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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리 신촌마을 사천시와 경계 이뤄, 양촌마을 독종골 옹기 굽던 가마터와 독 팔던 전이 있었다 해 붙여져
6. 월흥리(月興里)
월흥리의 동명은 옛날에는 월아(月牙)로 불렀으나 1914년에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신흥(新興)과 월아 및 하일면의 입암 일부를 병합해 월아와 신흥의 이름을 따서 월흥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리로 월흥, 입암, 신흥, 정곡의 4개 마을이 있다.
▣ 월흥(月興)
월흥은 본래 월아마을로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월아와 신흥의 이름을 따서 월흥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단일 행정마을로 형성돼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허씨가 맨 먼저 입촌하였다고 전하고, 그 뒤에 배씨와 밀양박씨, 밀성박씨가 입촌하여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 문중의 선산(先山)을 참고하여 살펴보면 약 400여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밀양, 밀성박씨와 진양강씨가 대성을 이루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
마을의 지세는 마을뒤 북쪽은 무등산, 동남쪽은 다복산, 서남쪽은 백화산에 둘러 싸인 분지로 형성된 마을로 마을 앞의 비교적 넓은 들판은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이나 수원이 풍부하지 못해 한발 때에는 지하수를 활용하여 영농을 하고 있다.
◎ 재실과 비
마을 내에는 밀성박씨 문주의 재실인 졸헌재(拙軒齋)와 효자, 열녀비가 있고 밀양박씨 문중의 재실인 덕숭재(德崇齋)와 공적비가 있다.
◎ 당산나무와 동제
마을 동편 뒷산 기슭에 잇는 ‘포구나무’로 수령 약 85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둘레가 10m나 되어 옛날부터 마을의 수호목으로 매년 음력 정월 초순에 제관을 미리 선임해 동제를 지내고 있다.
그리고 여름에는 동민들의 피서지로, 가을에는 포구를 따먹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나무에 올랐다가 떨어져도 다치거나 불구자가 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하여 신성시하고 있으며 낙엽을 땔감으로 사용하면 우환이 든다고 전하고 있다.
◎지명 일화
◇ 무등산 : 마을 뒤에 있는 산으로 일명 ‘이승산’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전쟁터로 전하고 있으며 산 정상에는 축대를 쌓은 흔적이 남아 있고 축대 안에는 불을 지핀 숯이 지금도 남아있다.
◇ 사장터 : 마을 서쪽에 있는 나즈막한 야산으로 옛날 이곳에서 활쏘는 연습을 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지명이 변하여 지금은 ‘새장터’라고도 부르고 있다.
▣ 입암(立岩)
입암마을의 동명은 ‘선바위’라고 불러왔는데 이는 마을 앞의 바닷가에 바위(岩)가 많이 서 있다 하여 지어진 동명으로 이를 한문으로 입암이라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은 구전에 의하면 맨 먼저 김해허씨가 살다가 떠나고 그 후에 분성배씨가 살았다. 지금은 김녕김씨가 약 350년 전에 입촌해 현재의 마을회관 옆에 있는 우물을 발견 식수로 하여 거주하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 소나무 숲
마을 바닷가에 우거진 소나무숲은 약 100년 전에 바닷가 돌밭에 흙을 넣어 심은것이다. 여름철에 주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으나 마을 앞에 선착장을 축조하면서 일부 베어버려 지금은 몇 주만 보존되고 있다.
◎ 지명 일화
◇ 외성고개 : 임진왜란 때 적을 방위하던 고개로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고래장골 : 옛날에 70살이 되면 고려장을 하였는데 이곳에서 고려장을 하였다고 하여 고래장골이라 부르고 있다.
▣ 신흥(新興)
신흥마을의 동명은 옛날 동네 입구와 마을 주변에 섶밭이라는 숲이 우거져 있어 그 이름을 따서 섶밭이라 불러 왔으나 광복 후 행정구역 개편시 새 신(新)자에 월흥의 흥(興)자를 따서 신흥(新興)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마을 앞의 월흥초등학교 옆의 다리 이름도 일제시대에 가설하면서 신전교(新田橋)로 표시되어 있었다.
