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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 기록 신라 때 우산국이라 불러

태종 7년 안무사 김인우, 15가구 86명 거주 기록 남겨, 세종실록지리지 우산과 무릉 2개 점 정동, 해중 위치,독도 명칭 광무 10년 울릉군수 심흥택의 보고서에 등장
김화홍본지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8월 20일


3. 우리나라 독도 관련 역사 자료



▲참고자료=삼국사기, 고려사, 태종실록, 세종실록지리지 고려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숙종실록, 증보문헌

고,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담록, 각도관찰안, 증정교린지, 춘관지, 동문휘고, 지봉유설, 통문관지, 만기요람, 대한신지지, 성호사설, 여유당전서, 울릉도 사적 등. 우리측 자료 몇 가지만 풀이하여 적어본다.



(1)고려사 지리지 권18 울진현(1451년)



울릉도가 현의 정동해 중에 있다. 신라 때 우산국이라 불렀는데, 혹은 무릉, 혹은 우릉이라고도 한다. 지방은 백리로써…….



혹은 말하기를 우산도와 무릉도는 본래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2)태종실록(17년 2월 임술조)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에서 돌아와 토산물인 대죽, 수우피, 생저, 면자, 검박목을 바쳤다. 그 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호수는 15구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



(3)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1432년편)



우산과 무릉 2섬이 현의 정동 해중에 있다. 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 또는 울릉도라 하였는데 넓이가 1백 리이며, 섬 사람들이 지세가 험함을 믿고 항복하지 아니하므로, 지증왕 12년에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미련하고 사나와 위력으로는 항복시키기 어려우니 계교로 항복시키는 것이 가하다”고 말하며 아에 나무를 깍아 맹수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닿아 속여 고하되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짐승들을 풀어 놓겠다”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겁내어 항복하여 왔다.


 


고려 태조 13년에 그 섬 사람들이 백길토두를 시켜 방물을 바쳤다.



의종 13년에 심찰사 김유립 등이 돌아와서 고하기를 “섬 중에 큰 산이 있는데 산 정상으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를 1만 여 보이요, 서쪽으로는 1만3천7곳이 있고, 간혹 돌부처, 쇠북, 돌탑이 있으며, 시호·호본·석남초가 많이 자라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 태조 때 떠돌이 백성들 중 그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자가 심히 많다함을 듣고, 다시 삼척 사람 김인우에 명하여 안무사를 삼아서 사람들을 내몰고, 그 땅을 비우게 하였는데 김인우가 말하기를 “땅이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기둥 같으며, 쥐의 크기는 고양이 같고, 복숭아 씨가 됫박보다 크며 모든 물건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4) 울릉군수 심흥택의 보고서



심흥택 보고서 전문(1906. 3. 5)



본군 소속 독도가 울릉군 외양 백여 리가 되오니 3월 4일 신시경에 수송선 1척이 울릉도 도동항 포구에 일박하여 일본관인 일행이 도착하여 스스로 독도가 일본 영토이므로 시찰차 섬에 왔다 하였다.


 


일행들은 일본의 도근현 은기도의 세무감독국장 등이 수행원을 이끌고 왔다는 내용을 보고해왔다. (광무 10년 병오 음 3월 5일) 이 보고서에 의해 정부는 독도가 한국령임을 일본에 알리고 독도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했다.



(5)연합군사령부의 지시명령서(Scapin)에서 일본의 영토 규정 내용 지도(1946. 1)



1946년 1월 29일자 연합군 사령부가 일본 영토의 확정에 관한 지시명령서(Scapin)677호에 울릉도, 독도, 제주도가 일본의 영토에서 분리되어 한국 영토임을 확인시킨 지도로서 우리나라 38선 및 맥아더 라인이 그어져 있다. 이 선은 1952년 평화선으로 효력을 발생했다.


 


▲일본자료=통항일람, 대마도종가고문서, 통신전람, 조선외교사문서, 은주시청합기, 죽도도설, 삼국통람여지로정전도, 은기고기집, 죽도고, 죽도고증, 조선수로지, 조선지리지, 기죽도각서.



아래 몇 가지만 적어둔다.



(1) 은주시청합기 권1 국대기(1667)



일본의 은주는 북해 중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출운의 미수관이 35리 떨어져 있고, 남동쪽으로는 백기주의 적기포가 40리, 남서쪽으로는 석주 온천진이 58리 떨어져 있다.


