을 유치함으로써 정부의 대규모 투자를 끌어들이자는 것입니다.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성과 방사능 폐기물 처리기술의 완벽성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고 또 친환경적으로 단지를 꾸밀 수 있는 경험과 기술도 확보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도 불안해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야 합니다.”
필자는 최근 재경향우회 회장단 모임에 합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정옥 회장에 대한 인물평이 쏟아져 나왔다. ‘사업하면서도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분이다’ ‘병원장까지 지낸 아들에게 부정하지 말라고 한해에 2000만원씩 용돈을 주시는 분이다’ ‘향우회 모임 술값은 언제나 이정옥 회장님 몫이다’ ‘세대 간의 갈등을 해소해 주시는 윤활유 같은 분이다’ ‘사교범위가 방대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걸어 다니는 인물사전이다’ ‘대화상대를 항상 편안하게 해주시는 달마대사 같은 분이다’
끝으로 필자는 이 회장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올해 희수(77세)이시고 결혼 60주년이신데 행사 한 번 크게 하셔야지요?”
“잔치할 돈 있으면 가난한 고향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이나 더 보낼 랍니다.”
(전 동아일보 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