◎ 마을의형성
마을의 형성 연대를 마을 뒤의 당산과 마을 건너편의 섶밭, 마을 들판에 있었던 지석묘 등을 살펴보아 아주 옛날 거석문화 시대까지 추정할 수 있다.
특히 당산의 제단과 입석의 거석문화 유적 등을 고증해 볼 때 사람이 살게 된 시대를 약 2,00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오래된 비문으로 제당산에 있는 함안조씨가 이 마을에 살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또, 구전에 의하면 그 이전에 김녕김씨가 마을에 살았다는 설도 있다.
◎ 마을의 지세
신흥 마을의 지세는 와룡산을 조산(祖山)으로 하여 뻗어내린 줄기의 첫 계곡에 어 부자가 살았다는 어부자곡(谷)이 있고 그 앞에 뒷골이 있다.
동네 오른쪽에 숫갓산(雄山)이, 마을 왼쪽에 청룡등이 있어 풍수지리설에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한 지세의 명당이라 말하고 있다.
그리고 큰 재 너머에는 팥밭골과 묵은 터(옛 거주지)에 피죽들이 있어 옛날의 주거지가 있었던 흔적이 있으며, 마을 옆에 국도가 생기기 전에는 청룡등 기슭을 따라 오솔길이 있어 고사립(古門)까지 사람들이 다니던 길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 곳에 있었던 고사립 돌다리(3m 이상의 큰 돌 2개로 만든 돌다리)는 도로 확장 공사 대 없어졌다.
또한 마을 입구의 오른쪽은 작은 비렁(小岩)거리, 왼쪽을 큰 비렁(거리라 하였으며 동네 입구를 장승거리라 하여 길 양쪽에 천하대장군, 지하대장군의 장승이 있었으며, 마을 주변의 산세가 유순하여 신흥 태생인은 악인이 없다고 한다.
7. 석지리(石芝里)
석지리는 본래 하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3월 1일에 고성군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 남고개 일부와 사천구의 궁지동 일부를 병합해 석지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리로 신촌(新村), 양촌(陽村), 남산(南山), 음촌(陰村)의 4개 마을이 있다.
▣ 신촌(新村)
신촌 마을은 봉현천 주변의 들판에 형성된 마을로 사천시(삼천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약 200년 전에 주민이 입주하게 되어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하여 신촌이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것은 약 200년 전에 천씨가 입주하게 되고 그 뒤에 김해김씨가 입주하여 정착하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지금은 김해김씨, 밀양박씨, 진양강씨 등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양촌(陽村)
양촌 마을은 햇볕이 잘 드는 양지마을이라 하여 마을명을 양촌이라 하였으며, 석지라(양촌, 음촌, 남산, 신촌)의 석지라 할 때에도 유독 양촌 마을을 지칭하는 마을명으로 통용되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마을 부근에 있는 지석묘 등의 유적들을 근거로 하여 살펴보면 아득한 옛날 이 근처에 몇몇 권세가를 위시한 주민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나 어느 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황씨가 맨 먼저 입주했고 다음이 월성손씨(임진왜란 이후로 추정), 고성이씨(약 350년 전후), 고성박씨(약 260년 전후), 김해김씨(약 80년 전후)가 차례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게 됐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는 위 성씨 외 밀양박씨, 진양강씨, 전주최씨 등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사적
◇ 석지리 지석묘(전 수로능(傳 首路陵)) : 석지리에 있는 직석묘 군으로 6기가 있으며 지방기념물로 지정(1997년 12월 30일) 되어 있다.
◇ 서재터 : 마을 동쪽에 100여 년 전에 세워졌다는 육영재가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으며 그 서재터를 보존해 오다가 최근에 처분하였다. 이 육영재는 옛날 학업과 강학을 하던 이 곳의 유일한 수학기관으로 역할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 지명 일화
◇ 소고개 재 : 마을의 뒷산으로 와룡산이 넘어다 보인다고 하여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금벌(禁伐)을 하고 잘 가꾸어서 울창한 산림을 조성해 방풍도 되게 하고 풍치림으로 잘 보존하고 있다.
◇ 독종골 : 독종골 근처의 전답에서 옹기조각이 나왔으며 남산기슭에 옹기를 굽던 가마터가 있었고 이곳에서 독을 팔던 전(廛)이 있었다고 하여 독전골(독종골)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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