 


북쪽에서 동쪽으로는 연결되는 곳이 없고 북서 방향으로 이틀 낮과 하루 밤을 가는 곳에 송도가 있고, 이 곳에서 다시 1일 낮을 가면 죽도가 있는데, 소칭 기죽도라고도 하며 대나무와 고기, 물개가 많다. 이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며, 이 섬에서 고려를 바라다보는 것이 일본의 출운 지방에서 옥기도를 바라다보는 것과 같다.


 


그런즉 일본의 건지, 즉 북쪽 영역은 은기도를 한계로 한다.



(2) 기죽도각서(1696)



복포로부터 송도까지 80리정……
송도에서 죽도까지 40리정……
(福浦より松嶋まで八十里程……
松嶋より竹嶋へ四十里程……)



(3) 은기고기집(1823)



북서쪽으로 40여 리 떨어진 곳에 송도가 있는데 주위가 무려 1리 정도로서 生木이 없는 암서(岩嶼)라고 한다. 또 동쪽으로 70여 리 떨어진 곳에 죽도가 있다고 전하는데 竹과 木이 무성한 큰 섬이라 하며 이 곳으로부터 조선을 바라보면 인슈바를 바라보는 것보다 가깝다고 하는데 지금은 조선인들이 내왕한다고 한다.



(4) 죽도고증(1881)



송도는 울릉도이며 죽도라는 것은 하나의 암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오늘날 송도는 원록 12년(1696)에 말하던 죽도로서 고래로 아국판도 밖의 땅임을 알게 되었다.


 


▣ 울릉도와 독도의 내력



6세기 초(AD 512),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의 정벌로 신라 영토에 편입된 이래 통일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반 독립적이며 자치적으로 다스려졌으며, 현종, 덕종 간에는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한 채 존속했다.



그 후 12세기 중엽부터 고려의 지방기구(명주도 소속)으로 편입되어 본토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중앙에서부터 정확한 지리적 지식을 얻게 된 것은 15세기 초엽으로 태종, 세종 시대에 우산국에 대한 지리가 지도상에 등장한다.



그리고 공도정책(空島政策) 시행과정에서 독도는 다양하게 명명되었으며 가지도, 삼봉도 등으로 불려졌다.



「동국여지승람」에서 ‘하루는 무릉이요, 또 하루는 천산(중국의 절경)이니 모두 천산의 나라가 아닌가’라는 기록으로 보아 울릉도에 대한 명칭에 다양하다. 울릉도는 우릉(芋陵), 우릉(羽陵), 울릉(蔚陵), 울릉(鬱陵), 무릉(武陵), 무릉(戊陵) 등으로 기록이 나온다.



1872년에는 울릉도, 독도에 대한 공도정책을 변경하여 개척의 구체적 방침으로 관리를 파견하거나 감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도장, 도감, 군수를 제도화했다. 그리고 일본도 의문의 여지없이 우리의 영토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독도라는 명칭은 광무 10년(1906)에 울릉도 군수 심흥택의 보고서에 「본군부속독도」라고 처음 나타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외국인이 발견한 독도 내용



서세동점의 물결이 밀려옴에 따라 동해상의 고도인 울릉도도 서양탐험가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1787년(정조 11년)에 프랑스 해군대령 존 프랑수아 칼로페르스가 루이 16세의 명을 받아 태평양 탐험을 하던 중 한반도의 동해에서 외롭게 떠 있는 섬을 발견하고, 승무원 중 최초의 발견자인 다줄레(Dagelet)의 이름을 따 독도를 <다줄레>라고 했다.



그 후 1894년(현종 15년) 프랑스 선박 리앙쿠르 이름을 따서 바다 지도상에 표시되기도 했다. 한편 17세기경에 일본 오키도(隱岐島)의 어부들이 독도를 발견하고 처음에 송도라 칭한 것은 지금부터 300년 전의 일이며,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울릉도 이름을 쓰던 죽도를 독도로 부르고 있다.


 


러시아인은 1854년 러시아 군함 팔라다호가 이 섬을 발견하자 배 이름을 따 팔라다도라고 이름을 붙였다.


 

김화홍본지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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