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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상리중학교 학생들이 퇴비증산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
요즘도 농산물의 품질향상과 친환경농업의 실천분위기 조성을 위해 친환경 퇴비생 산을 특수시책으로 선정해 행정력을 집중시키기도 한다.
1960년대 당시에는 화학비료의 보급이 그리 원활하지 않아 정부는 식량증진의 하나로 퇴비증산을 시책화하여 마을단위의 예초대회는 물론 초·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퇴비증진에 동참시켰다.
또 당시 학생들은 학교를 다닐 때도 애향깃발을 들고 마을별로 등교했으며, 여름방학만 되면 퇴비증산 운동이라는 단체 방학숙제를 부여받았다.
1973년 상리중학교 학생들 또한 퇴비증산운동에 동참해 베어낸 풀을 검사를 받고 있는 한 장의 사진이 그때 그 시절을 증명한다.
퇴비증산운동 때면 남학생들은 각자 집에서 낫 두 자루 이상씩 숫돌에 갈고 마을 최신 운반구 리어카가 총 동원되는 건 일쑤였다.
특히 각 마을별로 풀을 베어다가 학교 앞마당에 마을별로 구역을 정해 쌓아놓고 제일 풀을 많이 베어다가 모은 마을에 1등 표창을 주었는데 요즘 학생들을 보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희한한 방학 숙제였다.
중·고등학생들은 보통 여름방학을 이틀 정도를 남겨 두고 날짜를 잡아 풀 배기 숙제를 단체로 하곤 했다.
여학생들은 각자의 집에서 나는 고구마나 고추·된장 등 막걸리를 준비하고 남학생들은 각자의 집에서 낫을 2자루 이상씩 숫돌에 갈아 챙기며 꼭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받아오곤 했다.
한참 풀을 베다 낫으로 벌집을 건드리는 날엔 낫이고 뭐고 다 팽겨 치고 개울가로 뛰어 들었고, 재수가 없어 벌에 쏘인 학생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벌집이 돼 약도 없는 상황에서 그저 생된장을 발라 붓기가 빠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여름방학숙제는 곤충채집, 일기쓰기, 미술관람 등으로 바뀌었지만, 그 당시 마을의 리어카까지 총 동원되는 장난이 아닌 여름방학숙제는 70년대 학창시절의 추억을 가진 이들은 그리움으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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